63화
현재 시리우스 제국의 황제인 시리우스 3세가 자신의 여동생인 오필리아 황녀와 약혼식을 해 달라고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
물론 깔끔하게 거절했다. 그런데도 시리우스 3세에게 끈질기게 편지는 오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 거절하고 있다.
자신은 플로렌스 대공이다. 황제의 부탁을 여러 번 거절해도 시리우스 3세는 자신을 건드릴 수 없으며 자신 역시 굳이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
플로렌스 대공의 결혼에 많은 이들이 관심이 있겠지만 테오도르에게 있어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메이아’ 한 명뿐이다.
플로렌스 대공은 시리우스 제국의 황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대대로 황위에 대한 욕심을 한 번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 사실 또한 황족들은 잘 알고 있어서 플로렌스 대공가를 경계하지 않으며, 좋은 교류를 하고 있었다.
황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으며 재력이 넘쳐 나는 플로렌스 대공가의 하나밖에 없는 후계자인 테오도르와 결혼을 원하는 가문들은 많았다. 손만 뻗으면 원하는 모든 걸 얻을 수 있는 위치지만 테오도르는 딱히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건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성인식을 치른 뒤에는 적당한 가문의 여성과 결혼해서 후계자를 낳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은 겪고 싶지 않았다.
소중한 걸 만들지 않을 것이고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적당히 웃어 주고, 적당히 일하며 지내 왔다.
언제나 자신의 세계는 고요했다. 그 누구도 물들일 수 없는 검은색 같은 세계였다.
하지만 메이아를 만난 이후부터 생각이 달라졌다. 별과 달빛이 없는 새까만 어둠 속에 혼자 있더라도 아침이 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달빛과 햇빛을 머금은 은빛 머리카락과 도톰한 붉은 입술, 차분함과 우아함이 느껴지는 푸른 눈동자가 자신의 세계를 환하고 아름답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언제나 적당히 살아왔던 어두운 세상은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가 원한다면 플로렌스의 넓은 대지와 바다도, 많은 재산도, 보석들도, 권력들도 남김없이 주고 싶다. 만에 하나 그녀가 자신을 가진다면 자기에게 딸려 오는 많은 것들까지 그녀가 다 가질 수 있을 텐데.
달콤한 상상이 멈추지 않고 계속 핑크빛 미래를 꿈꾸게 만들었다. 이 이상의 상상은 항상 심장에 좋지 않았다.
*
오늘 메이아는 아침 일찍 일어나 침대에 누워 구르면서 한가함을 만끽했다. 이렇게 사람이 공부 안 하고 놀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대공가 생활이 꼭 마음에 든다. 스트레스 주는 루만과 메릴도 없고 억지로 공부할 필요도 없으며, 모임을 위한 준비도 하지 않아도 된다.
공작저에서 예비 황태자비로 항상 바쁘게만 살아왔다. 아침에는 마나 수련 그리고 오전에는 승마와 약간의 몸풀기 운동 그리고 아침 식사 이후에는 황후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한 공부 그리고 또 공부. 게다가 가끔 있는 티 파티와 각종 연회 참석을 하고 황궁의 일까지 도왔다.
대공가에서는 아침에 일어나 약간의 운동과 마나 훈련을 한다. 그리고 테오도르와 아침을 먹으며 차 한 잔 마시고 함께 집무실에서 일을 보다가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한다. 그렇게 집무실로 돌아와 이어서 업무와 회의를 하다가 베나블이 가져다주는 딸기 차를 마시며 일하다 보면 저녁이다.
무엇보다 매일 그와 함께하는 평화로운 일상이 마음에 든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문을 열고 아그니타가 들어와 커튼을 걷어 올렸다.
“응, 아그니타 좋은 아침이네.”
침대에 누워 뒹구는 메이아를 본 아그니타는 밖으로 나가 아침 식사가 담긴 트롤리를 끌고 들어왔다.
“오늘도 집무실에 계실 건가요? 아가씨?”
“응, 그럴 생각이야. 대공님은 10시에 방 앞으로 온다고 했으니 그 전까지 여기 있으려고 해. 아그니타는 대공저에서 쓰는 방 어떠니? 사용인들은 친절하니?”
메이아의 질문에 아그니타는 방긋 웃으며 답했다.
“모두 친절하세요. 그런데.”
“그런데? 말해 봐, 아그니타.”
“다들 테오도르 플로렌스 대공 각하 칭찬만 해요. 지겨울 정도로요.”
아그니타의 말을 들으며 메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테오도르 대공님이 아랫사람들한테 잘한다는 거겠지.”
“아가씨, 요즘 대공가 소문 들으셨어요?”
“무슨 소문?”
“아가씨가 대공비가 될 거라고 말해요.”
“그래?”
테오도르가 자신을 좋아하는 건 알고 있다. 고백받았으니 말이다. 지금은 답을 못 주고 있지만 시기적절할 때 약혼에 대한 답을 줄 거다. 그때는 테오도르가 어떠한 표정을 지을지 기대되었다.
그렇다고 그 표정을 보기 위해서 약혼하려는 건 아니다. 서재에서 반나절 함께 있으며 자는 얼굴까지 보여 주었으니,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은가!
아그니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테오도르 대공 각하께서는 아가씨한테 매일 고백하시고, 거기다가 아가씨가 안살림까지 맡으시고, 서재에서도 소파 위에서 그런 자세로 있으셨으니 사용인들 사이에서 로맨스 소설이 몇 편이나 나오는지 모르시죠? 세상에, 결혼까지 간다고 이야기하길래 절대 저는 아니라고 말했어요.”
메이아는 아그니타의 말에 차갑게 말했다.
“아그니타, 현재 네가 소속된 곳은 어디지?”
“저야 아가씨 소속이지만, 현재 플로렌스 대공가입니다.”
“여길 그만두고 날 따라 다시 공작저에 간다 하더라도 그러기 전까지는 아그니타는 너는 여기 대공가 소속이야. 넌 지금 사용인의 기본적인 걸 어겼어. 배운 걸 잊은 거니? 사용인이 제일 먼저 뭘 배우지?”
아그니타는 그제야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주인님의 사생활이나 소문을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주인님이 알아보고 입을 열라고 하시기 전까지 절대 입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아그니타, 사람이 초심을 잊으면 사람들에게 잊히는 법이야.”
“조심하겠습니다, 아가씨.”
메이아는 아그니타에게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의 언행을 가지고 욕한다는 건 그건 나를 욕하는 거와 같아. 아그니타, 항상 조심해야 해.”
“앞으로 잘할게요. 죄송해요.”
“넌 항상 잘해 왔어. 못 하는 건 없었어. 다만 조심만 하면 돼.”
“네.”
아그니타는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을 글썽이다 뭔가 이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가씨, 수프 식겠어요. 얼른 드셔요.”
메이아는 침대 위에서 가볍게 아침 식사를 한 뒤에 언제나 방문 앞에서 기다리던 테오도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집무실로 들어왔다. 가벼운 서류들을 빠른 속도로 정리한 뒤에 ‘횡령’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어제 쥬안이 보고한 내용이 있어요.”
“어떤 보고입니까?”
“노르딕 부인에 대한 거예요.”
“말씀해 주십시오.”
“딸은 매일 고가의 쇼핑을 즐기고, 아들은 값비싼 호텔에서 지내면서 유학 공부를 하고, 노르딕 자작은 사업에 매년 실패한다고 하는데도 집안이 유지가 된다니. 참 신기하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들으니 기분이 착잡합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노르딕 부인이 안살림을 도맡아 하며 최선을 다해 대공가를 돌보았다는 건 테오도르도 잘 알고 있다. 그만큼 신뢰를 가지고 그녀를 대했지만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이 테오도르에게 큰 실망감을 줬다. 아니, 상처를 줬다.
“테오도르 대공님의 잘못이 아니에요.”
상처받은 그의 검은 눈망울에는 실망감이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
노르딕 부인은 대공가에 있는 감사원인 그레디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내용은 쟈스민 부인이 딸의 출산 때문에 휴가를 냈다는 것과 대공에게 여자 한 명이 붙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여자 마법사인데 타국의 공녀라고 적혀 있었다.
‘대공님에겐 우리 다이애나가 어울리는데!’
전 대공 부부가 죽은 이후 성심을 다해 대공가를 안살림을 돌보았다.
그 덕분에 평생을 죽도록 일해도 만져 볼 수 없는 어마어마한 안살림 비용을 필요에 의하면 매달 얼마든지 쓸 수가 있었다.
그래서 작은 욕심이 일어나긴 충분했다. 이 정도 돈만 쓰면 우리 아들 맛있는 음식을 먹일 수 있는데, 이 돈이면 우리 딸 드레스 새로 맞출 텐데.
그리고 작은 실수가 생겼다. 예산 보고서에 숫자를 잘못 기재한 것이다. 그래서 구매했던 물건들을 조금씩 가격을 올려 봤다. 그게 시작이었다.
다행히 가격을 올린 서류는 들키지 않았다. 자신 앞으로 많은 돈이 모이기 시작했다. 가족들에게 많은 걸 해 줄 수 있어 기뻤다. 이렇게 횡령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린 테오도르가 굳이 안살림까지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안살림에 대한 물품 시세를 모르는 보좌관들 덕분이다.
<노르딕 부인, 혼자서 안살림까지 봐 줘서 고마워.>
오히려 그는 자신에게 고마워했다. 처음에는 안살림 비용을 몰래 횡령한다는 죄책감이 들었지만 1년, 2년 지나다 보니 무덤덤해졌다. 그게 벌써 7년이다. 처음에만 어려웠지 한 번 두 번 하다 보니 익숙해지고 장부를 능숙하게 고쳐 쓰기가 쉬워졌다.
커튼, 의자, 테이블 그리고 식기 등등 커다란 대공가의 안살림을 돌보는 만큼 돈 쓸 곳은 많았고, 그만큼 빈틈은 있었다. 많은 돈이 생기자 아들에게 질 좋은 교육을 할 수 있었고, 딸을 고급스럽게 꾸며 줄 수 있었다.
자신의 남편인 브랜이 사업만 계속 말아 먹지 않았다면 더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사업에 실패하더라도 계속 돈이 생기기 때문에 뒷바라지쯤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무엇보다 브랜은 대공가 감사원들과 사이가 돈독해 쓸모가 있는 남편이다. 덕분에 그들과 함께 효율적으로 횡령할 수 있었다. 뭐, 회계사들이 멍청한 것도 한몫했다.
얼마 전부터 안살림을 도와주기로 하고 온 쟈스민 부인이 온 뒤부터는 횡령이 조금 힘들었던 건 사실이다.
<안살림 혼자 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조금씩 쉬엄쉬엄 일하세요, 노르딕 부인.>
상냥하게 말하는 테오도르가 쟈스민 부인을 추천하자 거부할 수 없었다.
<쟈스민 부인이 옆에서 많이 도와줄 겁니다.>
<알겠습니다.>
얼마 전, 테오도르가 자리를 비웠을 때 쟈스민 부인이 자신에게 말했었다.
<의자와 테이블을 자주 바꾸시는 것 같습니다.>
<바꿀 만해서 바꿨답니다. 감사원들도 허락한 일이고요, 호호호.>
위기를 느낀 나머지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저택으로 무작정 돌아왔다.
걸릴까 봐 두려워서였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말이 없어 횡령한 일이 걸리지는 않은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감사원인 그레디가 말했다.
<노르딕 부인의 따님이신 다이애나 영애를 대공비로 올리는 건 어떻습니까?>
그 말에 욕심이 생겨났다. 가신 가문이라 해서 무조건 대공비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자신의 딸은 아름다웠고, 똑똑하다. 충분히 딸 다이애나는 대공비가 될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