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테오도르가 열두 살 때 전 대공 부부는 죽었다. 혼자 남은 어린 테오도르 대신 분명 가신들이 돌아가며 안살림을 살폈다 한다. 보좌관이라 하더라도 안주인들이 알 법한 사교계 물품들의 정확한 시세를 알지 못하니 예산 보고서 내용이 맞겠거니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플로렌스 대공가의 돈을 계속 야금야금 사용했어도 지금까지 걸리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안주인이 없었던 이유일 것이다. 알더라도 눈을 감아 주는 사람이 있었을 거다.
만에 하나 테오도르가 셈에 밝지 못한 여자와 결혼한다면 눈 뜨고 계속 코를 베일 것이다.
어쩌면 ‘쥐’들이 자신들과 한패인 여자를 대공비로 올리려 들지도 모르는 일이다.
갑자기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테오도르를 생각하니 메이아는 답답함을 느끼며 한숨을 쉬었다.
풀리지 않는 문제를 드디어 풀었고 이제 그걸 답안지에 쓰기만 하면 끝나지만, 답을 쓸 깃펜이 보이지 않아 문제지만 쳐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메이아 공녀님.”
“테오도르 대공님이 죄송해할 일은 아니에요. 손해를 입었으니 범인을 찾아 단단히 책임을 물면 될 일이에요.”
“하지만.”
“하지만이 아니에요. 대공님 잘못이 아니에요.”
“제가 제대로 관리만 했더라면.”
“하수구에 사는 쥐들이 관리한다고 없어지나요?”
“없어지지 않죠.”
테오도르의 대답에 메이아는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쥐들은 관리하는 게 아니라 죽이는 거랍니다, 대공님.”
똑똑.
“들어와.”
집무실 문을 열고 헤만이 들어왔다.
헤만은 메이아에게 플로렌스가에서 사용하는 재작년과 작년의 예산 목록 서류와 알아봐 달라는 물품의 시세들까지 정확히 적힌 서류들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사실 이렇게까지 물품 시세를 알아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생각보다 예산 목록에 적힌 물품 비용들이 시중보다 비싸게 올라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살펴봐 주는 메이아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여기 말씀하신 서류들입니다, 메이아 공녀님.”
많은 서류가 책상 위에 쌓였음에도 불구하고 메이아는 절대 흔들리지 않은 손놀림으로 그 많은 서류를 과감하게 훑어보며 V자로 표시하고 테오도르에게 넘겨주었다.
“테오도르 대공님, 도장을 찍으실 때 이상한 거 못 느끼셨나요?”
“결재해서 올리기 때문에 딱히 걱정하지도, 의심하지도 않았던 부분입니다.”
“현재 대공가에 있는 가구들도 정말 명품인지도 알아봐야 하겠군요.”
“예.”
메이아는 가구까지 옷감처럼 구분할 줄은 모른다. 애초에 취미가 가구 모으기였다면 반은 전문가였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정말 명품 가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물론 구매한 곳에다 물어보는 건 말이 안 된다. 가짜라면 어떻게서든 진짜로 믿을 수 있도록 온갖 거짓말을 해 댈 게 분명하니 믿을 수 있는 가구 장인에게 구분해 달라는 의뢰를 넣어야 한다.
“가구를 판별해 줄 장인을 혹시 알고 계십니까?”
가구 전문가는 가구를 만들 때 사용된 나무 원목의 본질을 한눈에 파악할 줄 알면서 확실하게 명품인지 볼 수 있어야 한다.
“친한 드워프 가구 장인이 있습니다. 그에게 편지를 보낼게요.”
드워프는 인간을 싫어하는 종족이기 때문에 메이아의 ‘친하다’라는 말에 헤만은 놀라며 되물었다.
“드워프라고 했습니까?!”
“예, 하츠벨루아 공작저 가문의 가구들은 모두 그 드워프의 작품입니다.”
그는 드워프답지 않게 보석보다는 원목에 큰 관심을 두고 있다. 그걸 보석 이상으로 만드는 것이 그의 특기이기도 하다. 그의 손을 거쳐 간 원목들은 보석보다 더 빛나는 가구가 된다.
“드워프는 뭔가 몰두할 때에는 초대도 거절하는 편이지만…… 그가 원하는 원목을 준비하면 열 일 제쳐 두고 올 거예요.”
드워프 종족은 돈으로 움직이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엄청난 가치의 보석이나 그게 아니라면 ‘의리’라는 감정이 있어야 한다.
“도와달라는 편지를 먼저 보내 볼게요. 만에 하나 바쁘다고 하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죠.”
“알겠습니다, 공녀님.”
메이아는 다시 서류를 살펴보며 말했다.
“작년에 대공가 전체 가구들을 여덟 번이나 바꿨네요. 사계절에 맞춰 네 번 바꿨다고 하면 차라리 믿기라도 하겠어요.”
확실히 자주 바꾸는 물건들을 평균 1년 만에 바꾼다는 가정하에 계산하더라도 정말 어마어마한 착복의 흔적이 보인다.
“그동안 바뀐 의자와 테이블들은 모두 창고에 있으려나.”
모두 창고에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구매한 금액에 맞는 명품 가구여야만 한다.
“자세한 건 노르딕 부인이 알고 계실 겁니다.”
메이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헤만에게 말했다.
“7년 전 포함 매년 예산 목록 서류들을 모두 가져와 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양이 많은 편이니 기다려 주십시오.”
헤만이 집무실 밖을 나가고, 테오도르와 메이아만 덩그러니 남았다.
테오도르는 고개를 숙이며 침울하게 말했다.
“메이아 공녀님께서 안살림을 봐 주지 않으셨더라면 아마 평생 몰랐을 겁니다.”
“대공님, 이런 걸 감사하는 부서가 따로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있습니다.”
감사를 맡은 부서 그리고 안살림을 맡고 있었던 노르딕 부인과 쟈스민 부인 그리고 의자와 테이블 커튼 등등의 물품들을 판매하는 가게들 어쩌면 모두 한통속일지도 모른다.
“테오도르 대공님, 플로렌스 가문에는 전담 감사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생긴 건 절대 실수로 생긴 일이 아니에요.”
메이아는 의자에서 일어나 테오도르에게 다가가 두 손을 들어 그대로 그의 뺨을 감쌌다.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테오도르는 살짝 붉어진 눈가를 보이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도와줄게요, 테오도르 대공님.”
메이아의 말에 테오도르의 표정은 조금이나마 풀렸다. 그리고 메이아에게 미소를 지었다.
“역시 테오도르 대공님은 웃을 때가 제일 좋네요.”
아마도 그는 불안할 것이다. 전 대공 부부가 세상을 떠나고 안살림을 맡기자마자 이런 사건이 터지도록 놔둔 것에 대한 자괴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테오도르의 잘못이 절대 아니다. 그를 속이고 있었던 범인들의 잘못이다.
“메이아 공녀님…….”
테오도르는 살짝 고개를 틀어 자신의 뺨을 만지고 있었던 메이아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갑작스러운 손바닥 입맞춤에 메이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식간에 느껴진 뜨거운 열이 손바닥을 통해 얼굴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쥐덫을 어떻게 준비하면 좋을까요?”
도발적인 눈빛과 미소를 짓는 테오도르를 보며 메이아의 가슴 속으로 순간 긴장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당신이 시키는 대로 뭐든지 하겠습니다.”
*
메이아는 그날 밤 꿈을 꿨다.
아름다운 꽃밭에서 바람에 날아가는 꽃잎 한 장을 잡아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어느새 다가온 테오도르가 자신의 뺨을 만지며 살짝 뽀뽀하더니 요망한 몸짓으로 자신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테오도르 대공님.>
<메이.>
그가 자신의 애칭을 부르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메이를 이 이상 좋아하게 되면 어떡하죠?>
테오도르의 야릇한 손짓에 절로 몸이 움찔거렸다.
<메이를 너무 가지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다정한 목소리로 고백하는 테오도르가 자신의 입술을 핥으며 서서히 다가와 입맞춤을 하기 직전,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메이아는 눈을 떴다.
“아가씨, 일어나세요. 아침이에요.”
눈을 끔뻑이며 침대 위라는 걸 알아챘다.
“꿈인가?”
“헤헤, 아가씨 무슨 좋은 꿈 꾸셨어요?”
“아니야.”
몽롱한 잠기운에도 생각나는 건 테오도르였다.
‘대체 나는 왜 그런 꿈을 꾼 걸까?’
아그니타가 깨우지 않았으면 그와 입을 맞췄을까?
“아그니타, 지금 이게 현실이겠지?”
“아가씨, 아직 잠이 덜 깨셨나요?”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강렬한 꿈을 꾸어서 그런지 현실이 부정되었다.
“아가씨, 세숫물을 준비해 왔습니다.”
“응.”
어제 자신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며 미소 짓던 테오도르가 떠올랐다.
심지어 꿈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테오도르를 거절하지도 않았다. 자꾸 그의 입술이 생각이 났다.
<고개를 돌리다 입술이 닿았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날 행동은 분명 고의적인 느낌은 들었으나 사과를 하는 그에게 ‘손바닥에 왜 뽀뽀했어요!’라고 물어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충동적으로 아무 말이나 저질러 버렸다.
<대공님, 고개를 돌리다 입술이 닿으신 거군요.>
메이아는 테오도르가 입 맞추었던 자신의 손바닥에 입술에 가져다 대며 쪽 소리가 나게 입맞춤하며 말했다.
<저는 하품이 나올 것 같아 입을 가렸을 뿐이에요.>
자신답지 않은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메이아의 손바닥에 입을 맞춘 것은 ‘충동’이다.
자꾸만 자신의 뺨을 서슴없이 만지는 메이아의 손바닥에 입이라도 맞추지 않았더라면 스스로가 자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인내력이 좋지 않았다면 그녀의 손바닥과 손가락을 깨물며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녀가 엄청나게 예쁜 얼굴로 위로의 말을 하다니 생각만 하더라도 기분이 매우 좋아진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바닥 감촉이 입술에서 떠나지 않고 되새김질 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입 맞춘 손바닥을 오물거리는 입술에 가져다 대며 뽀뽀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첫 키스였다. 비록 간접이지만…….
무거웠던 마음이 꽃가루처럼 흩어져 하늘 멀리 날아가 행방불명 될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테오도르는 계속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꼬리를 꾹 내리려고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결국, 큰 소리를 내 웃어 버렸다.
“주인님, 아주 즐거워 보이십니다.”
“마음이 너무 들떠 올라서 무서울 정도야, 베나블.”
베나블은 테오도르의 말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공녀님께서는 예비 대공비로서 흠이 없으시고, 완벽하십니다.”
베나블의 예비 대공비 발언은 그의 눈가를 더욱 곱게 휘게 만들었다.
“예비 대공비란 말이 참 잘 어울려.”
“한 가문의 가주이시니 이제 결혼식을 올리셔도 됩니다.”
“아직 약혼이나 고백에 대한 답변도 못 받았어, 베나블.”
“단단해 보이시는 분일수록 틈이 있으실 겁니다. 한 번 틈을 보이면 나머지는 허물어지기 마련이죠.”
어제 허물어진 걸 본 기분이지만 아직 앞서 나가면 안 된다.
“언제 허물어질까?”
“분명한 건 싫으셨다면 대공가를 떠나셨을 테지만 안 떠나고 일까지 도와주신다는 건 주인님을 좋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끈기 있게 다가가셔야 합니다.”
“역시 베나블이야.”
“그리고 시리우스 3세 폐하께서 또 그 편지를 보내서 거절 답장 보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