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테오도르는 창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높은 하늘 위 밝은 달빛이 환하게 빛났다.
플로렌스령이 아무리 더운 곳이지만 바다가 가까이 있기에 밤에는 쌀쌀하다.
“주인님, 찬 기운 때문에 감기 걸리십니다.”
“괜찮아, 오늘은 정말 달이 보고 싶어서 그래.”
“그렇다면 따뜻한 딸기 차를 내오겠습니다.”
테오도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딸기 차를 내온다는 베나블의 말에 저절로 메이아를 떠올렸다.
그녀에게서는 항상 좋은 향기가 난다. 웃어 주면 그 미소에 숨이 막혀 버리고, 바라만 보는 것만으로도 온통 신경을 다 뺏겨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서재에 단둘이 있을 때 고백한 일은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더 말하고 싶었다.
베나블은 창가에 앉아 달빛을 보는 테오도르가 편하게 하늘을 볼 수 있도록 의자와 담요를 가져다주며 딸기 차와 약간의 다과가 담긴 트롤리를 내오며 그를 꼼꼼히 살폈다.
“주인님, 여기 따뜻한 딸기 차입니다.”
“응.”
우연한 만남 그리고 주고받았던 시선. 첫사랑, 순수함, 솔직함, 설렘, 두근거림 등 이런 단어들로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건 어렵다.
굳이 적절한 표현을 고른다면 ‘기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테오도르는 창문 밖 달빛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메이아 공녀님은 뭘 하고 계실까?”
부끄럽고 설레는 마음을 보여 주며 기다리겠다, 매일 고백하겠다 말하며 속으로 다짐했다.
뺨을 만지는 부드럽고 고운 손바닥의 온기처럼 그녀의 답변을 자꾸 기대하게 된다.
기다린다고 다짐해 놓고서 반대로 애타는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질 않는다.
코앞에 매달린 당근만 보고 내달리는 당나귀가 된 기분이다. 인내심을 끝까지 시험받는 기분이지만 그래도 좋다.
“딸기 차의 향이 오늘따라 좋네.”
그 아름다운 얼굴과 눈이 오로지 자신만 바라봐 준다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설령 자신을 거절하더라도 그녀를 포기할 수가 없다. 아니, 포기하기 싫다.
“베나블, 내일 메이아 공녀님에게 어울리는 예쁜 꽃다발을 준비해 줘.”
“알겠습니다.”
테오도르는 하늘 위를 계속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심지어 꿈에서조차 그녀를 찾게 될 것이다.
*
메이아는 집무실로 향했다. 현재 메이아는 플로렌스가의 안살림을 살피고 있다.
일하던 사람들의 갑작스러운 부재는 메이아에게 더욱 바쁘게 하루 일과를 시작하게 만들었다.
이곳 회계 직원들을 일하지 못하게 해, 하는 일이 늘어났지만 괜찮다. 일하는 건 언제나 즐겁고, 계산으로 정답을 찾는 작업에 성취감을 느낀다.
<노르딕 부인은 몸이 불편해서 병가를 내셨습니다.>
<그러면 전 쟈스민 부인과 함께 일하겠군요.>
<죄송합니다, 공녀님. 제 딸아이가 곧 출산일이라서 저도 꼭 휴가를 써야 합니다.>
<축하합니다, 쟈스민 부인.>
또한 의원의 말에 따르면 애튼은 이제 상처는 다 아물었지만 외상 후 스트레스로 꼭 요양이 필요하다고 했다.
거기다 테오도로는 메이아에게 돈을 마음껏 쓰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저희 대공가 안살림을 맡으시면 하루 1만 골드에서 10만 골드까지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메이아는 자신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는 테오도르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어보았다.
<제가 사치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전 돈을 매우 잘 씁니다, 테오도르 대공님.>
테오도르는 ‘사치하겠다’라는 말을 오히려 더 기쁘게 받아들이며 대답했다.
<10만 골드 이상 쓰실 때는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10만 골드 이상은 인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곤 그의 얼굴과 귓바퀴까지 새빨개졌다.
<왜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세요?>
<안살림을 맡아 주시게 되면 저와 동등한 권한을 가지게 되십니다.>
정말 무른 남자다. 동등한 위치가 되었다며 좋아하는 모습이라니…….
메이아는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 어제와 별반 다름없이 쌓여 있는 서류를 살펴보았다.
오늘 메이아가 해야 할 일은 그동안 사용인들이 받았던 월급과 수당 그리고 저택을 어떻게 관리하고,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원래는 인수인계를 받아야 하지만 인수인계를 해 줄 노르딕 부인이 없었다.
쟈스민 부인이 급하게 딸에게 떠나며 두고 간 매뉴얼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메이아는 매뉴얼을 그냥 한 번 읽어 보고 서랍 속에 넣어 놨다.
메이아에게 있어 안살림과 관련한 서류를 보는 것은 숨 쉬는 것만큼 쉬운 일이라 이런 매뉴얼이 없어도 일하는 데 문제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 번은 읽어 보았지만 역시나 다 아는 내용이다.
“테오도르 대공님,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은 테오도르가 자신을 에스코트하러 오지 않았다. 창피해서 피하는 건가? 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일찍 와서 그가 일하는 모습을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어서 오십시오, 메이아 공녀님.”
테오도르가 수줍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메이아가 있는 문 앞까지 튀어 나가 그녀가 일하는 데 쓰는 책상과 의자가 있는 곳까지 에스코트했다.
“아직 헤만은 안 나온 건가요?”
“나왔다가 할 일이 있어 잠시 나갔습니다.”
쭈뼛거리던 테오도르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큰 꽃다발 하나를 꺼내 메이아에게 다시 다가갔다.
주섬주섬 꽃다발을 들고 오는 테오도르가 몹시 귀여워 메이아의 입꼬리가 확 올라갔다.
“웬 꽃다발이에요?”
테오도르는 메이아에게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좋아합니다.”
메이아는 꽃다발을 건네받으며 고백하는 테오도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이 남자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일은 축복이라 했습니다. 저는 매일 메이아 공녀님 덕분에 축복받고 있습니다.”
“축복받는 게 아니고 그 축복을 제가 다 뺏어 가면 어쩌시려고요.”
메이아의 질문에 테오도르는 즉답했다.
“더는 뺏길 게 없다면 슬플 것 같습니다. 만약에 남아 있는 축복이 있다면 다 빼서 드릴 겁니다. 저보다 메이아 공녀님이 축복받는다고 생각하니 아주 행복해집니다.”
이렇게 맹목적인 마음을 받아 본 건 부모님 이외에는 처음이지만 기분 나쁘지 않았다.
처음 플라이 마법을 시전해서 하늘 위를 날아 무지개를 보았을 때보다 더 큰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자리에 앉은 메이아는 서류를 한 장 한 장 살펴보았다. 플로렌스 대공가가 한 해에 쓰는 예산은 어마어마하다 할 수 있다. 누군가는 평생을 일해도 절대 만져 볼 수 없는 큰돈이다.
하지만 메이아에게 있어 1천만 골드는 얼마든지 만져 본 돈이다.
서류를 훑어보는 메이아는 깃펜을 들고 ‘V’ 표시를 하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회계 직원들은 곧 해고 동의서에 사인을 하고 대공가에서 나가게 된다. 그러나 아직 해소하지 못한 문제들이 있기 때문에 테오도르에게 바로 해고하지 말라 부탁했다.
“정말 어디를 가도 쥐는 있구나.”
메이아의 중얼거림에 테오도르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집무실에 쥐가 있습니까?”
메이아 입에서 ‘쥐’라는 말이 나오자 깜짝 놀란 테오도르는 눈을 동그랗게 크게 뜨고 쥐를 찾기 시작했다.
“그 ‘쥐’ 말고요. 대공님, 이걸 보시겠어요?”
메이아는 한 움큼 서류를 들고 테오도르에게 다가가 자신이 V자로 표시해 놓은 부분들을 그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문제라는 건 말이죠, 문제란 걸 인식하는 순간 문제가 된다고 생각해요.”
차라리 문제라는 걸 몰랐다면 드러나지 않으니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렇지만 발견된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그것이 문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문제가 발견되었다는 건 문제가 생기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죠.”
테오도르는 유심히 서류를 보았다.
“저는 솔직히 테이블이나 소파를 원래 자주 바꾸는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네, 물론 바꿀 수 있지만 소파와 테이블이 모두 명품이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제가 볼 때 명품이란 생각이 들지 않아서요.”
그녀의 말에 테오도르는 뭐가 문제인지 바로 파악했다.
“누가 횡령을 했군요.”
“제 말을 믿어 주시나요?”
“당연합니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의 진짜 속에는 이득을 볼 욕심이 드러나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공녀님은 누군가의 횡령을 저에게 말한다고 절대 이득이 되지 않으시죠. 그리고…….”
“그리고?”
테오도르는 슬며시 다가와 몸을 숙여 서류를 들여다봤다. 그의 팔이 그녀의 어깨에 닿았다.
그의 나직한 숨소리가 귓가에 닿을 때마다 메이아의 심장이 계속 쿵쿵거렸다.
“제가 좋아하는 여자의 말은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메이아의 뺨에 순식간에 열이 몰렸다.
“알았어요.”
그녀의 빨개진 귓가를 보던 테오도르는 부드러운 그 뺨에 입을 꾹 맞추고 싶은 욕망을 꾹 눌렀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비스듬히 돌리며 그녀의 속눈썹을 쳐다봤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알아보고 싶으십니까?”
메이아는 즐거운 장난감을 발견한 듯한 어린아이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메이아는 활짝 웃으며 체크한 서류 부분을 테오도르에게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1년 사계절인 부유한 제국의 황후 마마도 이렇게까지 가구들을 수시로 바꾸지 않아요. 물론 취미로 가구를 모으시는 분들은 있긴 하지만 플로렌스 대공가는 안주인이 없는데도 이렇게나 자주 바뀌는 건 말이 안 되죠.”
메이아가 하츠벨루아 공작저에 있을 때도 테이블이나 의자를 이렇게까지 수시로 바꾸지 않았다.
애초에 이름 있는 장인에게서 받아온 명품 가구들이기에 바꿔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굳이 바꿔야 하는 가구들은 자선 경매를 통해 불우한 이웃들을 돕는 데 쓰곤 했다.
그리고 티 파티의 경우 만에 하나, 화원에서 열린다면 콘셉트에 맞춘 테이블과 의자를 오는 분들의 인원수대로 새로 구매한다.
플로렌스 대공가는 티 파티를 여는 안주인도 없다. 그런데도 전체적으로 의자와 테이블이 자주 바뀌고 있다.
바뀔 때마다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어간다. 그뿐만 아니라 천과 수건, 식비 그 외 예산도 들쑥날쑥했다.
“제가 체크한 물품들의 정확한 비용들을 알고 싶어요. 카르펜 제국과 물품 시세가 다를 수도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헤만에게 알아보고 보고서를 올리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