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57화 (57/163)
  • 57화

    특히 파츠래리 황태자가 이야기했던 걸 들려주자 퀴니의 얼굴은 험상궂게 굳어 버렸다.

    “뭐라고? 황태자 놈이 드디어 미쳤구나! 미쳤어! 버릴 땐 언제고 인제 와서?”

    “말도 말아요. 순간 데미안 황자를 보는 줄 알았어요. 형제라 그런가? 집착하고 멋대로 생각하는 게 아주 똑같았어요. 우리 아가씨를 후궁으로 들이고 싶다면서 한 가문에 후궁과 황후를 배출하는 건 흔한 일이라고 말하는데 유디 님 없었으면 때렸을 거예요.”

    전 공작 부부가 세상을 떠난 이후, 황태자는 바로 메이아를 버렸다. 그리고 메릴을 약혼녀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한다는 소리가 후궁으로 들이겠다니!

    퀴니는 저절로 으득으득 이를 갈며 얼마나 분노했는지 보여 주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 안 될 일이지! 가뜩이나 데미안 황자님도 우리 공녀님을 황자비로 맞이하겠다고 떠들고 다녀서 그것도 마음에 들지도 않은데!”

    아그니타는 퀴니의 말에 적극적으로 공감했다.

    “당연하죠! 절대 안 됩니다! 황후 자리도 탐탁지 않은데! 후궁이라니!”

    쥬안 또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습을 본 베나블은 눈을 가늘게 뜨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가 바로 내리며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꺼냈다.

    “한 번 일방적으로 파혼을 당했는데 두 번을 또 일방적으로 파혼당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죠. 절대 다시 받아 주시면 안 됩니다. 거기다 데미안 황자란 분도 메이아 님에게 질척거리니 카르펜 제국의 미래가 어둡습니다. 전 메이아 공녀님을 모신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정말 어질고 착하신 분이라고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공녀님께서는 좀 더 좋은 분을 만나 이어지셔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에 아그니타를 포함하여 모두 격하게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베나블은 가늘게 뜨고 있었던 눈을 크게 번뜩이며 아그니타와 쥬안 그리고 퀴니를 향해 열과 성을 다해 열변을 토했다.

    “만에 하나 약혼을 하거나 결혼을 하신다면 메이아 공녀님께서 원하시는 분이랑 잘되면 좋겠습니다. 물론 메이아 공녀님께서 원하시는 분이 돈도 많고, 잘생기고, 공녀님을 자기 목숨보다 더 아끼시고 사랑하고, 이왕이면 연하이면 더 좋을 것이고, 무엇보다 카르펜 제국 황제에게 압박할 수 있는 강한 제국의 강한 권력을 지닌 분이라면 아주 좋겠죠.”

    옆에 있던 한나 또한 베나블 말에 이어서 열변을 토해 냈다.

    “카르펜 제국 귀족들은 첩들이 그리 많다면서요? 카르펜 황제 폐하 또한 후궁들을 두고 계시고요. 저희 시리우스 제국은 황제 폐하부터 후궁을 두지 않아서 그런지 다들 첩을 두거나 그러지 않는답니다. 무조건 아내만을 위해서 사는 로맨티시스트들만 있는 곳이 여기 시리우스 제국이랍니다, 호호.”

    한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옆에 가만히 있던 헤만이 이어 말했다.

    “카르펜 황태자 전하는 그렇다 치더라도 데미안 황자라는 분이 하츠벨루아 가문에 청혼서를 들이밀고 버티면 공녀님은 억지로 약혼이나 결혼을 하게 되시는 거겠죠?”

    퀴니는 헤만의 말에 바퀴벌레라도 밟은 듯한 얼굴로 말했다.

    “저희 아가씨는 절대 황자비가 되지 않으실 겁니다.”

    “그렇지만 공녀님께서 저희 대공가에 오신 이유가 데미안 황자 만나기 싫어 오신 겁니다. 제 말이 맞죠? 푸링 님?”

    헤만이 푸링을 지목하며 물어보는 말 때문에 응접실에 있는 사람들은 순식간에 푸링을 쳐다보았다.

    푸링은 헤만의 질문에 ‘맞다’라고 답했다. 그 뒤에도 플로렌스 대공가의 사용인들은 열변을 멈추지 않았다.

    *

    플로렌스 대공가 사용인들이 열변을 토하던 그 시각.

    메이아의 머릿속은 온통 ‘이럴 수가’라는 단어에 사로잡혔다.

    아까의 오묘한 분위기 때문에 서재에서 나가려고 했지만 손잡이 없는 문이 고장이라니.

    테오도르도 현재 서재 문이 열리지 않아 굉장히 당황스러워 보였다.

    “죄송합니다.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괜찮아요, 대공님.”

    드래곤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죄송합니다.”

    메이아 뒤에서 테오도르는 침울한 얼굴로 연신 사과했다.

    “문을 일부러 고장 내신 것도 아닌데 뭘 그리 사과를 하세요. 괜찮아요.”

    “예.”

    “서재 간 걸 아니까 누구든 와서 문을 열어 주겠죠.”

    소파에 다시 앉은 메이아는 책을 보기 시작했다. 테오도르 또한 그녀 옆에 앉아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시간은 조용히 흘러갔다.

    그리고 곧 메이아는 생애 처음 부끄러움과 수치가 무엇인지 몸소 겪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베나블이 말한 뜻이 이거였구나…….’

    오전에 자신의 단장을 도와주던 베나블은 쟈스민 부인의 말에 꼭 맞장구쳐 달라 했다.

    <대공 각하께서는 공녀님한테 서재를 한 번도 안 보여 주셨던 거예요?>

    쟈스민 부인의 물음 속 ‘서재’라는 단어를 듣고 곧바로 그곳이야말로 메이아와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는 걸 깨달았다.

    거절할 줄 알았던 메이아는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현재. 그녀와 단둘이 서재에 갇히게 되었다. 남들은 갇힌 상황이 뭐가 좋냐고 하겠지만 테오도르는 이 상황을 몹시 기쁘게 생각했다.

    서재에 들어간 자신들을 보고 베나블이 시동어를 바꾼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시동어가 통하지 않아 열리지 않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시동어가 먹히지 않아 당황스러웠던 건 사실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녀와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이 순간이 무척 만족스러웠다. 아무래도 집사에게 보너스라도 내려 줘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이아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 곳곳을 돌아다녔다. 물론 그 뒤를 테오도르가 따라다녔다. 혹여 그녀가 무거운 책을 들까 봐 걱정돼서였다.

    한참을 책장 사이로 돌아다녔던 메이아는 한 책장 앞에서 멈췄다. 책장에는 어릴 때 부모님이 자주 읽어 주시던 동화책이 꽂혀 있었다. 그리운 마음이 들어 책을 꺼내기 위해 까치발을 들어 손을 뻗어 보았지만, 손이 닿지 않았다.

    “제가 빼 드리겠습니다.”

    어느새 메이아 등 뒤로 온 테오도르는 왼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책장 위로 손을 뻗었다. 메이아는 등 뒤에 그의 체온이 느껴지자 갑작스럽게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왜 대공님과 있을 때 부정맥이 심해지는 걸까? 이거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은데.’

    그녀의 키가 닿지 않아 빼지 못한 책을 대신 꺼내 들은 테오도르는 메이아를 도울 수 있었다는 것에 스스로 뿌듯해하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여깄습니다.”

    동화책을 건네받은 메이아는 고마워했다.

    “고맙습니다, 대공님.”

    “그 동화책은…….”

    “대공님도 이 책 읽어 보셨나요?”

    “물론입니다. 어릴 때 부모님이 자주 읽어 주시던 동화책입니다.”

    부모님이라는 단어에 테오도르의 눈가가 살짝 붉어졌다.

    그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메이아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면 우리 책 같이 읽을까요?”

    동그랗게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모습은 커다란 강아지 같아 보였다.

    “제 옆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세요.”

    동화책을 들고 다시 소파에 가 앉은 메이아 옆에 자리를 잡은 테오도르는 메이아의 눈길을 끈 책을 또 질투하며, 힐끔힐끔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잔뜩 집중하여 푸른 눈동자로 글귀를 읽었다. 그러나 자신은 책의 글들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은데…… 이렇게 심장이 떨리는데…….

    한편 테오도르는 아무렇지 않게 책을 바라보며 읽어 주는 메이아에게 애가 탔다. 그리고 그런 메이아의 시선을 잡은 책도 원망스러웠다. 책이란 책은 다 태워 버리고만 싶었다.

    ‘그렇지만…… 책을 없애 버리면…… 그녀가 싫어하겠지?’

    그녀는 책을 좋아하니까…….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하다 테오도르는 자신의 오른쪽 팔이 무거워진 걸 느꼈다.

    살짝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어깨와 팔이 무거워진 이유를 살피자마자 테오도르는 숨을 멈춰 버렸다.

    ‘으아아아…….’

    메이아가 자신의 어깨와 팔에 기대어 잠이 든 것이다. 새근새근 소리를 내며 잠든 그녀의 모습에 테오도르는 죽을 만큼 행복하고 죽을 만큼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새근새근.

    ‘아아…….’

    테오도르는 왼손을 들어 메이아의 머리칼을 만졌다. 부드러운 감촉과 자신을 사로잡는 향기에 정신이 멍해졌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보였다.

    저 눈꺼풀이 올라가면…….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푸른 눈동자를 볼 수 있다. 지금도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고 싶지만 눈을 감고 자는 얼굴도 예쁘다 생각했다.

    잠결에 오물오물하는 도톰한 입술……. 서재 조명에 비치는 달빛 같은 피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매우 좋아서…….

    내가 누구이며, 그녀가 누구인지, 현재 여기가 어디인지 잊을 정도로 그녀를 보고만 있어도 사무치게 깊어지는 행복을 느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이 쿵쿵거렸다. 테오도르는 침착하게 심호흡을 했다.

    자신의 심장 소리 때문에 메이아가 깰까 봐 조마조마해졌다.

    지금 이 순간을 심장 소리 때문에 망칠 순 없었다. 최대한 힘을 빼고 아무렇지 않은 척 있으려고 했지만 심장은 제멋대로 나댈 뿐이었다. 말을 듣지 않은 심장을 뭐라 탓할 수도 없었다.

    상사병에 걸린 심장은 어떠한 것도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테오도르는 간절히 신을 찾으며 기도했다.

    제발 그녀가 자신의 심장 소리에 깨지 않게 해 달라고, 이 시간을 멈추게 해 달라고 신을 찾아 간절히 기도했다. 눈을 감고 자신의 팔에 기대 잠든 메이아의 얼굴을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계속 바라보았다.

    메이아는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을 뿐이다. 그리고 정확하게 자신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파악이 되었다. 머리 방향과 몸 전체가 완전히 왼쪽으로 쏠려 있었다.

    대체 자신이 눈을 잠깐 감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파악하기 위해 눈을 계속 깜박였다.

    분명한 것은 자신은 눈을 잠깐 감았다 뜬 게 아니라 잠시 잠들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왼쪽으로 쏠린 자신의 머리는 테오도르 팔과 어깨에 기대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거지? 시간이 대체 얼마나 흐른 거지?

    나 설마 코라도 곤 건 아니겠지? 설마 테오도르 대공님도 나처럼 자고 있는 건가?

    설마 나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

    ‘자연스럽게 일어나야 하는데, 어쩌지?’

    메이아는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창피했다. 귀족 영애가 무방비하게 잠든 얼굴을 미혼의 남성에게 보이다니…….

    전 약혼자인 파츠래리와 단둘이 한 공간에 있었을 때도 저지르지 않았던 치명적인 결례를 테오도르에게 저지른 것이다. 쥐구멍이 있다면 쥐가 되어 숨고 싶다.

    아니다. 바퀴벌레가 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어떠한 좁은 틈이라도 숨어들 수 있으니까.

    그것도 아주 재빠르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