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할아버지! 언제 아가씨한테 가요? 요즘 쥬안 오빠가 체력이 달리나 봐요. 날파리 한 마리도 못 쫓아내는 거 보니…….”
“날파리?”
“아가씨를 쫓아다니는 대왕 날파리가 있다고 해서 너무 걱정돼요.”
푸링은 쥬안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은 쥬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날파리 맞죠.”
“쥬안, 네 눈에는 날파리였던 모양이구나.”
“그렇습니다.”
푸링은 쥬안의 대답에 코웃음을 쳤다.
“날파리인지 아닌지 잘 관찰해 보거라. 자칫 날파리라 생각했다가 쏘이기도 하니.”
푸링은 쥬안이 테오도르를 보며 “날파리 같은 게 감히 아가씨한테 찝쩍거리다니…….”라면서 부들부들 떠는 걸 몇 번이나 보았다. 그런데 쥬안도 모르는 것이 있다.
메이아도 테오도르에게 호감이 있다는 걸 말이다.
“아가씨 곁에 붙은 날파리를 쫓아낼 수만 있다면 몇 번이라도 쏘여도 괜찮습니다.”
“크크, 그렇게 말해야 쥬안이지.”
“할아버지! 빨리 아가씨 곁에 가고 싶어요.”
푸링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이 할아비를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그냥 간다는 거냐? 하루만 쉬었다 가지……. 섭섭하구나.”
“아가씨가 걱정돼서 그래요. 너무 섭섭해하지 마세요!”
푸링은 아그니타와 쥬안에게 좀 씻고 하루만 쉬었다 가라 말했다. 그의 설득에 남매는 알았다며 마탑에서 하룻밤 묵기로 결정했다.
“할아버지, 그런데 아가씨가 계신 곳이 어디예요?”
“시리우스 제국이란다.”
“멀리도 가셨네요.”
“흥! 데미안 황자님이 마탑에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마탑에 계셨을 게다.”
아그니타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도 쥬안 오빠한테 이야기 들었어요.”
“말도 마라. 마탑에 와서 공녀님을 얼마나 찾았는지 모른다.”
다음 날 아침, 푸링은 데미안이 마탑에 보낸 의뢰서를 품에 챙겼다. 의지를 가진 마탑에서 왜 메이아의 위치를 알려 줄 수 있는 의뢰를 허락했는지 이유는 모르겠으나 의뢰서를 보니 생각나는 건 하나뿐이었다. 메이아에게 제일 먼저 의뢰서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의 의뢰는 메이아 하츠벨루아 공녀를 찾는 것, 내지는 만나는 것이다.
마탑의 마법사의 위치는 절대적으로 발설하면 안 된다. 마법사는 귀한 인재며 그들을 욕심내는 별종의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의 의뢰는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의지를 가진 마탑은 데미안의 의뢰를 수락했다.
<푸링 대마법사님은 내 황자비가 어디에 있는지 아시죠?>
<메이아 공녀님은 황자비가 아니십니다.>
<내 황자비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보세요. 파혼당한 거.>
푸링은 뜨거운 늪 같은 질척이는 눈빛으로 메이아를 욕심내는 데미안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애튼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메이아는 테오도르와 함께 그가 누워 있는 방을 찾아갔다.
의원 워스트는 출혈이 심할 때 성수로 지혈한 덕분에 목숨은 구했다 말했다.
애튼은 메이아에게 감사하다며 연신 울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애튼은 자신을 모시는 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몸을 날려 대신 칼을 맞았다. 구구절절한 유언까지 남기면서…….
테오도르가 워스트에게 물었다.
“애튼은 괜찮은 건가?”
워스트는 대야에 손을 씻고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말했다.
“외상은 괜찮습니다. 다만 그 이후가 문제입니다.”
“무슨 문제?”
“아무리 강한 사람이어도 죽을 뻔한 일은 큰 트라우마로 자리 잡힙니다.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대공 각하.”
테오도르의 심각한 모습을 보고 애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 쉴 때가 아닙니다. 플로렌스령에서 활개를 치는 인신매매단 사건도 그렇고…… 횡령 일도 그렇고…….”
“워스트 의원 말이 옳아. 애튼은 당분간 쉬는 게 좋겠어.”
“그렇지만!”
“휴가라고 생각해.”
“일이 많습니다, 대공 각하.”
“하아…… 안살림 봐 주셨던 노르딕 부인은 몸이 안 좋으시고, 저 또한 이렇게 쉬어야 되고.”
애튼은 웅얼거리며 슬쩍 메이아를 쳐다봤다.
“쟈스민 부인도 곧 따님의 출산이라 자리를 비우셔야 하는데……. 그렇다고 현재 상황에서 믿음직스러운 사람을 바로 뽑기는 어려울 테고……. 누가 저 나을 때까지 일할 분은 없을까요?”
애튼은 반짝거리는 눈망울로 테오도르 옆에 있는 메이아를 바라보았다.
만약 그녀에게 잠시 안살림을 보게 하고 헤만을 바깥일로 내보내 놓으면 그녀는 테오도르와 단둘이 집무실에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미 베나블과 이야기도 끝내 놓은 계획이다.
메이아는 애튼의 시선을 한 몸으로 받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매일 테오도르랑 산책하고 밥 먹고 딸기 차를 마시는 날만 반복했다. 즉, 심심했다.
애튼이 뭘 원하는지 이미 다 아는데 저 눈빛을 못 이기는 척 말해 볼까? 그게 아니면 모르는 척할까? 하지만 뭔가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약간의 구미가 당기긴 했다.
<대공님, 전 언제 마법사 일을 하면 될까요?>
<일하시고 싶으신 겁니까……? 아직 스크롤 작업실이 완공 안 되었습니다. 혹시 대공저에 계시는 게 불편하신 겁니까?>
시무룩한 얼굴로 말하는 그의 얼굴엔 초조함이 묻어 나왔다.
<불편한 건 아니지만 너무 노는 것 같은 기분이라서요.>
테오도르는 괜찮다며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했다. 내가 하고 싶은 건 일이다.
적당히 일이라도 생기면 좋을 것 같지만 일거리가 없다.
애튼의 한숨 소리가 커졌다.
“안살림이라도 다른 가신 가문의 귀부인에게 맡겨야 하는데…… 누굴 믿고 맡겨야 할지, 휴우.”
아예 대놓고 물어봐 주면 대답이라도 하겠는데…… 눈치만 주는 것 같아 모른 척했다.
메이아가 자기를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애튼은 초조해졌다.
“애튼 보좌관, 몸조리 잘해야 해요.”
“예…….”
“절 구해 준 점 고마워요. 몸이 다 나으면 좋은 선물 하나 줄게요.”
“저는 선물 필요 없습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애튼은 메이아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누군가 저 대신 대공가 안살림이라도 봐 주면 좋겠다는 마음뿐입니다. 예를 들어서 메이아 공녀님처럼 총명하신 분으로…….”
메이아는 미소를 지었다. 이건 대놓고 해 달라는 게 아니면 뭔가.
“제가 대신 해 드리고 싶지만 저는 타국의 공녀이며 여기에는 마법사로 와 있을 뿐이에요.”
메이아의 말에 애튼은 먹이를 순간 낚아채는 독수리처럼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공녀님, 그냥 올라오는 서류들만 봐 주십시오! 어차피 도장은 대공 각하가 찍으실 겁니다. 그렇죠? 대공 각하……?”
베나블은 누누이 테오도르에게 애튼의 말에 맞장구를 잘 치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메이아와 하루 반나절을 단둘이 있을 기회가 되겠지만 그녀에게 일을 시킬 순 없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나는 반대야. 공녀님은 편하게 쉬셔야지. 무슨 일을 부탁해? 안 그래, 애튼?”
물론 함께 일할 수 있는 시간이 무척 행복하겠지만 차마 자신의 행복 따위를 위해 그녀에게 일을 시킨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 메이아는 그냥 대공저에서 편하게 있어 주기만 하면 된다.
지금도 충분히 좋다. 더 욕심은 나지만 과한 욕심은 집착이 될 게 뻔하다.
“테오도르 대공님, 제가 일을 돕겠다고 하면 무조건 반대하실 건가요?”
“공녀님이 하시겠다 하면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대공저에 오셨으니 편하게 쉬면서 스크롤을 만드셨으면 합니다.”
“공녀님,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애튼! 공녀님에게 그 무슨 부탁이야!”
테오도르의 호통에 애튼은 칼에 찔렸던 배를 만지며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
애튼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을 하면서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윽!”
의원 워스트가 얼른 애튼의 침대로 다가가 그의 상태를 살펴보곤 다급히 말했다.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워스트 님, 제 목숨보다 대공가 일이 더 중요합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침대 위에 누워 있어야 하는 겁니까! 쿠울럭, 케헥.”
워스트는 다급한 손길로 애튼의 이마에 흐르는 땀들을 닦아 주었다.
“우선 안정! 심호흡! 후우, 후우 하십시오.”
“후…… 우…… 후…… 우.”
“공녀님…… 후우, 후우…… 도와주십시…… 오! 쿨울럭!”
워스트는 기침하는 그의 입에 손수건을 갖다 댔다. 그의 기침이 멈추자 손수건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워스트는 젖은 천으로 애튼의 입 주위와 이마를 닦으며 걱정했다.
메이아 또한 애튼의 심각한 상태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아닙니다. 전…… 일을. 크윽…… 일을 하고 싶습니…… 다, 크악.”
애튼은 숨을 헐떡이다 이내 기절하듯 침대에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보고 워스트는 말했다.
“극심한 고통으로 정신을 놓은 것 같습니다.”
테오도르가 워스트에게 물어보았다.
“상태가 매우 좋지 않은 건가?”
워스트는 심각하게 답했다.
“좋지 않습니다.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애튼의 병실에서 나온 메이아는 테오도르에게 말했다.
“테오도르 대공님.”
“네.”
“애튼 보좌관은 절 구했어요.”
“네.”
테오도르는 자신이 구하지 못한 메이아를 멋지게 구했다는 사실에 애튼을 살짝 질투했다. 아주 살짝.
그러면서 그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전 타국에서 온 공녀일 뿐이에요.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애튼의 부탁에 부담 갖지 말아 주십시오. 일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하고 싶다 하면요?”
“그러면 믿고 맡기겠습니다.”
“애튼 보좌관도, 테오도르 대공님도 모두 절 믿는군요.”
메이아는 몸을 틀어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제가 암살자였다면 테오도르 대공님은 죽은 목숨이었을 거예요. 너무 저를 믿지 마세요.”
갑작스러운 메이아의 무서운 발언에도 테오도르는 웃으며 말했다.
“메이아 공녀님 손에 죽는다고 제가 공녀님을 원망할 것 같습니까?”
메이아가 원한다면 그 무엇이라도 들어 주고 싶다.
사랑이란 꽤 무서운 것이 틀림없다. 그녀가 죽으라면 죽는시늉이 아니라 진짜 죽을 테니 말이다.
그녀가 원한다면 이 세상 모두를 다 가져다주고 싶은 마음이다.
꽤 위험한 감정이란 걸 느끼지만 이미 늦었다. 속절없이 그녀에게 자신의 모든 마음을 빼앗겼다. 아니, 매일 매일 커지는 마음이 쉬지 않고 그녀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