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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52화 (52/163)
  • 52화

    “전 너무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공녀님은 안 보이지, 옷감 가게 주인은 딱 시치미 떼지. 태어나서 난생처음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메이아는 조용히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

    “이젠 제 눈앞에서 없어지지 말아 주십시오. 어딜 가도 절 놓고 가지 말아 주십시오.”

    이 대공님 꽤 불안했구나. 그의 떨리는 몸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약속하시는 겁니다.”

    ‘정말 이 대공님은.’

    유람선 위에서도 자기를 덥석덥석 안더니만 지금도 계속 꽉 껴안고 놔 주질 않는다.

    하지만 메이아는 그의 포옹을 애써 거부하고 싶지가 않았다.

    테오도르의 넓은 가슴이 꽤 안정감이 들었으며, 불규칙하게 뛰는 심장 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러나 메이아는 그의 어깨를 손으로 밀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밀려 난 테오도르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메이아를 급히 살펴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닙니다, 대공님.”

    젖어 있는 눈가를 빨갛게 물들이며 붉은 입술을 살짝 깨문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은 꽤 애처롭게 보였다.

    비를 쫄딱 맞고 있던 강아지가 주인을 발견하고, 달려가 자신을 버리지 말라며 매달리는 듯한 애달픔마저 느껴졌다.

    그의 여린 모습에 메이아는 자신도 모르게 테오도르의 뺨에 손을 갖다 대었다.

    “저 이젠 무사해요. 그만 불안해하세요.”

    메이아의 손이 자신의 뺨에 닿자 테오도르의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잠시 당황하다가 더욱 그녀의 손에 자신의 뺨을 더욱 바짝 대고 눈을 감으며 말했다.

    “정말…… 공녀님을 다시 만나서 살 것 같습니다.”

    묘하게 기쁨이 배어 있는 것 같은 그의 목소리에 메이아는 살짝 미소 지었다.

    “이젠 지하실에 있는 사람들을 구해요.”

    지하실을 찾기 위해 1층과 지하 쪽을 모두 찾아보았지만 허탕이었다.

    그래서 2층과 3층을 둘러보다 2층에서 미세한 마력이 뿜어져 나오는 벽면을 발견했다.

    “여기서 미세하지만, 마력이 느껴져요.”

    메이아가 한 번 벽면에 마력을 담아 손으로 쓸어 만지니 보통 사람이라면 보이지 않을 마법 술식이 나타났다.

    “마법사가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겠네요. 여기에 잠금 마법과 환상 마법까지 같이 걸려 있어요. 인신매매단 사이에도 마법사가 있는 것 같아요. 그것도 실력 좋은…….”

    인신매매단 속에는 마법사가 있다. 생각해 보니 유람선 위에 해적들도 그렇고, 이곳에서도 우연히 만난 인신매매단도 그렇고. 모두 마법사가 존재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아까 잡은 루인츠가 노예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어요. 혹시 대공님 유람선 위에서 싸웠던 해적들 기억나시나요?”

    “예.”

    “그때도 해적들 사이에 마법사가 있었어요. 전 그게 무척 이상했어요.”

    “무엇이 말입니까?”

    “마법사들은 인신매매나 해적질을 하지 않아도 돈 벌 일이 많아요. 당장 스크롤 한 장만 팔아도 4인 가족이 한 달 놀고먹는 비용을 벌어요. 그런데 인신매매에 해적질을 한다고요? 이건 돈 때문에 하는 짓이 아닐 거예요.”

    메이아의 말에 테오도르는 사태의 심각성을 받아들이며 말했다.

    “그러면 그들은 무엇을 원하는 걸까요?”

    “그때 유람선에 대머리 마법사는 부모님이 인질이어서 협박받아 해적들을 도와주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전 믿지 않아요.”

    메이아는 벽 앞에 섰다.

    “우선 마법 해제부터 할게요.”

    벽에 걸린 마법 술식을 해제하면 다른 장소로 연결되는 문이 열린다. 꽤 복잡해 보이지만 메이아에겐 어렵지 않았다.

    “리무브.”

    메이아의 입에서 마법 주문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새벽빛보다 더 밝은 세계여, 밝은 빛 속에서 흐르는 시간조차 지배하는 그대의 힘을 원합니다.”

    메이아의 주변에 환한 빛이 비눗방울처럼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법의 주문이 마무리되면서 벽에 있던 마법이 와장창 유리 조각처럼 깨지더니 하나의 문이 나타났다.

    그리고 메이아는 살짝 비틀거렸다.

    “공녀님!”

    그런 메이아를 테오도르는 순식간에 자신의 품으로 또 끌어와 껴안았다.

    “괜찮으십니까?”

    “인신매매단과의 싸움도 그렇고 환상 마법과 잠금 마법까지 푸느라 마력을 많이 쓴 듯해요. 조금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테오도르는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에 뒤에 있던 헤만에게 말했다.

    “마차는?”

    “골목으로 들어올 수 없어서 아까 옷감 가게 앞에 준비시켰습니다.”

    테오도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사들에게 말했다.

    “메이아 공녀님께서 마법을 해제해 주셨다. 당장 여기에 갇힌 사람들을 구하고, 마무리한다.”

    “알겠습니다.”

    “난 공녀님을 모시고 먼저 돌아가겠다.”

    테오도르는 품에 끌어안고 있었던 그녀의 등을 왼손으로 받치고 남은 오른팔은 무릎 밑으로 넣어 그녀를 번쩍 들어 안았다. 남자에게 처음 공주님 안기를 당한 메이아의 얼굴이 빨개졌다.

    “내려 주세요! 대공님 제가 걸어 나갈게요.”

    “안 됩니다!”

    테오도르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메이아 귀에 남들이 들을 수 없도록 작은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제가 못 내려놓겠습니다.”

    “못 내려놓는 게 어딨어요.”

    “어지러워서 또 쓰러지실까 봐 그러니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메이아는 자신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이지 않기 위해 시선을 살짝 아래로 돌렸다.

    그녀의 귀가 살짝 붉어진 걸 본 테오도르는 배부른 짐승처럼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마차에서는 내려 드리겠습니다.”

    테오도르는 자신의 품 안에 있는 그녀를 마치 섬세한 유리 세공품이라도 조심스럽게 다루며 천천히 걸어 나갔다. 이대로 쭉 평생 공주님 안기만 하고 살고 싶을 정도다.

    메이아는 얼굴을 붉히며 내려 달라고 계속 말했다.

    “못 내려 드립니다.”

    “사람들이 쳐다보잖아요, 대공님.”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짙어져 갔다.

    그는 조곤조곤 오늘 일에 대해 메이아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메이아도 그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애튼과 두 명의 기사만 데리고 나간 점은 옳지 않은 행동이라는 걸 인정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테오도르에게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옷감 가게에서도 천을 속여 파는지 궁금했다. 그냥 가볍게 외출한다는 생각으로 왔는데 인신매매단과 엮일 줄은 정말 몰랐다.

    “다음부터는 외출할 때에는 베르샤 기사단장 아니면 저와 함께 나가야 합니다. 앞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꼭 약속해 주십시오.”

    “약속할게요.”

    마차 앞까지 왔으니 이제 내려 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끝까지 내려 주지 않았다.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곁눈질하는 게 느껴진다. 메이아는 자신과 테오도르 사이를 오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오도르가 마부에게 눈짓하자, 그는 문을 열었다.

    마차 안에 들어와서야 그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아쉬운 기분이 드는 거지?

    맞은편에 앉은 테오도르를 바라보던 메이아는 미묘한 감정에 고개만 갸웃거렸다.

    *

    아그니타는 우여곡절 끝에 쥬안과 함께 마탑에 도착했다. 여전히 웅장하고 높은 마탑을 바라보며 곧 메이아를 만날 수 있는 희망을 가지며 들어갔다.

    입구에 있던 마법사는 아그니타를 1층 응접실로 안내했다. 아그니타와 쥬안이 함께 왔다는 말을 전해 듣자마자 푸링은 하던 일을 멈추고 곧바로 그들에게 갔다.

    “아그니타, 오래간만이구나.”

    “잘 지내셨어요, 할아버지?”

    “그래, 나는 잘 지냈다.”

    푸링은 공작저에서 메이아의 마법 스승으로 있었을 때 아그니타를 손녀처럼 예뻐했다.

    “안 본 사이에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말도 마세요! 메릴이 툭하면 손찌검을 해 대서 말이죠. 제가 해고당하기 위해서 조금 속 긁어났더니 독방에 가뒀어요.”

    “이런, 이런.”

    푸링은 아그니타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얼굴에 다 아물지 못한 상처들을 보자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사람에게 이리 잔인하게 매질을 하는 것인가!

    “고생 많았다.”

    “고생은요. 괜찮아요.”

    밝게 웃으며 괜찮다고 말하는 아그니타를 푸링이 안타깝게 쳐다봤다.

    “그래도 어디 아프면 꼭 말해야 한다.”

    “물론이죠!”

    그림자 일족은 피에 검은 피가 흐른다. 사람들은 그들의 몸에 왜 검은 피가 흐르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검은 피를 지닌 악마라는 별명을 가졌지만 그들은 빛을 등지고 어둠 속에 숨어들 수 있는 능력 때문에 그들의 재능을 탐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림자 일족과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아이들은 어느 정도 자라면 몸속에 검은 피가 흐를지 빨간 피가 흐를지 결정되는 시기가 온다. 이때 연금술약인 ‘피의 융합’을 마셔야 한다.

    물론, 피의 융합을 마신다 하더라도 무조건 그림자 일족의 검은 피를 물려받는 게 아니다.

    평범한 사람의 빨간 피를 물려받을 수도 있다.

    이 약을 시기에 맞춰 마시지 못한다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 아그니타가 그랬다.

    쥬안이 메이아를 조금만 늦게 만났더라면 아그니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었다.

    <쥬안이라고 했지?>

    <네…….>

    당시 쥬안의 나이는 열두 살, 아그니타는 여덟 살이었다.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니?>

    <아니요. 납치당하셨어요. 어디로 끌려가셨는지 모르겠어요.>

    <저런…… 둘이 고생이 많았겠구나.>

    험한 세상에서 마음 편하게 해 줄 수 있는 장소와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때 어린 남매는 잘 알게 됐다. 메이아의 부탁을 받은 푸링은 친한 연금술사에게 ‘피의 융합’ 약을 얻어 아그니타에게 먹였다. 일주일을 꼬박 앓아누웠던 아그니타는 사람의 빨간 피를 가지고 새롭게 태어났다.

    <푸링 님이 약을 가져다주신 거라 들었어요. 고맙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할아버지라고 불러도 된다.>

    <정말로 할아버지라고 불러도 되나요?>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정말 손녀처럼 생각한다. 갈 때마다 맛있는 과자를 챙겨 주고, 해맑게 웃으며 안겨 오는 아그니타를 마법으로 비행을 시켜 주며 계절마다 옷 선물도 보냈다.

    그렇게 아껴 온 소중한 손녀 같은 아이를 메릴이 건드렸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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