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건물 안에 있던 열댓 명의 남자들과 시선이 마주쳤다.
손목이 잡혀 끌려간 애튼은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쿵 소리가 날 정도로 바닥에 세게 부딪치는 모습에 메이아는 인상을 찡그렸다.
“도망가십시오! 절 두고 그냥 가십시오! 전 신경 쓰지 마시고…….”
험상궂은 사내들은 메이아를 쳐다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로먼이 우릴 위해 준비했다는데?”
“정말 예쁜데? 팔기 아까운데 내 부인 삼고 싶다, 흐흐.”
저들의 대화를 듣고 정확해졌다. 로먼과 앞에 보이는 남자들은 한패라는 걸.
자신처럼 실크 천이 가짜라고 말하는 사람을 이런 식으로 건달들에게 보냈던 걸까? 아니, 그랬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 진짜 실크를 팔지 않은 게 알려지면 안 될 테고, 환불이나 교환을 하자니 돈이 아까울 것이니 그러니 고전적인 방법으로 가게를 이용한 손님들에게 범죄를 저질렀던 거다.
“계집애 손목일 줄 알았는데 사내놈 손목이잖아, 에잇!”
애튼은 바닥에서 잽싸게 구르며 메이아 앞을 막았다. 허리춤에 있는 검을 꺼내 들었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남자들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섣부르게 움직이지 말아라. 칼 맞는다.”
모욕적인 언사를 들은 메이아는 분노 서린 눈빛이 그들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계집애 성깔 있어 보이는데.”
“우선 사내는 죽일까?”
“죽이긴…… 노예로 갖다 팔아야지.”
애튼은 좋지 않은 예감에 무슨 일이 있어도 메이아만은 탈출시키기로 결심했다.
사실 메이아는 플라이 마법을 써서 도망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애튼까지 데리고 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저 남자들을 모조리 정리하면 간단한 문제다.
하지만 자신을 지켜 줄 쥬안은 현재 카르펜 제국에 있다. 빠르게 주문을 외우며 마나를 담아야 한다. 메이아는 애튼에게 속삭였다.
“조금만 견뎌 주세요, 애튼. 마법을 쓸 테니까요.”
애튼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고쳐 잡았다.
“애들아! 죽이지 말고 사로잡자.”
애튼은 몸을 돌려 왼쪽으로 파고들며 남자 한 명에게 검을 깔끔하게 찔러 넣었다. 그리고 다시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고 체중을 실어 일격을 날렸다.
그러자 남자들 사이에서 2m는 가볍게 넘을 듯한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나왔다.
“어느 정도 검을 배웠나 보지만 나한테는 안 통한다, 애송이.”
애튼이 검을 맞대고 버티고 있을 때 메이아는 마법 이공간을 열어 자신의 아티팩트를 꺼냈다. 양 손목에는 마력 충당용 팔찌를 끼고, 주문의 캐스트 속도를 올려 주는 목걸이를 착용했다.
“너희들 다 죽었어. 바람 속에 섞여 있는…….”
“저 계집애 마법사야!”
“뭐라고!”
“마법 주문을 외우고 있잖아! 빨리 막아!”
메이아가 마법사라는 걸 눈치챈 남자들은 당황했다.
움푹 팬 눈을 지닌 사내가 단검을 치켜들고 메이아를 향해 던졌다.
그 짧은 순간에 애튼은 몸을 던져 그녀 대신 칼에 맞아 쓰러졌다.
“안 돼!”
칼에 맞은 그의 몸은 생전 처음 겪어 보는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며 힘없이 쓰러졌다.
“쿨럭, 공, 공녀님.”
“애튼, 더는 말하지 마. 피를 더 흘리면 죽을 수도 있어.”
지금은 그에게 높임말을 써 줄 정신이 없었다.
“제 인생 마지막에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공녀님 뵙고…… 떠납니다.”
애튼의 배에선 피가 계속 철철 흘러나왔다. 메이아는 그의 배를 꾹 누르며 지혈해 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점점 애튼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 갔다.
“성수 뿌려 줄게.”
“대공 각하께서, 물어보시면…… 쿨럭…… 공녀님을 지키다 죽었다고…… 쿨울럭…… 멋지게…… 죽었다고. 전…… 전해…… 주십시오…… 커어억!”
그의 입에서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하아……, 공녀님…… 대공님을 부탁드립니다…….”
애튼은 그렇게 이야기하곤 한 떨기 가녀린 꽃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애튼?”
메이아는 쓰러진 애튼의 코끝에 손가락을 가져다 보았다. 다행히 호흡이 미세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극심한 고통에 기절한 듯하다. 죽은 게 아니라서 천만다행이었다.
메이아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마법 이공간을 열어 성수 한 병을 꺼내 그대로 애튼의 배 위에 한 병을 다 뿌렸다. 상처에 성수를 뿌리자 지혈이 되는 걸 확인했다.
이렇게 많은 피를 흘렸으니 지혈했어도 애튼이 위험한 상황인 건 변하지 않는다.
남자들을 차례대로 쳐다봤다. 그들은 애튼이 칼에 맞고 쓰러진 걸 보며 웃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할 법한 가벼운 장난처럼 치부하며 자기네들끼리 낄낄거렸다.
“이젠 마법사 언니만 남았네?”
마법사인 걸 아는 만큼 남자들은 쓰러진 애튼과 메이아에게 함부로 다가오지 않았지만, 반대로 메이아는 그들 쪽을 향해 과감히 몸을 돌렸다.
쓰러진 애튼을 뒤로 한 채 메이아는 그들에게 한 발자국씩 다가갔다.
험상궂은 사내들 사이에서 보라색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가 나왔다.
그는 메이아를 보자마자 들고 있는 칼을 핥으며 음흉한 눈빛으로 웃었다.
“은발 머리카락에 미인이라…… 비싸게 팔리겠다.”
옆에 있던 부하로 보이는 사내가 눈치를 보며 이야기했다.
“귀족 영애 같습니다만.”
메이아의 도도한 표정과 입은 옷들이 예사 것이 아니었다.
“무슨 상관이야. 갖다 팔 건데.”
“그렇기야 하죠. 근데 마법사입니다.”
“마법사는 더 비싸게 팔리지.”
“맞습니다!”
“마침 은발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의 여자를 찾는 사람이 있었는데 잘되었군. 저 여자를 비싸게 팔면 한몫 잡을 수 있겠어.”
“마법사는 마법 주문을 외울 수 없도록 빠르게 치고 들어가야 한다.”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는 ‘빠르게’라는 말을 주위 동지들에게 말하며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며 자세를 잡았다.
“클로네, 마법 구속구를 가져와! 저 계집에 묶어 놓고 아주 오붓한 시간 좀 보내야겠다!”
사내는 음흉한 눈빛으로 메이아에게 노골적인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입맛을 다셨다.
“끔찍하네. 너희 지금 도망가면. 목숨을 살려 줄까 했는데.”
사내들은 마법 구속구를 챙기며 메이아의 말에 크게 비웃었다.
“널 지켜 주던 사내는 죽었어! 여긴 아무도 안 와.”
사내의 말에 메이아는 방긋 웃었다.
“애튼은 죽은 게 아니고 기절한 거고 여기 아무도 안 와도 괜찮아. 난 그럴수록 좋거든…….”
메이아의 말을 오해한 사내는 크게 웃으며 더욱 비아냥거리며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었다.
“아무도 안 와도 좋다? 그럴수록 좋다? 그런데 어떡하지? 알몸으로 벗겨진 널 볼 사내들이 여기 많을 텐데?”
“반항 좀 해라! 계집애.”
“두목, 저는 반항 안 해도 좋습니다. 언제 저런 여자 품어 보겠습니까, 흐흐.”
메이아의 표정은 냉담했고, 푸른 눈동자 깊은 곳에는 혐오스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아이스 써클.”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마법 주문이 담겼다.
얼음이 순식간에 퍼져 나가면서 남자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메이아가 손가락을 퉁기며 주문을 외우자 보라색 머리카락의 사내의 입만 빼고 다른 남자들의 혓바닥은 모두 얼어 버리자 그들은 곧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메이아는 유유자적 걸어 나오며 미소를 지었다.
“가만있어 주지 않을래? 발과 손을 얼렸으니 조금만 움직여도 깨질지도 몰라.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내 말 잘 들어 주면.”
“잘 들어 주면?”
사내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살려 줄지도 몰라. 물론 손발 없는 불구가 되겠지만 그건 내 탓은 아니야.”
“무슨 미친 소리야! 이 미친 여자야! 당장 풀어 줘! 네가 얼린 거잖아!”
“그래도 목숨은 살려 주는 거니까 고맙다는 말이 먼저여야 하는데 예의가 없구나.”
몸 안에 차가운 기운이 침투하자 사내는 추위에 이가 딱딱거리며 부딪쳤다. 이렇게 무서운 추위를 맛본 건 처음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차갑게 느껴지는 건 눈앞의 메이아였다.
“당장 풀어!”
“내가 왜 풀어줘야 하는 거지? 합당한 이유를 설명해 봐.”
조금 전까지 자신과 웃고 떠들던 동지들이 모두 얼음으로 뒤덮여 갔다.
“무슨 짓이야! 살려 줘! 하지 마! 사람을 죽일 셈이야? 너 마법사잖아!”
마법사들은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했다.
“마법사도 사람 죽일 수 있어.”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얼음에 뒤덮여 가는 동지들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리고 이내 모두 얼음으로 꽁꽁 뒤덮였다. 얼음으로 조각해 놓은 사람 동상같이 느껴졌다.
메이아는 싱긋 웃었다.
“잘 얼었네. 이대로 부수면 바람에 날아가겠지?”
“제발 그러지 마……. 제발…… 살려 줘…….”
간절하게 메이아에게 부탁했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그가 바라는 말이 아니었다.
“스네어.”
메이아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주문을 외우고 손가락을 튕기자 꽁꽁 얼어 있던 남자들은 돌에 맞은 유리처럼 잘게 가루가 되어 부서지기 시작했다.
“안 돼!”
비통한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메이아의 입에서 마법 주문이 흘러나왔다.
“월 오브 윈드.”
메이아의 바람 마법이 얼음 가루들을 날렸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메이아를 노려보았다.
“사람은 죽어서 흙이 되는데, 쟤네들은 얼음 가루가 되었네.”
소름 끼치는 여자의 눈동자에 일말의 죄책감도 없다는 걸 읽은 그의 눈동자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물들어 갔다.
여러 명의 사람을 죽여 놓고 속 시원하다는 듯 오히려 미소 짓는 눈앞의 미인은 악마보다 잔인해 보였다.
“이 악마 같은…….”
이건 꿈이야! 모두 꿈일 거야! 사내의 애처로운 비명에도 메이아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비명 질러도 여기 아무도 안 와. 네가 그랬잖아. 기억 안 나? 조금 전까지 이야기한 걸 기억 못 하다니.”
아까 자신이 한 대사를 반대로 들으니 공포가 엄습했다.
“걱정하지 마. 너는 죽이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니까. 나한테 예의를 갖추고 대답을 잘하면 좋게 봐 줄게. 보기보다 나는 친절한 사냥꾼이거든.”
조금 저까지만 해도 남자는 사냥꾼의 입장이었다. 앞에 있는 이 여자를 냉혹하게 사냥하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메이아 앞에서 전혀 사냥꾼이 아니었다. 사냥꾼이라 믿었던 어리석은 사냥감이었을 뿐이다.
그의 볼을 타고 내려오는 눈물이 금세 얼어붙었다.
“이름이 뭐야?”
“루인츠입니다.”
루인츠는 살려 달라고 메이아에게 빌었다.
“죽이려고 할 땐 언제고 반대 입장이 되어 보니 염치없이 살려 달라고 하는 거야?”
“사람을 이렇게 죽여 놓고…… 죄책감도 안 가지다니…….”
루인츠는 무서움과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이 모든 걸 외면하고만 싶을 뿐이었다.
“살려 달라고 한 사람들 중에서 단 한 번이라도 봐준 적이 있어?”
메이아의 말에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하얗게 질린 루인츠의 얼굴이 무서운 공포로 점점 물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