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보기만 해서 구분하는 건 쉽지 않아. 이유는 같은 성질이라 그런 거지. 그래서 돈에 욕심이 먼 디자이너들이 실크를 구분 못 할 것 같은 사람에게 속여 팔기도 해.”
“그러면 공녀님, 육안으로 구분할 수 없다면……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 겁니까?”
실크와 이런 비슷한 천을 이걸 구분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드레스에 쓰이는 고급 실크는 물에 닿아도 수축이 되지 않지만 대공저에 들어온 실크 천들은 물에 닿으면 분명 수축할 거야.”
“하지만 공녀님께서는 몇 번 만져 보시고…….”
“물이 없으면 이렇게 비교해 보면 알아.”
메이아는 마법 이공간에서 실크 손수건을 꺼내 접었다.
그리고 다시 손수건을 펄럭이며 털어 냈다.
“진짜 실크 천은 아무리 접고 손으로 구겨도 주름이 지지 않아.”
메이아의 시선이 자신이 만졌던 한나의 치맛자락으로 향했다.
“내가 만졌던 한나의 치맛자락을 봐 봐.”
한나의 치맛자락은 주름이 지고 구겨져 있었다.
“구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구분할 수 있는 거야.”
“아!”
사용인들은 옷감의 재질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니 그동안 몰랐을 거다.
애튼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면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짓을. 다른 장부들도 봐 주시겠습니까?”
“정말로 제가 다른 장부들도 봐도 괜찮은 건가요? 애튼?”
너무 남의 가문 일에 참견하는 거 아닌가? 난 그저 대공저에 마법사로 왔을 뿐인데 잘못된 계산서를 보니 저도 모르게 참견해 버렸다. 그렇지만 잘못된 부분을 그냥 넘어가는 건 더 못 참는다.
“예, 괜찮습니다. 꼭 봐 주십시오.”
애튼은 메이아에게 지난날의 장부들을 보여 주며 조언을 구했다.
한나는 그런 메이아에게 모습에 더욱더 대공비가 되어 달라며 속으로 빌었다.
애튼은 메이아가 표시한 부분을 계산하며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그나저나 이 정도면 엄청난 폭리를 취득했네…….”
메이아는 다시 한번 천 서류를 빠르게 훑어보며 말을 이어 갔다.
“옷감 가게에서도 실크를 속여 파는지 알아야 될 듯한데……. 플로렌스 대공가 상대로 간 크게 사기를 쳤다면 가게에서도 사람들에게 그렇게 팔겠지요? 아니면 사람 봐 가면서 속여 팔았을 거고요.”
메이아의 말을 들을수록 애튼의 얼굴은 점점 종잇장처럼 구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메이아는 미소 지었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들었다.
*
메이아가 나간 뒤 테오도르는 침대 위를 뒹굴며 웃었다.
베나블은 그의 웃음소리에 방으로 들어와 좋아서 데굴데굴 구르는 그를 보며 안심했다.
오래지 않아 깨어날 것 같은 꿈 같았다. 세상에! 그녀가 ‘단둘’이란 말을 자기에게 써 주었다.
심지어 애칭을 함부로 불렀는데도 너그럽게 용서하고, 불러도 된다고 허락까지 해 주었다.
“역시 아버지 말은 옳아. 베나블, 저지르고 봐야 한다.”
아버지가 해 준 말 중 하나 ‘저지르고 보자’ 덕분에 약혼 이야기도, 애칭도 모두 다 긍정적인 결과를 내놓았다.
“전 주인님께서는 사모님을 유혹하시기 위해 많은 일을 저지르고 보시긴 했죠, 허허.”
“그렇지?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히 애칭을 부를 수 있는 사이가 되어야겠어.”
사랑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테오도르는 더 메이아를 갈구하게 되었다.
대공저 사용인들 또한 그녀가 대공비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테오도르를 돕기로 했다.
“하지만 불안해.”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급할수록 천천히 가라 했습니다.”
세상에 제일가는 권력자라 할지라도 사랑에 빠진 순간 약자일 뿐이다.
“공녀님께선 아름다우신 아버님이 계셨습니다. 너무 뛰어난 미색의 사내는 오히려 가족 같다 느끼실 수 있습니다. 과한 미색보단 적절한 매력을 드러내는 주인님께서 오히려 메이아 공녀님 눈에 들기 쉬울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애튼이 가져다준 데이빗의 초상화를 보고 깜짝 놀랐다.
메이아와 무척 닮은 사내는 누가 봐도 미인 그 이상이었다. 그녀의 아버지인지도 모르고 질투했다는 생각에 몇 번이고 이불 속에서 발차기까지 하며 베개에 얼굴을 묻고 부끄러워했다.
“카르펜 제국에서 데이빗 님의 별명은 ‘정의로운 미모’라고 합니다.”
“정의로운 미모?”
“무슨 짓을 해도 용서받는 미모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게 나쁜 짓이든, 잔인한 일이든 그가 하면 모두 용서할 수 있다 해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외모는 확실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
그런 사람에게 외모로 이겨 보겠다고 생각한 거 자체가 이미 진 게임이었다.
“용기를 가지십시오. 비록 데이빗 님처럼 눈부신 미색은 아니지만 주인님 또한 멋진 외모와 남성적인 매력을 가지셨습니다.”
베나블을 쳐다보던 그의 눈이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가늘어졌다.
“딸들은 아빠 같은 사람하고 결혼한다고 하잖아.”
“주인님, 데이빗 님 같은 외모는 없습니다. 설사 세상 어디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전에 공녀님의 마음을 잡으시면 될 일입니다. 큰 걱정하지 마십시오.”
베나블은 연신 흐뭇하게 웃으며 테오도르에게 진지하게 조언했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벌써부터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어떻게서든 공녀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만 생각하셔야 합니다.”
테오도르는 도리질하며 절대 있어선 안 되는 상상들을 머릿속에서 털어 냈다.
“그래, 베나블. 네 말이 맞다. 일어나지 않은 일은 지금부터 걱정할 필요가 없지. 그런데 메이아 공녀님은 어디 계시지?”
하루에도 몇 번씩 메이아 공녀를 찾는 테오도르였다.
“방으로 돌아가셨겠지?”
“어디에 계신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테오도르는 메이아가 애튼과 함께 외출한 사실에 의아해했다.
외출해야 했던 이유가 있었던 걸까? 헤만이 가져다준 서류와 그녀의 쪽지를 읽었다.
[옷감 구경하고 올게요.]
그리고 두 명의 기사만 데리고 외출했다는 사실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헤만, 메이아 공녀님이 외출하는데 호위 기사 두 명이 전부라는 거야?”
애튼과 단둘이 외출하는 건 백번 이해한다 하더라도 기사들이 겨우 두 명이라니…….
“베르샤한테 당장 나갈 준비를 하라고 전해.”
베르샤는 플로렌스 대공가의 제1 기사단장으로 소드 마스터에 근접하다 할 정도로 강한 기사다.
“알겠습니다.”
온몸에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다.
테오도르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 양손으로 책상 위를 짚었다. 불안하고 초조했다.
“날벌레 구더기 같은 것들이.”
남자들이 쳐다보고 침을 흘리며 온갖 망상을 해 대며 그녀를 바라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참을 수 없는 토기가 올라왔다.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오는군.”
남들이 메이아를 쳐다보는 게 정말 싫다. 그렇다고 그녀의 외출 자유까지는 막을 수 없었지만 아름다운 그녀를 보며 쳐다보는 구더기들이 많기 때문에 너무 걱정되었다.
지금 당장도 카르펜 제국의 황자가 그녀를 넘보고 있지 않은가!
유람선에서는 어떻고! 그나마 쥬안이 살기를 풀풀 풍기니 구더기들이 안 달라붙어 다행이었지만 현재 쥬안은 카르펜 제국으로 심부름을 간 상태고 쥬안 없이 메이아와 애튼 둘이서 외출한 것이니 더욱 초조하고 불안했다.
자신은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져 상사병까지 얻었는데 혹여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첫눈에 반한다면 생각만 하더라도 싫다. 빨리 그녀에게 가야 한다.
“나가야 하겠어. 바로 메이아 공녀님을 찾아야겠어.”
*
옷감 가게 사장의 이름은 ‘로먼’이다.
실크 옷감을 보여 달라고 말하자 그는 대공저에 들어오는 가짜 실크 천을 보여 줬다.
메이아가 손으로 쓰다듬으며 천을 살짝 구겼다. 로먼은 펄쩍 뛰며 외쳤다.
“비싼 천인데 그렇게 만지시면 안 됩니다! 아가씨.”
“이거 실크 아니잖아.”
“네?”
“실크를 보여 달라고 했는데…… 인형 옷 만들 때나 쓰는 천을 보여 주면 어쩌라는 거지?”
“아이구, 죄송합니다. 제가 헷갈렸나 봅니다, 하하.”
로먼은 실수했다며 이번에는 진짜 실크를 보여 줬다. 그리고 메이아는 깨달았다.
가짜 실크 천에 사람들이 속으면 그냥 판매한다는 것과 만에 하나 속지 않은 사람에게는 진짜 실크 천을 보여 준다는 거다. 그것도 실수라는 말과 함께.
장사를 하면서 ‘실수입니다’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옆에 있던 애튼은 그 모습을 보면서 잔뜩 인상을 썼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입술이 들썩거렸다.
“공…… 아가씨 아니었으면 가짜 실크 천을 살 뻔했습니다.”
공녀님이라고 부를 뻔한 말을 얼른 아가씨라 바꿔 말했다.
“그런데 옷감 사장은 여기서 오래 영업했나?”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실수를 자주 하는 이유가 뭐지?”
“네?”
“실크를 구분 못 하는 사람한테는 인형 옷 만들 때 쓰는 가짜 실크 천을 보여 주면서 진짜 실크처럼 팔고 있는 거잖아.”
로먼은 메이아의 차가운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여기서 실크를 산 사람들한테 정말 제대로 된 실크를 판 적이 몇 번이나 돼?”
“저는 그렇게 판 적이 없습니다. 오늘 겪으신 일은 정말 처음 하는 실수였답니다. 영애님, 대신 제가 저 멀리서 온 타국의 자수 실크 천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로먼은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한 뒤 자리를 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뒷문이 열리고 로먼이 세상 친절한 얼굴로 굽신거리더니 이쪽으로 따라와 달라며 가게 뒤편으로 안내했다.
뒷문으로 따라 나오자 바로 좁은 골목길이었다. 왼쪽과 오른쪽에 좁은 통로만 있을 뿐 다른 곳으로는 갈 수 없었다. 그 앞은 온통 건물로 막혀 있었다. 덕분에 날은 환했지만 꽤 어두운 분위기였다.
“이쪽으로 와 주십시오. 제 보물 창고가 여기 근처입니다.”
빨간 지붕 건물 앞에 선 로먼은 열쇠를 놓고 왔다며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왔던 방향으로 다시 뛰어갔다.
아무리 기다려도 로먼이 오지 않자 애튼은 초조함을 느끼고 그가 간 방향으로 걸어가려 했다.
“다시 가게로 돌아가시죠.”
그때였다.
“여기 살려 주십시오!”
로먼의 비명이 들려왔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어 애튼은 허리춤의 검부터 뽑았다.
“애튼,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우선 돌아가서 기사들을 데리고 와요.”
“저도 공녀님 생각과 같습니다. 돌아가서 기사들을 데리고 오죠.”
애튼이 그렇게 하자고 고개를 끄덕이던 찰나,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애튼의 손목을 붙잡아 건물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메이아는 눈썹을 치켜들고 애튼이 끌려간 곳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