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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47화 (47/163)
  • 47화

    “몸조리 잘하고 계세요.”

    메이아가 문을 열고 나가는 뒷모습을 테오도르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조금 전 일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머리가 어질거리고 기분은 몽글거린다. 심장이 세차게 뛰며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걸 보니 분명 꿈은 아닌 것 같았다.

    무엇보다 메이아가 자신에게 단둘이 있을 땐 애칭으로 불러도 된다고 허락했다.

    테오도르는 자신의 볼을 꼬집어 보았다.

    아팠다. 꿈이 아니었다. 자신의 다급한 실수가 오히려 좋게 풀렸다.

    그녀가 나가자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하…… 하하.”

    분명 창피해할지도 모르는 자기를 위해서 메이아가 배려해 준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창피한 마음과 두근거리는 감각이 뒤범벅되었지만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녀의 작은 배려라 하더라도 좋은 건 좋은 거다.

    “하하하.”

    자꾸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테오도르는 막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데이빗이란 사람은 메이아의 아버지였다. 입꼬리와 광대가 하늘 위로 승천할 것처럼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는다. 결국 방 밖에 있던 베나블이 듣고 걱정할 정도로 큰 소리 나게 웃어 버렸다.

    테오도르 방에서 나온 메이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조금 전 자신의 자연스러운 언행으로 분위기를 어색해지지도 않게 만들었고, 덤으로 테오도르의 당황해하는 얼굴을 즐겁게 지켜볼 수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애칭으로 부르며 연인이라 오해받을 수 있으니 둘이 있을 때 애칭 부르는 걸 허락했다. 가족이 아닌 타인이 애칭을 부르는 게 기분 나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기분이 썩 괜찮았다.

    남들이 부른다면 정말 화를 냈을 것 같았는데,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그를 친한 친구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메이아는 자신과 친해지고 싶었기 때문에 데미안으로부터 지켜 주고 싶어 하는 테오도르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 이제야 테오도르가 약혼하면 지켜 주겠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는 것 같았다.

    테오도르를 생각할수록 이상하게 가슴에 통증을 느꼈다. 날이 갈수록 부정맥이 심해지는 것 같다. 부정맥에 탁월한 신성력이 담긴 아티팩트와 성수까지 마셨는데도 소용이 없다.

    부정맥이 아니라면 다른 병일까? 그러기엔 몸이 너무 멀쩡한데…….

    메이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복도 사이를 걸어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그렇지 않아도 애튼에게 자신의 스크롤 작업장이 언제쯤 완성되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똑똑.

    집무실에 노크했다. 아무런 응답이 없어 다시 한번 노크했다.

    똑똑.

    노크해도 문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문을 살짝 열어 보니 예상대로 아무도 없었다.

    “공녀님!”

    복도 안에 울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쳐다보니 애튼이 뛰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공녀님! 집무실엔 웬일이세요?”

    “애튼, 잘 왔어요. 스크롤 작업장이 언제 완성되는지 궁금해서요.”

    “한 일주일이면 완공됩니다. 원하시는 마법 재료들도 3, 4일이면 도착합니다.”

    “고생이 참 많습니다.”

    “고생은요! 하하하.”

    애튼은 메이아가 들어올 수 있도록 집무실 문을 크게 열고 허리를 숙였다.

    “들어오십시오, 공녀님.”

    문을 완전히 열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메이아는 책상의 서류들에 시선이 갔다.

    오래간만에 보는 그리운 것들이었다.

    숫자, 계산서, 비용 청구 등등. 황태자 약혼녀 자리에 있을 때도 황후의 서류 일들을 도와주며 칭찬받았던 기억이 갑작스레 떠올랐다.

    한참을 서류를 쳐다보던 메이아의 표정이 조금씩 미묘하게 어긋나기 시작했다.

    청구서에 적힌 비용들이 이상했다.

    돼지고기 1근 10동인데 10근을 10실버에 구매한 건 계산에 맞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플로렌스령의 물가가 비싼 편인가?

    메이아는 좀 더 서류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100동=1실버’이니까, 10근을 구매하면 1실버로 표시하는 게 맞는데 10실버?

    “계산이 틀린데…….”

    시선을 떼지 않고 서류를 쳐다보는 메이아에게 애튼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메이아는 자신이 보고 있던 서류를 손으로 가리켰다.

    “계산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상하다는 생각에 따로 서류를 빼놓은 것입니다.”

    “1실버인데 10실버로 되어 있어요. 0이 하나 더 적힌 셈이죠.”

    누가 지적하더라도 0을 실수로 하나 적은 것뿐이라는 핑계처럼 보이는 숫자.

    애튼은 자신이 헷갈리는 부분을 정확히 집으며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메이아를 구원자처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저어……, 공녀님 실례가 안 된다면…… 다른 것들도 봐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봐 드릴게요.”

    애튼이 서랍 속에서 꺼내 준 서류를 메이아에게 건네주었다.

    어느새 자리를 잡고 의자에 앉은 그녀는 그가 준 서류를 살펴봤다.

    “확실히 이상하네요.”

    안주인도 없어 티 파티도 열지 않는 대공가에서 무슨 가구를 3개월마다 바꾸는 거지?

    커튼 교체 비용 또한 1개월에 한 번씩 이루어지고 있었다.

    평범한 암막 커튼 같아 보였는데 1만 골드라니 그것도 매달 지출이라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런 커튼들이 그 정도 가격은 나오지 않는 재질인데……. 그렇다고 최신 유행 색상이나 디자인도 아니다.

    아무리 봐도 5실버 정도의 커튼일 것 같은데?

    그리고 좋은 재질의 천을 매달 구매하고 있었다. 메이아는 서류에 적힌 실크 천이라는 목록을 가리키며 애튼에게 물었다.

    “실크 천을 매달 대량 구매하셨네요.”

    “예, 대공저에 일하는 사용인들이 입는 옷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사용인들이 일하다 보면 옷이 해지거나 더럽혀지니 매달 옷감을 사서 만드는 부분은 이해한다.

    그러나 금액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녀들을 위한 천 1마가 50실버라면 굉장히 좋은 실크 천을 구매했네요.”

    “예, 대공가에 일하는 사용인들에게 결속력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창문의 암막 커튼도 매달 지출하네요. 그리고 생각보다 커튼 가격이 매우 비싼데 플로렌스령의 천의 시세가 이렇게 비싼 편인가요?”

    “저는 커튼을 봐도 잘 몰라서…… 노르딕 부인이 구매하신 거라…….”

    애튼의 잘 모르겠다는 말은 당연하다.

    의자, 테이블, 테이블보에 꽃병, 커튼, 그리고 꾸미는 꽃 비용 등등 이건 안살림을 하고 있는 여자들이 봐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노르딕 부인은 아직 못 뵀던 분 같으신데…….”

    “예, 오랫동안 플로렌스 대공가 안살림을 책임져 주신 분이신데…… 이번에 몸이 좋지 않으셔서 저택으로 내려가 요양 중이십니다.”

    딱 봐도 횡령한 게 눈에 보인다. 그것도 테오도르 앞까지 서류들은 회계 직원들이 통과시키고 올린 것들이다.

    어디서부터 꼬여 있는 걸까?

    메이아는 서류들을 살펴볼수록 한숨이 절로 나왔다. 차근차근 하나씩 풀어 생각하자.

    평소에 사용인들이 입고 있는 옷들이 그리 좋은 실크 천이라는 걸 느끼지 못했다.

    그건 절대 고급 천일 리가 없다. 확인하기 위해 메이아는 집무실 밖에 있는 한나를 불렀다.

    한나는 메이아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예, 공녀님.”

    “한나, 나한테 가까이 와 주지 않을래?”

    “예, 물론이죠.”

    “치마 좀 만질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가까이 다가가 치맛자락을 만질 수 있도록 허리를 곧게 폈다. 메이아는 풍성한 치맛자락을 이리저리 만져 보고, 엄지손가락으로도 쓸어 보고 치맛자락을 구기기도 했다.

    한나가 입고 있는 시녀장복을 이리저리 살펴본 메이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건 옷을 만들 때 쓰는 실크 천이 아니야.”

    “예?”

    메이아의 이야기에 자리에 있던 한나와 애튼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실크 촉감이 맞는데…… 광택도 분명 실크입니다.”

    “물론 만졌을 때 촉감도, 광택도 질기면서도 부드러운 면이 실크가 맞지만 이건 진짜 실크가 아니야.”

    만져 보니 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사용인들이 만들어 입던 옷의 천은 진짜 실크가 아니다.

    실크처럼 보이는 싸구려 천일 뿐이다.

    <메이아, 드레스를 보고 어떤 디자이너가 만들었는지 알아맞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드레스를 만드는 옷감 재질의 구분이란다.>

    <예, 어머니.>

    <앞에 마네킹을 좀 보겠니?>

    바이올렛이 가리킨 정면에는 두 개의 마네킹에 똑같은 드레스가 입혀져 있었다.

    <둘 다 고급스럽고 예쁜 드레스를 입었지?>

    <네.>

    <가서 만져 보렴. 그리고 천의 재질을 맞춰 보렴.>

    아무리 만져 봐도 촉감은 똑같았다.

    <둘 다 실크처럼 느껴지니?>

    <예.>

    <메이, 한쪽은 실크가 아니란다.>

    <네? 이렇게 감촉이 똑같은데도요?>

    <드레스를 만든 디자이너들이 가끔 욕심을 부려서 우리 귀족들을 웃음거리로 만들 때가 있지. 진짜 실크 천은 100cm에 50실버지만 진짜 실크 천처럼 보이는 건 100cm에 5실버 정도 한단다. 그러니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눈을 길러야 한단다.>

    그때는 드레스만 보고 어떤 디자이너인지 구분만 하면 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모르면 당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세상에 많았다.

    “이 천이 50실버라니…….”

    디자이너들보다 혹독하게 천에 관한 재질 공부와 유명 디자이너들의 패턴을 익힌 메이아였다.

    만져 보는 것만으로도 이 천이 어떠한 천인지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옷감 천이 1마에 50실버라니 이건 폭리가 심한 정도가 아니라 날강도 수준이다.

    카르펜 제국에서도 1마에 5실버에도 채 안 되게 거래되는 옷감이다.

    “제가 알고 있는 지식이라면 이 천은 절대 50실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잘 모르시는 분이라면 분명 50실짜리처럼 고급 실크 천처럼 느껴지겠지만 그런 게 아니에요.”

    “하지만 옷 재질이 분명…….”

    “드레스로 만드는 실크 천의 경우 가볍고 질긴 반면 흡수력과 보온성이 훌륭하죠. 실용적이면서도 광택이 나는 게 큰 특징이고요. 지금 한나가 입고 있는 옷감의 재질 또한 비슷한 재질이라 육안으로 봐도 구분이 어려울 수 있어요.”

    한나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만들어 입은 옷감들이 전부 실크 천이 아니라는 겁니까? 공녀님.”

    메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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