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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45화 (45/163)
  • 45화

    어느 정도 산책을 하고 다시 저택으로 들어가려고 입구 쪽으로 퀴니와 걸어가고 있었다.

    “어? 테오도르 대공님이네.”

    “허허.”

    “봐봐. 정말 귀엽지 않아?”

    정원 입구에서 커다란 도시락 바구니를 들고 테오도르가 다가오고 있었다.

    메이아 코앞까지 달려온 테오도르는 기대에 찬 눈빛을 가지고 조심스레 말했다.

    “맛있는 딸기 케이크와 딸기에이드를 싸 왔습니다. 함께 드셔 주시겠습니까?”

    메이아는 제일 좋아하는 먹을거리를 들고 온 그를 거절하지 않았다.

    “테오도르 대공님, 이거 드셔 보세요.”

    “예.”

    테오도르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친 메이아의 눈이 곱게 휘어지며 자신을 보고 웃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면 부끄럽고 피하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을 집요하게 쳐다봐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기 케이크가 너무 달지도 않고 느끼하지 않고, 적당히 담백하면서 맛있네요.”

    메이아는 입술에 짙은 호선을 그리며 즐거워했다. 테오도르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웃고 있는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리고 케이크를 맛있게 먹는 그녀 모습에 달콤한 만족감이 올라와 가슴을 간지럽혔다.

    “파티시에에게 보너스를 줘야겠습니다.”

    “테오도르 대공님은 아랫사람을 참 아끼시는군요.”

    “네. 절 위해서 일해 주는 이들이니 저도 잘해 줘야죠.”

    대공저에 있으면서 느낀 점은 사용인들이 하나같이 그를 칭찬한다는 거다.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지만 그는 배려심이 많고 다정했다.

    “훌륭한 마음이세요.”

    마음이 몽실몽실해지며 따뜻한 감각이 테오도르의 비어 있던 심장을 채워 주었다.

    “기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퀴니는 캔버스와 붓을 들고 메이아와 테오도르에게서 적당히 거리를 두어 자리를 잡았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을 향해 오른 눈은 감고 왼쪽 눈만 뜬 채 바라보며 양손의 엄지와 검지로 그림의 각도를 재었다. 피사체들이 훌륭해 좋은 그림이 그려질 것 같아 퀴니는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두 분 이대로 있어 주시겠습니까?”

    “그림 그리게? 퀴니.”

    “예. 지금 딱 좋습니다.”

    두 사람이 마주 보며 환하게 웃는 모습에서 강한 영감을 얻은 퀴니는 캔버스 앞에 섰다.

    “두 분, 조금 붙어 앉아 주세요.”

    그 순간, 테오도르의 머릿속에 퀴니에게 보너스를 잔뜩 안겨 줘야겠다는 생각이 입력되었다.

    “퀴니는 영감이 떠오르면 붓을 잡거든요. 멋진 그림이 나올 거예요. 제 옆으로 오세요, 테오도르 대공님.”

    테오도르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메이아가 자신의 옆으로 오라고 하다니!

    베나블의 말은 사실이었다. 꿈은 역시 반대였다!

    테오도르는 메이아의 옆으로 조심조심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얼굴부터 목덜미와 귀까지 점점 사과처럼 빨개지며 자꾸만 두근거리는 가슴 때문에 속으로 열심히 심호흡했다.

    이렇게나 가까이 붙어 앉게 되다니! 온몸이 뜨겁게 끓어오르고 목이 탔다.

    긴장하고 있는 테오도르를 보며 퀴니는 씩 웃으며 말했다.

    “좀 더 붙어 주십시오!”

    당황하며 부끄러워하는 테오도르의 옆모습을 흘겨본 메이아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가? 대공님 얼굴이 빨개지시네요. 그림 그리지 말고 들어갈까요?”

    테오도르는 고개를 좌우로 힘차게 붕붕 돌리며 말했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저.”

    “그저?”

    너무 떨리고 두근거려서 긴장했다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던 테오도르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푹 숙이자 퀴니가 외쳤다.

    “각하, 얼굴을 들어 주십시오! 움직이지 마십시오.”

    퀴니의 말에 테오도르는 용기를 가지고 고개를 들었다.

    “햇살 때문입니다. 전 햇살을 보면 열이 살짝…… 오르거든요.”

    “그러시군요.”

    테오도르는 미소 짓는 메이아의 모습에 다시 쿵 하고 내려앉는 심장의 달콤한 통증을 느꼈다.

    “퀴니, 빨리 그려 줘.”

    “알겠습니다.”

    바람에 흩날릴 때마다 메이아의 머리카락이 테오도르의 팔을 간지럽혔다. 간지럽다 하더라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니,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팔을 움직이면.’

    팔도 맞닿을 것 같았다. 좀 더 닿고 싶어 한다면 그건 욕심인 걸까?

    ‘조금만 용기를 내 볼까?’

    하지만 지금 이렇게 옆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튀어나올 것같이 아픈데?

    테오도르의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들이 복잡하게 엉켰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스케치가 완성된 퀴니는 메이아에게 손을 흔들었다.

    “스케치는 다 되었나 봐요. 퀴니가 저렇게 손을 흔들면 좋은 그림이 완성된다는 뜻이기도 해요.”

    “……네.”

    잔뜩 아쉬운 표정을 짓는 테오도르를 향해 메이아는 자신의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며 물어봤다.

    “얼굴에 흐른 땀 닦아 드려도 될까요?”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 지독한 악몽 때문에 불안하고 초조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테오도르는 메이아가 편하게 얼굴을 닦을 수 있도록 살짝 고개를 숙였다.

    “얼마든지.”

    메이아는 테오도르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손수건을 들고 그의 이마를 닦아 주었다.

    “테오도르 대공님은 제 말이라면 절대 거절하지 않으시네요.”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으니까요.”

    메이아의 푸른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의 검은 눈동자에도 분명 메이아의 모습이 한가득 차 있을 게 분명했다.

    시선을 마주하는 일이 꽤 부끄럽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마주하니 더 그러고 싶고 가까이 닿고 싶은 마음이 불쑥 일어났다.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어쩌지? 점점 그녀가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너무 짧았다.

    *

    쾅!

    테오도르는 분노하며 자신의 책상에 주먹을 내려쳤다.

    “진정하셔야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지셔야 합니다.”

    “대체 데이빗이란 사람이 누군데…….”

    이렇게 비참함을 안겨 주는 거란 말인가!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사람도 자신에게 비참함을 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방금까지 정원에서 있었던 일들이 테오도르의 머릿속에 반복 회상되며 괴롭히기 시작했다.

    퀴니 덕분에 메이아와 붙어 앉아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이 테오도르는 분명 좋았고,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퀴니의 단 한마디에 그 기분이 모조리 사라졌다.

    <이런 아름다운 풍경에 데이빗 님과 아가씨랑 함께 계셨더라면.>

    데이빗이라는 이름에 메이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는 걸 보았다.

    <그러네.>

    <아름다우신 데이빗 님이 보고 싶습니다.>

    퀴니는 말없이 웃었고, 메이아는 그리움 가득 찬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나도 그래, 퀴니. 보고 싶어.>

    메이아의 말에 테오도르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메이아에게 저런 표정을 짓게 하는 거지? 그리고 보고 싶다니.

    메이아의 그 표정. 그리고 그 말이 테오도르의 심장에 날카로운 창이 되어 박혔다.

    앞이 깜깜했다.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가라앉아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메이아의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데이빗이 아니라 자신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그녀는 데이빗이란 사람을 보고 싶어 했다.

    데이빗이란 사내를 추하게 질투할 수밖에 없었다.

    “각하, 진정하십시오. 곧 애튼이 데이빗이란 사람을 알아보고 보고를 올린다고 했습니다.”

    테오도르는 비틀거렸다.

    “괴로워. 베나블, 심장이 너무 아파.”

    테오도르는 자신의 왼쪽 가슴을 긁으며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주인님! 심장 쪽을 너무 자극하시면 안 됩니다!”

    그의 흔들리는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던 베나블은 괴로워하는 테오도르의 모습을 두 눈 뜨고 지켜봐야 한다는 현실에 앞이 막막했다.

    “주인님!”

    베나블은 자신의 주인인 테오도르가 지독한 상사병 때문에 발작하는 모습을 보는 게 너무나도 괴로웠다. 사람이 아프면 진통제를 먹고, 신성력으로 치유도 받을 수 있지만 상사병은 그 모든 게 통하지 않는다.

    분명 의원도 상사병은 낫지 고칠 수 없는 병이라 했다. 잠복 기간은 영원하고, 사랑하는 이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100% 낫는 병도 아니라 했다. 테오도르는 평생 불치의 상사병은 안고 살아가야만 했다.

    그래서 베나블은 매우 속상했다.

    “베나블, 누가 내 심장을 꺼내 주면 좋겠어. 너무 아파.”

    “그런 생각을 하시면 안 됩니다. 심장을 꺼내다니요! 그러시면 죽습니다! 차라리 제 목숨을 거두십시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베나블은 자신의 마법 이공간을 열었다. 아침에 퀴니에게 받은 새로운 메이아의 인물화를 테오도르에게 보여 주며 달래기 시작했다.

    “열한 살 여름날 호수 앞에서 딸기 차를 마시고 있는 공녀님이십니다.”

    평소 같으면 메이아의 인물화를 보고 방긋방긋 웃으며 액자를 품에 품어야 할 테오도르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공작저 안에 있는 호수인데 다 함께 소풍을 갈 때 그린 거라 했습니다.”

    “정말 예쁘다. 나도 공녀님하고 호수로 소풍 가고 싶다.”

    테오도르는 수심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슬픈 손짓으로 베나블이 들고 있는 액자를 자신의 품에 끌어와 소중히 안았다.

    “아픈데 좋아.”

    그녀의 초상화가 끼워진 액자를 품에 품고 그대로 고개를 숙인 뒤 눈을 감은 테오도르는 계속 끙끙거리며 괴로워했다. 보고 있는 베나블도 그의 고통이 전달되는 것 같았다.

    “베나블, 너무 아파서 그런데 나 이대로 죽는 건 아니겠지.”

    “그런 소리 하시면 이 늙은 집사는 괴롭습니다.”

    “그녀가 그리워하는 대상이 나였으면 좋겠어.”

    “주인님…….”

    “난 메이아 공녀님을 인물화만으로라도 보고 있으면 좋아. 이렇게 아파도 좋아. 미치도록.”

    “이 베나블, 제 목숨을 다해서 꼭 데이빗이란 사람을 없애 버리겠습니다. 그러니 주인님, 제발 정신을 차려 주십시오. 제가 꼭 다 없애 버릴 겁니다.”

    베나블은 절대 데이빗이란 자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데이빗이란 자보다 더욱 아름다워질 수 있도록 제가 주인님의 미모 관리를 더욱 잘하겠습니다. 제발 정신 차려 주십시오!”

    힘없이 쓰러져 있는 그를 바라볼수록 베나블의 애는 타들어만 갔다.

    “주인님, 정신 차리고 일어나 주십시오.”

    늙은 집사의 눈가가 점점 붉어져 갔다. 눈물을 안 흘리려고 고개를 젖히며 눈을 깜박였다.

    아픈 심장을 부여잡으며 힘겨워하는 테오도르의 모습에 베나블은 참지 못하고 순식간에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열심히 그를 간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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