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쥬안은 늦은 밤에 홀로 좁은 독방에 갇힌 아그니타를 찾아왔다.
독방은 사람 한 명 누울 수 있는 공간으로, 이불 한 장 없었다.
쥬안은 쓰러져 누워 있는 자신의 여동생을 가엾게 쳐다보며 말했다.
“아그니타, 괜찮은 거야?”
아그니타는 해고를 당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메릴의 신경을 건드렸다. 일부러 냉랭하게 단답형으로 대답했고 속 긁는 말과 말대꾸까지 했다. 일부러 실수도 잔뜩 했다. 그럴 때마다 메릴은 매질만 할 뿐이지 절대 해고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메릴의 속을 긁어 대고 하고 싶은 말을 조금씩 하니 기분은 좋았다.
“왜 날 안 놔 주는 걸까?”
다른 사용인들은 잘도 해고하면서 왜 자신은 해고를 안 하는 걸까!
원래 해고라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건가?
“날 왜 해고하지 않는 거지?”
쥬안은 그림자 속에서 아그니타가 얼마나 최선을 다해 메릴 속을 긁어 대고 실수했는지 지켜봤다. 분명 해고되고도 남을 테지만 메릴은 동생에게 꼭 화풀이라도 하는 것처럼 매질을 하고 오히려 독방에 가뒀다.
“넌 해고 당하기 어려울 것 같다.”
“왜?”
“넌 이렇게 맞더라도 공작저에서 버틸 사람이라는 걸 아니까 그러는 거잖아. 그만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라는 거, 하츠벨루아 공작저에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아그니타도 분명 자신이 해고당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쥬안의 말에 수긍했다.
독방에서 쫄쫄 굶고 지낼 아그니타 생각에 쥬안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노골적으로 눈살을 찡그리며 한숨만 쉬었다.
“이거 받아.”
쥬안은 자신의 마법 이공간을 열어 묵직한 가방 하나를 아그니타에게 건넸다.
“뭐야?”
“아가씨가 주신 마법 가방이야. 여기에 음식과 물이 들어 있어. 갈아입을 옷을 비롯해 필요한 건 다 들어 있어.”
“응.”
가방을 건네받은 아그니타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오빠.”
쥬안은 다시 마법 이공간을 열어 음식이 든 바구니를 꺼냈다.
몇 끼나 굶은 채 매질을 당했던 아그니타는 음식을 보고 정신없이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쥬안이 씁쓸하게 쳐다봤다.
쥬안은 품에서 연고를 꺼내 상처 난 그녀의 얼굴에 발라 줬다.
“천천히 먹어. 우유도 마시면서……. 체할라…….”
마음 같아서 상처에 신성력이 담긴 성수를 뿌려 주고 싶지만 상처가 금방 나으면 또 메릴이 수상하게 여길 수 있다. 그러니 해 줄 수 있는 건 연고를 발라 주는 일뿐이었다.
아그니타는 쉬지 않고 입에 음식을 넣으며 쥬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스러운 시선을 담은 채 아그니타를 바라보던 쥬안은 비어 가는 바구니를 챙기며 일어섰다.
계속 매질 당하는 여동생을 보는 게 그리 유쾌하지 않다. 혹시나 지금의 명령이 너무 힘들면 탈출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아그니타는 꿋꿋했다.
“곧 다시 올 테니깐 잘 버티고 있어.”
“그래.”
쥬안이 챙겨 준 음식을 먹고 배가 부른 아그니타는 기분 좋은 듯 웃었다.
“오빠.”
“응?”
“나 해고당할 수 있을까?”
“아그니타, 걱정하지 마. 꼭 해고당할 수 있을 거야. 만약 해고가 안 된다면 다른 방법을 찾자.”
“오빠……, 아가씨한테 전해 줘. 만에 하나 해고 못 당하면 이 아그니타는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고?”
“사고 치겠다고.”
쥬안은 피식 웃어 주곤 아그니타에게 말했다.
“사고를 치더라도 아가씨에게 폐 끼치지 마.”
“당연한 거 아니야?”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그니타의 독방 처벌은 끝나지 않았다.
메릴은 계속 매질을 하고 조금의 물과 빵만 챙겨 주라고 명령한 뒤 아그니타를 독방에 가두었다.
감옥 죄수도 저런 취급은 받지 않겠다며 아그니타를 옆에서 보는 사용인들은 메릴의 잔혹한 성정에 혀를 내둘렀다. 더 이상 아그니타는 참을 수가 없었다.
“당당하게 해고돼서 나가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네.”
아그니타는 자리에 털고 일어나 마법 가방의 음식들을 모조리 먹은 뒤에 ‘끅’ 하고 트림했다.
자신의 몸을 살펴보며 아직 굳지 않은 피가 있는지 요리조리 찾았다.
“피가 다 굳어서 쓸 수가 없네. 어쩔 수 없다.”
가방 속에서 날이 잘 선 나이프를 하나 꺼낸 아그니타는 손가락 끝을 살짝 베었다.
피가 뚝뚝 흐르는 걸 확인한 뒤 그걸로 독방 벽면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안녕.]
아그니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손가락을 쪽쪽 빨아 피를 멎게 한 뒤, 메이드복을 벗어 던지고 바지로 갈아입었다.
그날 밤, 아그니타는 대놓고 공작저 탈출을 감행했다.
쾅!
아그니타는 문이란 문은 다 부쉈다. 소리를 듣고 쫓아온 기사들을 아그니타가 가볍게 제압했다.
“약해 빠져서는…… 쯧쯧.”
우르릉, 쾅!
문이 부서지고 무너지는 소리에 공작저 사람들은 모두 잠에서 깨어났다. 모두가 잠든 시각에 벌어진 일이라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공작저는 비상이 걸렸다. 다행히 공작저 내부에 침입한 흔적은 없었지만, 누군가 빠져나간 모습은 확실했다.
제압당한 기사들은 하나 같이 ‘아그니타’를 지목했다. 그리고 그녀가 갇혀 있던 독방의 문이 부서진 걸 확인했다.
공작저를 탈출한 아그니타를 사용인들은 욕하지 않았다.
다들 ‘아그니타가 오죽하면 탈출을 했을까?’라며 동정했다.
아그니타는 탈출을 하자마자 마법 가방 안에 있던 염색약을 꺼내 염색을 하고 붕대로 가슴을 감았다. 화장품으로 얼굴엔 주근깨를 잔뜩 그려 넣었다.
남자 복장으로 갈아입은 뒤 아그니타는 신속하게 마탑을 향해 가는 테일론 배를 가명으로 예약했다.
‘아가씨,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
테오도르는 아침 일찍 일어나 깨끗이 목욕을 한 뒤에 수증기 낀 뿌연 거울을 닦아 낸 후,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눈을 뜨자마자 메이아 생각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감미로운 심장의 통증과 밀려오는 설렘이 온몸을 차지했다.
“일어나셨습니까? 주인님.”
어느새 문을 열고 들어온 베나블은 테오도르에게 인사했다.
“메이아 공녀님은?”
메이아를 찾을 줄 알았다는 듯 베나블은 즉시 답했다.
“방에 계십니다.”
“낯선 곳인데 불편하지 않으셨을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대공비가 되실 메이아 공녀님의 방을 꾸미고 있습니다.”
테오도르는 메이아가 대공비가 될 거라는 말을 듣자 가슴에 뜨거운 만족과 행복감이 흐르는 듯했다.
현재 그녀는 대공가에 있다. 자신과 한 집에 있는 거다. 행복한 현실감 때문에 테오도르는 더더욱 메이아를 찾았다.
“빨리 보고 싶다.”
계약 약혼에 대한 이야기를 갑작스럽게 내놓았지만 내뱉은 말에 후회는 절대 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할까 말까 고민했었지만 아버지의 말을 떠올리며 용기를 내어 말했다.
<용기 있는 자만이 사랑을 얻을 수 있다.>
<우선 저지르고 보자.>
언제나 아버지는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과 희생을 했다는 걸 들어 잘 알고 있다.
어릴 때는 그 말의 뜻을 몰랐지만 지금은 그 누구보다 아버지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메이아의 답변은…….
<고민해 볼게요, 계약 약혼.>
100% 만족스러운 답변은 아니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 이 말은 즉, 약혼을 할 수도 있는 거다.
약혼만 하게 된다면 그 누구도 메이아를 건드릴 수가 없으며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안전히 보호해 줄 수가 있다. 그녀가 원한다면 무력으로라도 카르펜을 깔끔하게 밀어 버릴 것이다.
테오도르는 절로 나오는 콧노래와 함께 기지개를 쭉 켜면서 욕실로 들어갔다.
“간단하게 샤워와 세수만 할 거야.”
“안 됩니다, 주인님.”
테오도르는 빨리 씻고 나가 메이아를 만날 생각에 애가 탈 지경인데 베나블이 반대했다.
하지만 그의 집사는 유독 진지하고 날카롭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왜?”
“미모를 가꾸셔야 합니다. 벌써 잊으셨습니까? 데이빗이란 사내보다 더욱 아름다워지실 수 있도록 제가 최고의 미용 도구와 재료들을 손수 공수해 왔습니다. 아침 그리고 잠들기 전, 또한 잠들어 계실 때도 지금보다 아름다워지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러니 주인님께서도 요번만큼은 제 의견에 따라 주십시오.”
“잠시 잊고 있었어. 따를게, 베나블.”
“예.”
메이아가 온 이후부터 테오도르의 상사병은 눈에 띄게 좋아져 베나블은 한시름 놓는 동시에 만족스러웠다. 그렇다고 안심할 순 없다. 데이빗이란 사내를 이야기할 때 붉어진 메이아의 뺨이 위험하다는 신호를 보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모르겠지만 베나블은 각오했다.
30분 동안 정성 어린 마사지를 받은 테오도르는 거울에 비친 윤이 나는 얼굴에 감탄했다.
“대단한데?”
베나블은 그의 칭찬에 어깨에 힘을 줬다.
“오늘 어떤 옷을 입을까……. 머리는 왼쪽으로 넘길까? 베나블.”
베나블은 사랑에 빠진 제 주인이 뭘 입어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에 인자한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주인님은 뭘 입으셔도 잘 어울리시지만 오늘 공녀님께선 베이지색 드레스를 입으셨다고 시녀장 한나가 전해 주었습니다. 그에 어울리는 제복으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답을 해 주실까? 약혼 싫다고 하시면 어떡하지.”
특히 데이빗 때문에 안 되겠다며 거절하는 메이아의 모습을 상상을 했을 때 정말 온몸이 덜덜 떨리고 진정이 안 되었다.
“답변을 못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차분하게 대처하셔야 합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시면서 공녀님에게 여유를 주셔야 합니다. 사랑은 조바심을 낸다고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절대 급한 마음을 보이면 안 되십니다.”
테오도르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베나블에게 준비시킨 꽃다발을 들고 빠른 걸음으로 메이아를 찾아갔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바로 그녀가 보였다.
“메이아 공녀님!”
자신의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며 미소 짓는 메이아에 테오도르는 활짝 웃으며 빠르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