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메이아가 마탑으로 떠난 이후, 메릴은 아그니타에게 자주 손찌검했다.
어차피 사용인들은 맞아도 공녀인 자신에게 말 한마디도 못 하고 맞을 뿐이다. 그만두는 사용인들도 있지만 메릴은 아그니타가 메이아 때문에라도 이곳에서 버텨야 한다는 걸 잘 알기에 괴롭히고 화풀이로 써먹는 걸 그만둘 수 없었다.
다른 시녀들 같으면 한 대만 때려도 벌벌 떨고 무릎 꿇고 빌지만, 아그니타는 무덤덤하게 맞으며 단 한 번의 울음도 터뜨리지 않는다. 그 모습이 더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아그니타.”
“예.”
“너도 메이아 때문에 힘들었지? 걱정하지 마. 내가 널 잘 보살펴 줄 거야.”
아그니타는 입 안쪽을 세게 깨물어 피 맛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참아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그런 아그니타의 사정을 알 리가 없는 영식들은 저마다 메이아의 좋지 않은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메이아 공녀님이 없어서 그런지 공작저가 훤하고 좋습니다.”
그렇게 말한 영식은 공작저를 처음 방문한 사람이었다.
“메이아가 눈치가 조금 부족했지요. 그런 역량을 키워 줘야 했는데 제 탓이에요.”
아그니타는 부들거리는 손을 가리며 조용히 나가려고 했지만 메릴은 놓아 주지 않았다.
“아그니타, 내 옆에 있어.”
“……예.”
아그니타는 분노를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시녀는 주인의 말에 대답을 느리게 하는군요.”
“그건 제가 메이아가 아니라서 그럴 거예요. 저 아이는 메이아 전용 시녀였거든요. 제 말에 느리게 답하거나 저에게 웃어 주지 않아도 전 다 이해해요. 제가 약혼녀 자리 빼앗은 거라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메릴의 눈에선 눈물이 보이지 않았지만 흐느끼는 목소리에 토마스가 아그니타를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저 같으면 당장 때리고 쫓아냈을 겁니다.”
“안 돼요! 메이아가 저 시녀를 많이 아껴요. 저도 저 시녀를 보살펴 줘야 해요. 언젠간 저에게 마음을 열어 주리라 생각해요.”
토마스를 비롯해 그 자리에 있던 영식들은 계속 메이아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했고, 아그니타는 계속 그 이야기를 들으며 참아야만 했다.
입 안의 여린 살이 찢어지고 피가 고여 갔다.
영식들이 돌아간 뒤에 메릴은 방으로 아그니타를 불렀다.
“손님이 있는데도 네 표정이 너무 마음에 안 들어, 아그니타.”
“네.”
“메이아가 이리저리 치이는 거 보니 슬프고 화가 났니?”
“…….”
“또 대답 안 하지?”
“예.”
쫙!
대답과 동시에 메릴은 손을 번쩍 들고 아그니타의 뺨을 세게 내려쳤다. 뒤에서 메릴이 아그니타를 때리는 장면을 본 시녀들은 벌벌 떨었다.
“아니라고 대답을 해야지!”
뺨 맞은 방향으로 고개가 돌아가는 건 자신이 약하다는 걸 보여 주는 것만 같아 아그니타는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럴수록 목에 힘을 주고 정면을 바라봤다.
“독한 것.”
“네.”
“넌 썩었어.”
“네.”
“너 같은 건 없어져야 해.”
“네.”
짝.
“재수 없어.”
계속되는 손찌검으로 아그니타는 입 안에서 계속 피 맛이 느껴졌다. 그리고 아그니타는 자신을 때리는 메릴의 손을 보았다.
메릴의 손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그래도 무덤덤한 표정으로 있을 뿐이었다.
“내가 메이아를 죽여 버릴 거야.”
메이아를 죽인다는 말에 아그니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덤덤한 표정의 아그니타의 눈빛에 순간 살기가 올라왔다 사라졌다. 메릴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감히 날 노려보는 거야?”
짝.
“또 노려봐 봐.”
짝.
“너의 그 무표정한 얼굴 정말 재수 없어.”
“손 아프지 않으십니까? 메릴 공녀님. 때리려면 차라리 물건을 던지시거나 그래 주십시오. 맞아도 맞는 기분이 들어야지 아픈 표정이라도 짓죠. 얼굴 마사지 받는 것도 아니고.”
“뭐라고?”
짝.
아그니타의 왼쪽 볼이 잔뜩 부어올라 왔지만 아그니타는 표정 한 번 바꾸지 않았다.
“다 때리셨으면 가 봐도 될까요? 더 때리실 거면 때리세요. 다 맞고 나가겠습니다.”
메릴은 아그니타의 행동에 더 열이 받아 바닥에 계속 발을 굴리며 화를 냈다.
“아, 메릴 공녀님, 귀족 영애가 바닥에 발을 구르는 행동은 옳지 않습니다. 분명 메이아 아가씨가 계셨다면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메릴은 아그니타의 말에 발끈하며 주위에 있는 물건을 아그니타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날아오는 물건들을 피하지 않았던 아그니타는 결국 메릴이 던진 물건에 머리를 맞았고,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좀 세게 던져 주세요. 안 아픕니다.”
“정말 넌 독해……. 메이아는 이런 걸 어디서 주워 온 거야?”
“메이아 아가씨는 아름답고 총명하십니다.”
“뭐?”
“공작저 사용인들을 항상 가족같이 대해 주셨고 손찌검하지 않으십니다. 메릴 공녀님은 사용인들에게 손찌검하는 습관을 고치셔야 할 겁니다.”
“이, 이!”
“팔 힘 좀 기르세요.”
머리에서 흐르는 피도 닦지 않고 웃으며 말하는 아그니타는 계속 메릴의 신경을 긁었다.
“밖에 아무나 들어와!”
메릴의 비명과도 같은 부름에 문을 열고 들어온 두 명의 시녀는 피를 흘리며 서 있는 아그니타를 보고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당장 이 독한 것을 독방에 가둬 놓고 일주일 동안 밥도, 물도 주지 마!”
독방이라는 말에 아그니타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렇다고 제발 해고해 달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조금 참을 걸 생각이 들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화병으로 가슴이 터져 죽었을지도 모른다. 만약에 죽어야 된다면 메릴의 목을 닭 머리 자르듯 죽이고 죽을 거다. 남들은 가슴 속에 사직서를 품고 다닌다지만 아그니타는 칼을 품고 다닌다.
부축해 주려는 이들의 손을 거절하며 아그니타는 씩씩하게 방을 걸어 나갔다.
“아프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공작저에 독방이 있었습니까?”
“메릴 공녀님께서 만들었단다. 여기 수건으로 얼굴 좀 닦으렴.”
“고맙습니다.”
“괜찮은 거지?”
“안 괜찮습니다. 솔직히 해고당하고 싶습니다……. 힘듭니다.”
이야기를 들은 시녀는 아그니타의 말에 너무 놀란 나머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데 아가씨를 기다려야죠.”
아그니타는 어떻게 하면 메릴에게 엿을 먹이고 똥을 던질지 고민했다.
‘그나저나 독방이라니……. 해고라도 해 주면 좋으련만…….’
독방으로 향하는 아그니타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
아그니타가 독방에 갇히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
쥬안이 아그니타를 찾아왔었다. 그를 보자마자 아그니타는 할 말이 하나밖에 없었다.
<우리 메이아 아가씨는 잘 계시지?>
<하나 있는 오빠 안부는 안 궁금해?>
<오빠보다 아가씨가 더 중요한 거 모르면서 물어보는 거야? 오빠가 죽더라도 나는 살아갈 수 있지만 아가씨 손끝만 다쳐도 난 마음이 아파 죽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오빠는 죽어도 된다?>
쥬안이 섭섭하다는 눈빛을 보이자, 아그니타는 배시시 웃었다.
<오빠가 아가씨 대신 죽어도 되지만 평소에는 다치지 말고, 죽지도 말고.>
오랜만에 만난 남매는 서로 쳐다보며 가볍게 웃었다.
<그나저나 아그니타 훈련은 제대로 하고 있는 거지?>
<당연한 이야길 묻지 마. 잠은 안 자더라도 훈련은 열심히 하고 있어.>
쥬안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테이블 위에 있는 딸기 쿠키를 하나 집어 먹었다.
오도독, 오도독.
<오빠, 그거 내 간식이다. 먹으라고 안 했다.>
<네 간식 내 간식이 어디 있어. 먼저 먹는 사람 거지.>
어릴 때 분명 심약하고 약했던 여동생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간식 좀 먹는다고 오빠를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는 눈빛을 보라!
<넌 왜 이 시간에 오빠가 찾아왔는지 안 물어봐?>
아그니타는 팔짱을 끼며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가씨의 말씀을 전달하러 온 거 아니야? 그게 아니라면 오빠가 날 찾아올 리가 없지.>
<그래, 맞아. 아가씨가 널 데리고 오라고 하셨다.>
아그니타의 눈이 초롱초롱 빛내며 말했다.
<아가씨가? 나 우리 아가씨 너무 보고 싶어! 당장 짐을 싸면 되지?>
<그런데 그냥 나오지 말라고 하셨어. 공작저에서 해고당하고 오라 하셨어.>
아그니타는 큰 가방을 꺼내고 짐을 싸기 위해 움직이다 쥬안의 말에 잠시 행동을 멈추고 걱정스럽게 되물었다.
<하지만 해고당하면.>
해고당하는 건 매우 쉬운 일이다. 메릴의 신경을 박박 긁으면 되는 일이지만……. 해고당한 사용인들은 다시 공작저에 재취업이 안 된다. 아그니타는 그 부분이 걱정되었다.
<아가씨가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
쥬안의 말을 들은 아그니타는 다시 가방의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고가 된 이후에 아무도 모르게 머리를 검붉게 머리카락을 염색한 뒤 남장을 한 채로 마탑으로 가서 푸링 대마법사님을 만나면 돼.>
<알았어.>
<해고당해야 하는데 뭐가 그리 즐거워?>
<메릴 속을 박박 긁을 생각 하니깐 즐거워서.>
쥬안은 웃으며 신나게 짐을 싸고 있는 아그니타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그리고 아가씨에게 날파리가 붙었어.>
쥬안이 말하는 날파리는 남자를 뜻한다. 그것도 메이아에게 반한 남자들.
<요번 날파리는 보통 날파리가 아니야.>
가방의 짐을 싸던 아그니타의 손이 다시 멈췄다. 쥬안의 말에 그녀의 얼굴은 사정없이 구겨졌다. 메이아가 오라는 말을 듣고 기분 좋아 짐을 싸고 있는데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가씨는 어디에 계시는 거야?>
쥬안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침묵을 의아하게 여겼는지 아그니타는 쥬안에게 다가갔다.
<마탑에 계시는 게 아니지? 마탑에 계셨다면 나한테 마탑으로 오라는 말씀만 하셨을 텐데. 남장을 하고 푸링 님을 만나라고? 그리고 날파리는 또 어떤 놈이야!>
아그니타는 주먹을 불끈 쥐고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말해.>
쥬안은 아그니타에게 메이아에게 일어난 일을 짧고 간단히 설명했다.
<데미안 그놈이 감히…… 우리 아가씨한테.>
<아무튼 그래서 현재 아가씨는 날파리 집에서 안전하게 계시니…… 해고당해서 오도록 해. 유디 님이나 헬레나 님한테 날파리 이야기는 꺼내지 말고, 아가씨 부름 때문에 해고당해서 떠난다고만 언질만 드려.>
<알았어.>
<요번에 아가씨 곁으로 간다면 자는 시간 빼고 붙어 있을 수 있을 거야.>
<정말? 나 정말 해고당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
지령을 받은 아그니타는 본격적으로 해고당하기 위해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다방면으로 메릴의 신경을 건드려 대기 시작했다. 메릴은 분노하며 아그니타의 뺨을 때리고 물건을 던지며 매질했다.
평소보다 많이 맞았지만 괜찮았다. 빠른 해고를 당하기 위해서라면!
그렇지만 너무 메릴의 신경을 긁은 것 같았다. 아가씨 곁으로 가야 하는데.
독방 일주일이라니 어떻게 하면 해고당하지?!
메릴의 독방 일주일 외침에 아그니타의 무표정한 얼굴이 조금 깨져 버렸다.
‘아무래도 저 진드기 같은 게 날 놔 줄 생각이 없나 본데?’
난처함을 숨긴 채 아그니타는 독방에 갇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