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테오도르는 대공가로 돌아온 이후 하루하루가 조마조마했다.
마탑에 있는 메이아가 잘 있는지, 혹시 다른 남자들이 다가오는 건 아닌지.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어쩌지?
메이아 이외 다른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온통 그녀 생각뿐이다.
짧은 시간을 같이 있었을 뿐인데 그녀는 생각보다 자신의 마음을 많이 차지하고 있었다.
매일 커지는 마음에 점점 괴로워져만 갔다.
편지지를 보며 그 위에 그녀에 대한 마음을 잔뜩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워스트 말로는 상사병 말기라고 하는데, 난 죽는 걸까?
매일 그녀만 생각하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시한부 환자처럼 조마조마하게 지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까? 만약에 이 괴로움이 사라지지 않으면 어쩌지?
내 마음이 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거지?
그녀와 마주 보고 대화할 수 없는 현실에 지독히 아프고 괴로웠다.
눈물이 앞을 가려도 그녀의 모습이 선명하게 아른거렸다.
‘다시 한번 보고 싶어. 정말 보고 싶어.’
누군가 자신의 심장을 꺼내 치료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을 만큼 괴롭고, 마음속이 공허함이 가득 찼다.
“서류 한 장 보시고, 액자 보시다니, 대공 각하 일을 해 주십시오!”
“알았어, 애튼.”
바쁘더라도 책상 위 작은 초상화 액자를 바라보는 것마저도 메이아의 편지를 읽는 것처럼 매우 소중한 시간이다.
액자 안에서 미소 짓는 메이아를 볼 때마다 눈만 한 번 깜박였을 뿐인데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보고 싶습니다, 메이아 공녀님.”
그녀는 유일하게 자신의 시간을 멈추게 만드는 존재다.
이렇게 바라만 봐도 시간의 흐름을 전혀 느낄 수가 없으니 말이다.
하루 종일 침대 위에서 그녀의 액자를 쳐다만 보며 잠들고 싶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마법사를 다이아몬드 응접실로 보냈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
다이아몬드 응접실은 플로렌스 대공저에 방문하는 이들 중 아주 중요한 손님에게만 안내되는 응접실이다.
그냥 평범한 응접실로 보내도 되는데 갑자기 다이아몬드 응접실로 보낸 이유가 무엇일까?
‘방문한 손님이 나에게 중요한 손님이란 뜻일 텐데…….’
살짝 생각하던 테오도르의 검은 눈동자가 일순간 흔들렸다.
설마라는 달콤한 상상에 심장에 크게 쿵 하고 내려앉았다.
“베나블…….”
“다이아몬드 응접실로 모실 만큼 아주 중요한 손님입니다.”
“마탑에서 온 것만으로도 나는 기대하게 돼.”
베나블은 미소를 지으며 테오도르에게 말했다.
“기대하셔도 됩니다. 주인님.”
테오도르는 가장 좋은 제복으로 갈아입은 뒤에 다이아몬드 응접실까지 전력 질주를 했다.
“주인님, 뛰지 마십시오! 전쟁이 난 게 아니라면 뛰시는 건 예법에 어긋납니다.”
그의 뒤를 바짝 쫓아 따라오는 베나블의 말이 들렸지만 움직이는 자신의 몸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듣고 싶지 않았다.
당연히 뛰지 말아야 하지만 그 당연한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겼다.
다이아몬드 응접실 문 앞에서 멈춘 테오도르는 뒤따라온 베나블에게 머리와 옷이 흐트러졌는지 확인을 해 달라 했다. 뛰어오느라 살짝 흐트러진 그의 머리와 옷을 베나블은 꼼꼼히 정리했다.
“후…….”
“주인님, 긴장하지 마십시오.”
“심장이 너무 쿵쿵거려서 아파.”
아프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서는 오히려 생기가 넘쳐흐르다 못해 홍수가 날 것 같았다.
“웃으십시오, 주인님. 노크하겠습니다.”
비장한 모습으로 테오도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나블이 응접실 문을 똑똑하고 두들김과 동시에 테오도르는 얼굴에 한가득 미소를 지으며 문 안으로 쏙 들어갔다.
“아…….”
테오도르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달빛이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듯한 은발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리고 자기를 돌아본다.
정말 그녀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바다 같은 푸른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현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건 절대 꿈이면 안 될 일이다.
“꿈이 아니야.”
문을 열고 들어온 테오도르의 눈가는 금세 붉어지다 눈물이 흘렀다.
흘러내린 눈물이 느껴진 테오도르는 얼른 소매로 눈가의 물기를 훔쳤지만 이미 메이아가 다 봐 버렸다.
“언제나 눈물이 많으시네요.”
“네.”
“여전히 얼굴은 빨가네요.”
꿈이 아니야. 이건 꿈이 아니야. 현실이야.
테오도르는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다.
당장 가서 반갑다고 대공가에 잘 왔다면서 메이아를 힘껏 껴안아 들고 저택 여기저기를 뛰어다니고 싶은 벅찬 마음만 들 뿐이다.
“테오도르 대공님은 제가 온 게 마음에 안 드시나요?”
메이아의 말에 테오도르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다.
그녀가 대공가에 온 게 매우 좋아서 미칠 것만 같았다.
“왜 아무 말씀 없으세요? 저 안 반가우세요? 음…… 제가 온 게 싫으면 다시 마탑으로 돌아갈까요?”
돌아간다고? 이렇게 아픈 나를 두고?
매일 매일 그리워하고 보고 싶은 당신이 여기에 왔는데…… 돌아가겠다고?
테오도르는 고개를 들고 다급하면서도 간절한 표정으로 메이아에게 말했다.
“못 보내드립니다. 아니, 못 보내 드릴 것 같습니다.”
메이아는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자제하지 않았다.
“저도 갈 생각은 없어요.”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심장이 몽글거린다.
심장이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지만 그래도 테오도르는 좋았다.
메이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들어와 서 있는 테오도르에게 다가가 오른손을 올려 그의 왼쪽 뺨을 쓸며 걱정스레 말했다.
“안 본 사이에 왜 이렇게 야위었어요? 혈색도 나빠지시고 일이 많이 바쁘셨나 봐요.”
만약에 메이아를 다시 만난다면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다.
하지만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메이아가 자신의 뺨을 쓰다듬으며 걱정해 준다는 사실이 자신에게 더 중요했다.
테오도르는 자신의 얼굴을 좀 더 숙여 메이아의 손에 자신의 뺨이 깊숙이 닿을 수 있게 했다.
“전 괜찮습니다.”
‘당신이 와서 난 이젠 괜찮아요.’
“혈색이 너무 안 좋으신데.”
메이아는 못 본 사이에 지독히 남자다운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테오도르를 올려다보며 야윈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더욱 뺨을 비비는 테오도르의 얼굴에 감도는 뜨거운 열기에 손이 데일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그의 뺨에서 손을 떼기가 싫었다.
자신을 만난 테오도르의 얼굴은 다양한 표정을 보여 주었다.
슬퍼 보이는데 행복해 보였고, 웃는 얼굴이 아니라 간절해 보이며, 눈물을 흘렸지만 기뻐 보였다.
자신이 상상했던 얼굴이 아니었지만 이런 표정들도 꽤 마음에 들었다.
“잘 와 주셨습니다, 메이아 공녀님.”
“환영 감사해요, 테오도르 대공님.”
자꾸 자신을 보고 우는 이 남자. 만나면 어떠한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던 이 남자.
상상했던 표정과는 다르지만 확실한 건 메이아는 이 얼굴이 꽤 보고 싶었다.
시녀장 한나는 응접실에 각종 다과와 딸기 차를 준비해서 가져다주었다.
“음? 딸기 차네요?”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고마워요, 테오도르 대공님. 제가 딸기 좋아하시는 거 기억하고 계셨네요.”
칭찬의 말을 해 주면 테오도르는 항상 우물쭈물하는 표정을 지으며 눈동자를 굴린다.
그의 그러한 모습에 메이아는 미소 지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공녀님.”
“네?”
“마탑의 의뢰를 받고 오신 거라면 마탑의 마법사로 등록하신 겁니까?”
“네, 그래야만 할 이유가 생겨서 등록했어요.”
“이유요?”
테오도르의 궁금해하는 얼굴에 메이아는 솔직히 자신이 왜 왔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나을 것으로 판단하고 속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황자비가 되기 싫어서요.”
메이아를 보고 행복에 취해 있던 테오도르의 표정에 금이 갔다.
“지금 황자비라 하셨습니까?”
“네, 공작저에서 가족처럼 지내던 사용인이 편지를 보내 주었어요. 데미안 황자가 절 황자비로 맞이하기 위해 마탑으로 떠난다고요.”
마탑에서 편하게 지내고 있을 수도 있었지만 황자비가 되어 달라고 쫓아오는 황자를 피해 마법사 등록을 하고 의뢰를 받고 이곳으로 오다니!
물론 그녀가 온 건 무척 좋지만, 오게 된 사유를 들으니 화가 났다.
“전 데미안 황자를 만나는 게 무척 싫어요. 마탑에 숨어 있어도 되겠지만…… 데미안 황자는 제가 마탑에서 나오기 전까지 떠날 사람이 아니에요.”
테오도르는 들고 있는 찻잔에 절로 손힘이 들어갔다.
황가의 청혼서는 절대적일 테다. 공녀라 하더라도 황실 측에서 결혼을 밀어붙인다면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황자비가 돼야 하는 입장일 것이다.
싫은 사람을 피해 자신을 찾아온 그녀의 마음은 어땠을까? 분명 속상했을 거다.
테오도르는 상처 입은 얼굴로 찻잔을 응시했다. 메이아를 바라보면 또 눈물이 나올 것 같아 한 행동이었다. 심장이 너무 아파 왔다. 입 안을 계속 깨물며 아픔을 참아 보았다.
마음 같아선 카르펜 제국을 지도에서 지워 버리면 속이 시원할 것 같다.
하지만 메이아가 대공가로 왔다는 것은 자신의 보호가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카르펜 제국을 지우고 새로 만든 지도를 예쁘게 포장해서 그녀에게 선물해 주면 좋을 것 같지만 사랑하는 여자의 고향이니 그녀가 원할 때 지도에서 지우면 되겠다고 생각하며 메이아를 응시했다.
“제가 꼭 지켜 드리겠습니다, 메이아 공녀님.”
말하는 테오도르의 얼굴을 메이아는 지그시 바라봤다.
‘그래, 이 얼굴이야.’
메이아는 그의 찌푸린 미간 사이에 보이는 검은 눈동자 속 슬픔이 더 애절해지면서, 얼굴에 초조함이 번지는 것을 보고 싶었다.
“데미안 황자는 날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그는 제가 황태자 약혼녀일 때에도 집착했어요. 전 그 집착이 정말 싫어요.”
아마 자신이 혼자면 혼자인 대로 집착할 것이고, 다른 사람과 약혼이나 결혼을 하게 된다면 이 역시 데미안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데미안은 자신의 지위를 내세워 어떻게서든 짓밟을 것이다.
하지만 황태자 약혼녀 자리와 맞바꾼 ‘자유 결혼서’가 있다.
그 계약서를 신전에 공증했다. 본인도, 루만도 꼭 지켜야만 하는 계약이었다.
덕분에 결혼이란 선택일 뿐이다. 5년 뒤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때쯤이면 루만을 쫓아내고 공작 자리에 앉으면 그만이다.
메이아는 희미하게 웃으며 딸기 차의 향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