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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37화 (37/163)

37화

“공작저에 암살자라…….”

파츠래리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에 손을 댔다.

“데미안이 보낸 건가?”

그때였다.

“아그니타! 그분은 황태자 전하시다! 살기를 거둬!”

익숙한 목소리에 파츠래리는 긴장을 풀었다.

“이 목소리는 유디인가?”

파츠래리가 메이아의 유모 유디의 목소리를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자신과 메이아를 잘 돌본 사용인이니 말이다.

“황태자 전하, 태양의 고결함이 언제나 곁에 있으시길.”

파츠래리 앞에 있던 아그니타 또한 고개 숙이며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황태자 전하. 아가씨 방 앞에 모르는 분이 서 계셔서 경계하게 되었습니다.”

“괜찮다. 유디……, 메이아가 정말 마탑으로 떠난 게 맞나 보군…….”

“네, 떠나셨습니다.”

“유디도 나에게 실망했겠지.”

“아닙니다.”

“왜 아니겠어. 메이아가 힘들 때 내가 손을 놔 버렸는데 원망 안 해?”

유디는 상냥하게 웃으며 조곤조곤 말했다.

“어차피 정략혼입니다. 파혼이란 건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아가씨가 이해한 파혼을 제가 반문할 리가 있겠습니까?”

유디는 돌려 말했지만, 뜻은 확실했다.

“황태자 전하,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유디는 메이아 방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더니 편지를 한 장을 파츠래리에게 건넸다.

“아가씨가 파츠래리 황태자 전하께서 전해 달라고 하신 편지입니다.”

사실 파츠래리는 파혼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엘르민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던 자신을 메이아가 이해해 주었으면 했다.

유디에게서 편지를 받은 파츠래리는 조심스럽게 편지 봉투를 열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은은한 백합 향이 편지에도 풍기는 것 같았다.

[파츠래리 폰 마브로 황태자 전하께.

저에게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모든 일을 받아들였습니다.

어릴 때 황후가 되기 위한 교육들처럼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이었지만 배워야만 했던 것처럼 말이죠.

무언가를 붙잡기 위해선 힘이 필요한 것처럼, 그 무언가를 놓아 주기 위해서도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언제나 건강하세요.

메이아 하츠벨루아.]

편지를 들고 있던 파츠래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메이아…….”

편지의 내용은 황태자인 자신을 붙잡을 수 없는 그녀의 처지를 알려 주었다.

“파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

루만이 데미안과 메릴을 결혼시킨다는 말에 불안해진 황후 엘르민은 황태자 자리를 지키기 위해 메이아와의 파혼을 추진했다. 파츠래리 역시 어차피 가문의 힘만 필요로 했으니 받아들였다.

너무 가벼운 선택이었다. 조금만 생각을 달리했었다면 하츠벨루아 공작가의 힘과 메이아 둘 다 놓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유디, 편지를 줘서 고마워.”

유디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솔직히 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녀와 파혼 전으로 돌아간다면 지금 같은 상황은 만들지 않았을 거야.”

편지를 읽고 난 뒤에 아쉬움이 한가득 보이는 파츠래리의 모습을 본 유디는 속으로 어이없어했다.

메이아와 파혼할 때 직접 얼굴을 보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루만을 통해 일방적으로 통보했다는 점에서 이미 유디가 보기에 파츠래리는 책임감 없는 남자일 뿐이었다.

“아가씨는 떠나셨습니다.”

“하지만 성인식 날에 돌아오지.”

파츠래리는 메이아의 편지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본 유디는 속으로 파츠래리의 얼굴에 욕 한 바가지를 쏟아 내는 상상을 하며 입을 열었다.

“전하, 이미 흘러간 강물은 흘러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습니다.”

유디의 말이 무슨 뜻인지 파츠래리는 모르지 않았다.

메이아는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뜻.

“물길은 돌리면 되는 일이지.”

유디는 올곧게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 늙은 유모가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유디라면 얼마든지 해도 좋아.”

“흘러가는 물을 막을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물길을 돌린다고요? 이미 물은 바다로 흘러갔을 텐데요. 지금 전하께서 하셔야 할 것은 흘러가는 물을 아름답게 지켜보는 것입니다.”

“물이 더는 바다로 흘러가지 못하게 막을 거야. 그리고 물길을 다시 있었던 곳으로 흐르게 하면 되지.”

“만에 하나 흘러가는 물을 흘러가지 못하게 막는다면 결국 썩기 마련입니다.”

유디의 눈빛에서는 평소의 부드러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날 원망해도 괜찮아. 하지만 나는 메이아를 다시 내 황후로 만들 생각이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 가문에서 황후와 후궁이 나오는 일은 흔한 일이야.”

이번에 메릴의 일로 메이아의 사교계 부재를 뼈저리게 느낀 파츠래리였다. 그건 황후 엘르민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메이아를 후궁으로 입궁을 시키면 모든 게 해결될 일이다.

“물론, 지금은 메릴 공녀가 황태자비가 되고 황후가 되겠지만 적당한 때를 봐서 나는 메이아를 후궁에서 황후로 올릴 생각이야. 그녀만큼 황후에 어울리는 여자는 카르펜 제국에 없어.”

사교계에서의 그녀의 위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게 된 시점에서 메이아를 후궁이든, 황후든 어떻게서든 다시 되돌아오게 해야 한다.

“일방적인 파혼 이후 아가씨에겐 황후가 되기 위해 했던 노력이 더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냉정하게 말하는 유디에게 파츠래리는 참지 못하고 외쳤다.

“그 노력은 내 곁에서 꽃 피울 테니 걱정하지 말게, 유디.”

유디는 화가 났다. 한 가문에서 황후와 후궁을 배출하는 일은 흔한 일이다. 그렇지만 루만이 과연 허락할 것인가? 메이아가 후궁이 된다면 루만은 앞에서 웃으면서 그렇게 하자 말한 뒤에 뒤에서는 쥐도 새도 모르게 메이아를 죽이고도 남을 거다.

“그녀가 황후가 된다는 건 변함이 없을 거야. 그러니 노력했던 모든 날들은 절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야.”

유디는 더는 파츠래리와 대화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다. 답을 정해 놓고 말하니 무슨 말이 통하겠는가!

“바로 잡고 싶으시다면 공작가의 힘이 없어도 될 만큼의 힘을 키워 주십시오.”

파츠래리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유디와 아그니타에게 등을 돌려 들어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나갔다.

아그니타는 그런 파츠래리를 한심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

“공녀님, 도착하시면 편지 한 통 보내 주십시오.”

“알겠어요, 스승님. 마탑에서 잘 있다 갑니다.”

“공녀님, 잊지 마십시오. 언제나 마탑은 마법사를 보호해 준다는 사실을요.”

푸링은 자신의 애제자인 메이아에게 플로렌스 대공가의 의뢰를 수락했다는 문서를 건넸다.

“도착하시자마자 대공 각하께 이 수락 증명서를 보여 주십시오.”

“알겠어요, 스승님. 들어가세요. 그리고 데미안 황자가 오면.”

“말씀 더 안 하셔도 이 늙은이가 잘 처리한 뒤에 편지를 보내겠습니다.”

“고마워요. 스승님 곁에 좀 더 오래 있고 싶었는데 안타깝네요.”

“그게 공녀님 탓입니까! 망할 황자 탓이지!”

푸링은 중얼거리며 데미안에 대한 불만을 꺼냈다.

“스승님, 황족 모독죄예요. 조심하세요.”

“모독죄로 죽어도 괜찮습니다. 이 스승은 살 만큼 살아서 두려운 게 없어요.”

메이아는 푸링과 아쉬운 이별을 한 뒤, 쥬안을 데리고 텔레포트 하는 곳에 도착했다.

녹색 로브를 입은 빨간 머리의 주근깨가 무척 귀여운 남자 마법사는 메이아의 가슴에 달린 마탑의 마법사 브로치를 보자마자 격하게 환영해 주었다.

“안녕하십니까. 아! 마탑의 마법사시군요. 마탑의 마법사는 텔레포트 비용이 무료입니다.”

“저 말고 일행이 한 명 더 있어요.”

메이아 뒤에 서 있던 쥬안이 고개를 살짝만 까딱이며 빨간 머리의 남자 마법사에게 가볍게 눈인사만 했다.

“그러면 이분까지 무료로 해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쥬안, 가자.”

“네, 아가씨.”

“좌표는 어디로 하시겠습니까?”

“시리우스 제국의 플로렌스 대공령.”

“알겠습니다.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아름다운 마법사님.”

그리고 메이아가 떠난 그 뒤에 카르펜 제국 페르젠 후작가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마커스가 마탑에 도착했다.

그는 텔레포트를 이용해 테일론에 있는 마탑에 당도했던 것이다.

마커스는 원래는 마탑까지 올 생각은 없었지만 메이아에게 마음을 가득 담은 연서와 든든한 집안의 지원을 받아 산 값비싼 선물을 보내도 자꾸 반송되자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가 있는 마탑까지 찾아온 것이다.

만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그렇다고 두 손 놓고 카르펜에만 있을 수 없었다.

마탑을 오기 전 가문 대 가문으로 청혼서를 넣었지만 거절까지 당하니 입 안이 바짝 타들어 갔다.

<너무 많은 약혼서와 청혼서가 와서 공작가에선 모두 다 거절하기로 하셨습니다. 황가도 예외가 아닙니다.>

경쟁자들이 많을 거라 예상했지만 황가의 청혼서까지 거절을 하다니…….

소문으로는 루만 공작이 다이아몬드 광산 다섯 개를 준다는 제안까지 거절했다 한다. 그렇다면 메이아를 직접 유혹해야만 경쟁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그녀를 차지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

그리고 8일 뒤 마커스는 테일론으로 텔레포트 했고, 마탑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마커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아주 꽤 괜찮은 계획이었다.

그녀를 유혹할 자신도 있었다.

먼발치에서만 바라보던 그녀를 이젠 마주 보며 이야기할 수 있다는 현실은 꿈이 아니었다.

메이아와 결혼할 수 있을 거란 미래지향적 생각이 마커스를 엄청나게 흥분시켰다.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콧노래는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마탑 앞에서 데미안 황자와 마주쳤기 때문이다.

“아니, 데미안 황자님?”

사교계에 메이아를 황자비로 맞이할 거라고 떠드는 데미안 폰 마브로 황자와 마주친 마커스는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도 평정심을 가지고 인사해야만 하는 을의 입장이었다.

“데미안 황자님, 여기서 다 뵙는군요.”

“페르젠 영식 아닌가? 아니, 이젠 소후작인가?”

서로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네, 소후작이 되었습니다. 황자님께선 테일론에 어쩐 일이십니까?”

마커스의 질문에 데미안은 눈을 반짝이며 답해 주었다.

“메이아 공녀에게 청혼하려고 왔지.”

마커스는 불편한 마음을 숨기고 데미안에게 이야기했다.

“이런, 저도 마침 메이아 공녀님에게 프러포즈하러 가는 길인데 같이 가시죠, 황자님.”

“영식은 참 뻔뻔하군.”

“이왕이면 얼굴이 두껍다고 해 주시겠습니까?”

마커스와 데미안의 눈빛은 다시 한번 허공에서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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