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메이아는 플로렌스 대공가의 의뢰를 받기로 마음먹었지만 혹여나 더 나은 마법 의뢰가 있을지 몰라 마탑에 들어온 의뢰서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마탑에 있는 동안 테오도르가 몹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롱초롱한 검은 눈망울로 자신을 졸졸 쫓아다니며 활짝 웃는 테오도르가 머릿속에서 반복적으로 떠올랐다. 그의 눈빛은 총기로 반짝이고 말 한마디에는 언제나 진심이 느껴진다.
“준비 다 하셨습니까? 공녀님.”
“네, 스승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탑에서는 마법사의 위치를 함부로 알려 주지 않습니다. 특히 의뢰 나간 마법사를 찾을 수는 없답니다.”
의지를 가진 마탑은 마법사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한다.
그러니 찾으려는 마법사가 어디 간지는 전혀 알 수 없다. 만약 마탑으로 데미안 황자가 오더라도 이곳에 없다는 걸 확인하고 돌아갈 것이다.
텔레포트 사용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물론 돈을 더 많이 주면 순서를 바꿀 수는 있지만 돈 때문에 시간을 버리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카르펜 제국에서 마탑으로 오기 위해서는 평균 일주일의 시간이 걸린다.
누가 순서를 양보해 주지 않는 이상 말이다.
메이아는 쥬안을 불렀다.
“쥬안.”
그림자가 일렁거리고 쥬안이 나타났다.
“네.”
“나는 플로렌스 대공령으로 갈 거야.”
메이아는 쥬안이 테오도르를 마음에 안 들어 한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메이아는 왼손으로 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대공가로 가는 게 싫다면 공작가로 돌아가도 괜찮아. 아그니타가 걱정되지?”
쥬안을 자리에 일어서며 말했다.
“제 여동생은 아가씨가 구해 주신 이후에 건강해지고 강해졌습니다. 그러니 걱정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가씨 곁을 지키는 게 제 일입니다.”
“내가 왜 이런 말 하는지 알지?”
“예.”
테오도르는 메이아의 허락도 없이 한 번 껴안은 전적이 있었다.
그것만 생각하면 쥬안은 그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메이아가 플로렌스령에 안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아가씨가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신다면 저는 지나가시는 그 길 위에 카펫을 깔아 드려 편히 가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 사명입니다.”
쥬안의 충성스러운 답변에 메이아는 활짝 웃었다.
“맞아. 너도, 아그니타도 모두 나에게 가족이란 걸 잊지 마.”
“하지만 플로렌스 대공은 좀 음흉해 보입니다. 갑자기 아가씨를 껴안기도 하고 눈빛도 그렇고.”
“기분 나쁘지 않았어.”
“알겠습니다. 아가씨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하지만 다시 한번 아가씨 허락 없이…….”
“쥬안.”
“네.”
“너무 앞서가는 말도 하지 말고 이런 건 내가 알아서 할 부분이야. 아무리 가족 같은 사이라 하지만 직언의 경계선이라는 게 있어.”
메이아의 말에 쥬안은 당황하며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주제넘었습니다.”
“네가 왜 그러는지 알아. 내가 너무 걱정돼서 그런 거라는 거.”
쥬안은 더욱 몸을 굽히며 메이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는 절대 내가 싫다는 일을 강요할 사람이 아니야. 만에 하나 그런 사람이라면 난 식사조차도 같이하지 않았을 거야.”
“알겠습니다.”
*
황태자 파츠래리는 요즘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유는 바로 자신의 약혼녀 메릴 때문이다.
시시콜콜 자기 일에 참견은 기본이요, 매일 찾아와 차를 마시자며 업무를 방해하기 일쑤였다.
무엇보다 대화 코드도 맞지 않았다. 기본적인 수학 암산도 못 한다.
<후계만 잘 낳아 드릴게요.>
메릴이 생각하는 건 그게 전부였다.
메이아와 있을 때는 정치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대화가 잘 통했지만, 메릴은 도저히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입을 다물게 되고 그런 자신에게 투정을 부리는 메릴을 달래느라 진을 빼기도 했다.
이 모든 건 다 견딜 수 있었다. 그렇지만 파츠래리가 차마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거였다.
“약혼녀분께서 저희 딸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아십니까?”
“말해 보게, 루이엘 백작.”
“저희 딸 티 파티에서 딸이 아끼는 사용인 머리에 뜨거운 차를 부어서 화상을 입혔습니다. 그건 제가 참을 만하지만 제 딸 아이가 그걸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거죠. 네, 전하의 약혼녀 메릴 하츠벨루아 덕분에 말이죠.”
류이엘 백작은 치아를 부득부득 갈며 파츠래리에게 말했다.
옆에 있던 리히터 자작도 한마디 했다.
“류이엘 백작 영애의 사용인은 화상이군요. 우리 집은 전하의 약혼녀께서 하녀의 뺨을 때렸고 그걸 본 저희 딸은 놀라서 한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거 보고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는지.”
“흥, 저희는 정원사가 뺨을 맞았습니다. 장미 가시 관리를 하지 않아서 찔렀다면서 말이죠.”
“페르젠 후작 영애한테는 욕까지 했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문 대 가문으로 사과를 요청했는데도, 사과 한번 없다더군요.”
“그래서 이 자리에 페르젠 후작이 안 온 겁니까?”
황태자를 지지하는 세력 중심에 있는 귀족들과의 모임에서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 대부분은 메릴에 대한 것들뿐이었다.
그것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 좋지 않은 이야기들이었다.
구블러 백작이 파츠래리에게 말했다.
“제가 진정으로 말하겠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약혼녀 단속을 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약혼녀분을 더는 티 파티라든가 다른 행사에 초대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제 부인이 애정을 가지고 가꾼 저택과 정원을 보고 구닥다리라고 하는데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또 초대하겠습니까?”
“저희 집 딸은 메릴 공녀만 보면 벌벌 떨어서 초대를 못 할 것 같습니다.”
“전 딸은 없지만, 메릴 공녀가 제 부인에게 한 언행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딸이 없어도, 또 딸 가진 아버지들은 대부분 분노를 담아 말했고, 파츠래리는 고스란히 그걸 느껴야만 했다.
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가고 식은땀이 흘렀다.
그뿐만 아니었다. 황후가 메릴을 데리고 다시금 티 파티를 하려고 할 때 구블러 백작이 대표로 와서 폭탄 발언을 터뜨렸다.
“다른 분들 의견을 받고 대표로 왔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평소에 초대하시던 영애들과 부인들 모두 메릴 공녀가 참석하는 티 파티를 거부하겠다 합니다.”
구블러 백작의 이야기를 듣던 황후는 자리에 일어섰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아십니까!”
“알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황후 마마, 메릴 공녀를 잘 교육해 주셨으면 합니다. 메릴 공녀는 계속 분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귀부인들과 영애들 모두에게 말이죠.”
황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구블러 백작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어야만 했다.
“메릴 공녀께서 영애들과 귀부인들에게 했던 언행들 때문에 다들 피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솔직히 메이아 공녀님이 그리울 지경입니다. 대체 왜 약혼녀를 바꾸신 겁니까!”
“하츠벨루아 공작이 메릴을 데미안과 약혼시킨다는 말을 듣고 어쩔 수가 없었네.”
“이미 바뀐 약혼녀이니 어쩔 수 없겠지만 황후 마마에겐 저희 뜻을 전했습니다. 혹여 메릴 공녀가 파티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다들 참여할 의사가 있다 합니다.”
“물러가게. 요번 티 파티는 취소하겠네.”
쾅쾅쾅!
테이블을 몇 번이고 힘껏 내려친 파츠래리는 울분을 토해 내고 싶었다.
겨우 약혼녀 한 명 바뀐 것뿐인데 갑자기 자신의 세력들이 자신에게 공격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황태자로 지내면서 단 한 번도 이런 대우를 받아 본 적이 없다.
‘메이아가 미치도록 그립군.’
지금이라도 메이아를 붙잡아도 괜찮은 괜찮을까? 그녀는 공작저에 없다고 하는데.
설마 메릴에 의해서 쫓겨난 건 아닐까? 갖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약혼녀를 바꾸는 걸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고, 현재 엄청나게 후회 중이라는 거다.
“앤디, 난 어쩌지.”
앤디는 한숨을 내쉬며 파츠래리에게 말했다.
“메이아 공녀님이 제일 힘들 때, 공녀님과 이별하신 건 황태자 전하십니다. 잡는다고 잡힐지는 장담 드릴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메이아 공녀님을 데미안 황자께서 황자비로 맞이하겠다고 말하고 다니시는 데다가 영식들은 후계자 수업보다 메이아 공녀를 유혹하기 위한 공부를 하는 중이라 합니다.”
“나도 그건 이야기 들어서 알아, 안다고.”
앤디는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개념이 없어도 너무 없는 메릴 때문에 얼마나 파츠래리가 곤욕을 치르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메릴 공녀하고 파혼하고 싶어.”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황태자 전하, 약혼녀이신 메릴 하츠벨루아 공녀님이 오셨습니다.”
“없다고 해.”
“문 열어요! 전하! 안에 있는 거 다 알아요!”
또 문을 열지 않고, 바쁘다고 하면 메릴은 울고불고 난리를 칠 게 분명하다.
싫은 소리를 하면 또 눈물을 흘릴 거다.
뭘 하든 그냥 울기만 할 거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파츠래리는 몹시 괴로웠다.
“앤디, 나 살려 줘.”
“전하, 저도 살려 주십시오.”
파츠래리의 두통은 더욱더 심해져만 갔고, 앤디는 최근 들어 식음을 전폐했다.
끼익.
그리고 문은 열리고 메릴이 들어왔다. 파츠래리는 오늘 저녁 공작저로 갈 테니 제발 돌아가 달라고 사정했다. 메릴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돌아갔고 앤디와 파츠래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날 저녁, 황태자 파츠래리는 하츠벨루아 공작저를 방문했다. 메릴이 아직 안 들어왔다는 이야기에 응접실로 걸어가던 발걸음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어릴 적부터 돌아다녔던 익숙한 공작저 안을 걷다가 익숙한 방문 앞에서 멈췄다.
‘여긴…….’
파츠래리는 목이 멜 정도로 사무치게 메이아가 보고 싶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그녀의 방 앞에서 멈추고 말았던 것이다.
‘메이아.’
파츠래리는 그리운 이름을 속으로 불러 보았다. 대답은 없었다.
자신의 마음을 그 누가 알아주랴!
‘메이아, 미안해.’
자신의 안일하고 가볍게 생각했던 모든 문제가 메이아가 사라짐으로써 하나둘 터지기 시작했다.
자신을 지지하던 세력들이 자신을 피하고 있었으며, 약혼녀 메릴은 사교계에서 ‘쌈닭’이라 불리고 있다. 그래도 약혼녀라 챙겨야만 했고, 같이 다녀야 했다.
메릴과 같이 다닐수록 사람들은 황태자인 자신까지 피하기 시작했다.
“후.”
후회한들 뭐하리.
“누구신데 저희 아가씨 방 앞에서 서성이시는 겁니까?”
살기가 섞인 날카로운 목소리가 파츠래리의 귀를 훑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