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35화 (35/163)
  • 35화

    퀴니는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흑발에 흑안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떡 벌어진 어깨와 남자치곤 하얀 피부에 커다란 키는 자신이 모시던 데이빗 님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미남이었다.

    ‘열일곱 살이라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어려 보이지 않은 인상과 차가운 분위기에 긴장이 되었다.

    “안녕하십니까. 플로렌스가의 테오도르라고 합니다.”

    차가워 보이는 첫인상과는 다르게 햇살 같은 따뜻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무엇보다 사용인이 될 자신에게 하대를 하지 않았다.

    퀴니는 어색하게 웃었다.

    “퀴니라고 합니다.”

    “딸기 차 좋아하십니까?”

    “물론입니다.”

    둘의 대화를 듣자마자 베나블은 테이블 위에 딸기 차와 함께 다과를 한가득 차려 올렸다.

    “드십시오.”

    “예.”

    테오도르는 어색하게 웃으며 다과를 권했다.

    “저희 공녀님하고 아시는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예, 서로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한 사이입니다.”

    부끄럽다는 듯이 말을 하는 테오도르의 모습은 퀴니에게 순수하게 보였다.

    무엇보다 귀족에게 느껴지는 오만함보다는 배려와 예의 바른 면모가 더 엿보여 마음에 들었다.

    “저희 메이아 공녀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공녀님은 강하고 멋있는 분이십니다.”

    그는 들뜬 표정과 함께 살살 눈꼬리를 접으며 미소 지었다.

    “아름다운 게 아니고요?”

    “아름다운 건 당연하고요. 당연한 말이 아닌 제 생각을 여쭤보신 거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를 말씀드린 겁니다.”

    “하하하, 다른 영식들은 무조건 외모 칭찬만 하시지만 대공 각하께서는 다르게 칭찬해 주시는군요.”

    메이아에게 수많은 수식어가 있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그녀가 무척 아름답다고만 생각한다.

    “왜 멋지다고 생각하십니까?”

    “멋진 이유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반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젠타스의 술 취한 남자 귀족을 마법으로 멀리 날려 버렸을 때의 그 모습을 생각했다.

    도도하게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푸른 눈동자는 순식간에 주위 분위기를 압도했다.

    한쪽 입술 꼬리를 삐뚜름하게 끌어올려 웃을 때는 시선이 아닌 마음이 뺏겨 버렸다.

    “그녀는 멋지다는 말로도 부족합니다.”

    퀴니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차가워 보이는 첫인상과 다르게 메이아를 입에 올릴 때마다 그는 무척 다정하고 따스한 눈빛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를 만나 보고 결정하려던 이유는 데미안 황자 때문이다.

    데미안은 틈만 나면 퀴니에게 메이아의 초상화를 달라고 부탁 및 청탁 그리고 협박을 했었다. 혹시 테오도르도 데미안 같은 사람일까 걱정되는 마음에 베나블에게 만나 보고 결정한다고 했던 것이다.

    다행히 테오도르는 데미안 같은 미친 광기는 보이지 않았다.

    그를 살펴보던 퀴니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가방에서 작은 액자를 꺼내어 테오도르에게 보여 주었다.

    “누군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예.”

    퀴니가 보여 준 것은 바로 메이아의 어릴 적 인물화였다.

    “다섯 살 때의 메이아 공녀님을 그렸던 인물화입니다. 이때, 공녀님께서 얼마나 귀여우셨는지. 사용인들과 숨바꼭질하는 걸 제가 그린 것입니다.”

    테오도르는 볼이 빨갛게 상기 된 채 액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퀴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야기해 주십시오. 메이아 공녀님의 어릴 적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뭘 좋아하십니까?”

    “전 주는 대로 다 잘 먹습니다. 그나저나 말을 놓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네.”

    “제가 아랫사람이지 않습니까? 다른 사용인들처럼 말을 놓아 주십시오.”

    “그러도록 하지.”

    “네, 대공 각하.”

    “밖에 있어? 베나블!”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베나블이 테오도르의 부름에 얼른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예, 주인님.”

    “식사를 준비해. 퀴니와 함께 먹을 거야.”

    밥을 먹겠다는 그의 말에 베나블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동안 테오도르가 상사병 때문에 밥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누워서 끙끙거렸던 지난날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이렇게 메이아의 인물화만 본 것 가지고 식사까지 하게 될 줄이야!

    베나블은 감격에 휩싸여 몸을 들썩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꾹꾹 누르며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방을 나섰다.

    대공저의 분위기는 예전 하츠벨루아 공작저와 비슷했다. 퀴니는 어쩌면 하츠벨루아 가문에서 잃어버렸던 영감을 여기서 찾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혹시 다른 초상화도 보여 주면 좋겠는데…….”

    “물론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짙은 검은 눈동자가 기쁨으로 물들어 가는 테오도르의 모습은 순수하고 맑아 보였다.

    퀴니는 이제 테오도르가 메이아를 무척 귀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믿게 되었다.

    “메이아 공녀님이 열여덟 살이실 때의 인물화입니다.”

    메이아의 인물화를 넋 놓고 보는 테오도르는 누가 보더라도 그녀에게 푹 빠진 남자의 모습이었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며 미소 짓는 그의 모습이 퀴니는 마음에 들었다.

    “예쁘다…….”

    상사병에 걸릴 정도로 메이아를 사랑한다면.

    ‘카르펜 제국 황후보다야 대제국 시리우스 대공비가 훨씬 좋지.’

    베나블은 식사 준비가 되었다며 찾아왔다.

    복도로 같이 걸어가는 도중에 베나블은 퀴니만 들을 수 있도록 낮게 속삭였다. 고맙다고 나중에 꼭 은혜를 갚고 싶다며 진심으로 말했다.

    “아닙니다. 저희 메이아 공녀님에 대해서 대공 각하께서 순수하게 생각하셔서 보여 드렸을 뿐입니다.”

    사실 퀴니는 계약서에 사인하자마자 대공가에서 메이아의 그림을 보여 달라 해서 당황스러웠다. 초상권을 물어보았을 때 초상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이상하게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테오도르를 만나 대화해 보니 자신이 메이아의 초상화를 보여 주지 않더라도 절대 해코지할 남자가 아니라는 걸 느꼈다. 데미안과는 다르게 순수한 마음이 엿보였다.

    “퀴니 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대공가 사람들은 테오도르가 드디어 식사를 한다는 이야기에 모두 기뻐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그 모습이 퀴니는 낯설지가 않았다.

    사용인들이 사랑하는 주인님. 퀴니에게 주는 예술의 영감은 여기에 있었다.

    사람들이 주는 아름다운 감정들이 곧 퀴니에게 영감을 주기 때문이다. 예전의 하츠벨루아 공작저처럼 말이다.

    ‘플로렌스 대공가로 오길 잘했군.’

    식사하면서 테오도르는 해맑은 미소를 보이며 퀴니가 해 주는 메이아 이야기를 즐겁게 들었다.

    그리고 테오도르도 자신이 겪은 메이아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퀴니는 그가 해 주는 이야기를 즐겁게 들었다.

    “서빙 보는 아이가 넘어져서 옆 테이블의 귀부인 드레스를 더럽혔지만…….”

    “역시 우리 메이아 아가씨는 심성이 참 고우십니다. 그래서 공작저 사용인들 모두 아가씨를 사랑하고 존경했죠.”

    식사를 마친 이후 퀴니는 테오도르에게 말했다.

    “계약직이긴 하지만 대공 각하의 초상화도 멋있게 그려 드리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즐겁게 식사를 마쳤다.

    테오도르가 음식을 먹는 걸 지켜보던 베나블과 보좌관인 헤만과 애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베나블은 퀴니가 머물 방으로 안내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퀴니는 그에게 궁금한 걸 물었다.

    “제가 이직을 권유받을 때 플로렌스 대공가에는 전속 화가가 없다 하셨는데 왜 화가가 없는 겁니까?”

    그의 질문에 베나블은 답했다.

    “전 주인님 부부가 계셨을 때는 플로렌스 대공가에도 전속 화가가 있었습니다만……. 그분들이 돌아가신 뒤 화가는 슬픔을 극복하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그 뒤 화가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렇군요.”

    베나블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 가는 걸 본 퀴니는 고개를 돌린 그에게 더는 질문하지 않았다.

    *

    메이아는 자신의 마법 가방 안을 다시 한번 정리했다. 꼼꼼하게 살펴본 뒤에 자리에서 일어섰다가 앉으며 몇 번이나 빠뜨린 것이 없는지 살폈다.

    평소에 무언 갈 챙겨 본 적이 없다. 모두 사용인들이 알아서 준비해 줬다.

    이렇게 혼자 나와 있다 보니 짐을 챙기고 정리하는 일이 상당히 어려운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새삼 사용인들이 살짝 존경스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리고 지냈던 방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열심히 치운다고 치웠는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방이 엉망이네.”

    나름 청소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청소라는 것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태어나서 한 번도 뭔가를 치워 본 적이 없다. 집을 떠나 많은 걸 배우고 당연한 줄만 알았던 삶에 감사함을 느낀다.

    “치워야 하는데 청소가 어렵다, 어려워.”

    그래도 메이아는 열심히 치우기 위해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방은 더욱 엉망이 되었다.

    ‘청소를 내가 못할 줄이야.’

    메이아는 자신이 못하는 일이 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살짝 상했다. 역시 사람은 자만해선 안 된다.

    뭐든지 자기가 다 잘할 거란 생각은 이젠 버리기로 결심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청소를 하느라 방에서 나오지 않은 메이아를 찾으러 푸링이 찾아왔다.

    “청소가 어렵습니다.”

    “하하, 그럴 때는 마법을 사용하십시오. 물과 바람 마법을 잘 응용하면 방을 치우기 쉽습니다.”

    “그래요?”

    “정령사들이라면 아주 편하게 정령의 도움으로 청소하지만 우리 마법사들은 정령사가 아니지요. 그래서 응용 마법을 잘 활용하면 되지만 컨트롤하기가 조금 어렵습니다.”

    푸링은 메이아에게 마법을 이용한 청소를 살짝 가르쳐 주었다. 메이아는 만족스럽게 가르침을 받고 그제야 방 청소를 마무리하고 나왔다.

    데미안 황자가 마탑으로 오기 전에 떠나야 했다.

    원래는 성인식 전날까지는 마탑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인생사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한 번 더 깨달았다.

    “어쩐지 계획대로 잘 풀린다고 했어.”

    마탑 안은 분명 아무나 들어올 수가 없고 매우 안전하다. 하지만 데미안은 자신이 나올 때까지 마탑 앞에 집을 짓고 기다릴 성격이다.

    마탑에서 단 한 순간도 나오지 않을 자신도 없을뿐더러 성인식 때문에라도 카르펜에 돌아가야 해서 마탑에서 나와야 된다. 그렇게 되면 마탑을 나오자마자 만나게 되는 사람이 데미안이 될 게 분명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