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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34화 (34/163)
  • 34화

    테오도르는 매일 허무하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분명 꿈속에서는 그리운 그녀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그것이 꿈이라는 생각조차 못 했다. 눈꺼풀을 올리고 깜박일 꿈이었다는 생각에 몹시 아쉬워하며 메이아에 대한 그리움이 날로 커졌다.

    혹시나 다시 잠들며 그녀를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기억되는 메이아의 미소, 가녀린 손짓, 바람에 흩날리는 머릿결.

    상상만 하더라도 너무 좋아 입술이 저절로 호선을 그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테오도르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와 살포시 덮었다.

    심장에서 계속 느껴지는 통증에 왼쪽 가슴을 부여잡으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눈을 꾹 감으면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거야.

    테오도르는 귓가에 새겨진 그녀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를 반복했다.

    오늘도 꿈에서 그녀를 만나길…….

    계속 잠을 자다 일어나고, 또 뒤척이고 다시 누웠다. 더는 잠이 오지 않아 덮었던 이불을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법 이공간에서 그녀가 보내 준 편지를 읽었다. 읽고 또 읽으며 그리움을 계속 달래 봤다. 하지만 답답함만 치솟아 올랐다. 물을 먹어도 갈증이 가시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다시 또 침대에 누웠다.

    그녀를 상상할 때마다 후회가 파도처럼 몰려온다. 부끄럽단 이유만으로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피했던 스스로를 원망했다.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일이 부끄러운 일이 아닌데 이렇게나 낯선 감정을 처음이라 본능에 맡겨 버린 지난날을 후회했다.

    누군가가 깨우는 소리에 눈을 뜨고 쳐다보니 베나블이었다.

    “아, 베나블, 무슨 일이지?”

    “주인님, 일어나 주십시오. 알려 드릴 것이 있습니다.”

    베나블은 테오도르에게 말하며 테이블 위를 쳐다보았다. 차려 놓은 음식이 그대로였다.

    “또 식사를 하지 않으셨군요.”

    베나블은 작은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걱정스레 그에게 다가가 상체를 일으켜 세워 침대 헤드에 기대게 했다. 침대 위에 힘없이 걸터앉은 테오도르는 힘겹게 말했다.

    “베나블, 알려 줄 일이라는 건 뭐야?”

    베나블은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으며 서류 한 장을 보여 주었다.

    “새로 고용된 화가가 있어서 보고드리려고 합니다. 여기 보고서를 읽어 주십시오.”

    보고서를 건네받은 테오도르는 그걸 읽을수록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그리고 눈을 곱게 접으며 환하게 웃기 시작했다.

    “이게 사실이야?”

    환하게 웃는 테오도르를 보며 집사 베나블은 흡족한 미소를 띠며 답했다.

    “네, 그 화가의 이름은 퀴니. 전에 일했던 곳은 카르펜 제국의 하츠벨루아 가문이었으며, 유일하게 메이아 공녀님의 초상권을 가지고 계신 분이죠.”

    “베나블…….”

    “예, 주인님.”

    “넌 최고의 집사야.”

    “칭찬 감사합니다.”

    “진심이야.”

    메이아의 인물화를 볼 거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테오도르는 마음이 몽실몽실 떠오르는 구름처럼 부풀어 올랐다. 갑자기 힘이 나기 시작했다.

    테오도르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당장 퀴니라는 화가를 만나고 싶어.”

    오래간만에 힘을 내는 그 모습을 보면 베나블은 한참이나 기뻐했다.

    베나블은 메이아를 어떻게서든 마탑에서 대공가로 데리고 오기 위해 헤롤드를 마탑으로 파견 보냈다.

    <이 베나블, 기필코 주인님을 위해 꼭 공녀님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베나블의 다짐은 시시각각 굳어 갔다.

    하츠벨루아 공작가에는 오랫동안 공작가를 보필하던 유명하고 유능한 3인의 대표 사용인들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메이아의 유모 유디.

    두 번째는 정원사 겸 하급 땅의 정령사인 헬레나.

    세 번째는 바로 화가 퀴니다.

    이 세 명은 메이아의 아버지인 데이빗 하츠벨루아가 공작으로 취임하기 전부터 그를 따르며 충성을 맹세했다.

    특히 퀴니는 가난한 평민 출신이지만 화가에 대한 능력만을 보고 키워 준 데이빗을 맹목적으로 따랐다.

    <퀴니, 좀 더 넓은 곳으로 가서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나? 그리고 좋은 여자를 만나서 결혼도 해야지.>

    <결혼 생각 없습니다. 저는 그림 그리는 것만 생각할 뿐입니다. 그리고 데이빗 님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때 돌멩이로 바닥에 그림 그리는 퀴니의 재능은 무척 훌륭했으니까.>

    <이 재능을 하츠벨루아 공작가를 위해 쓰고 싶습니다.>

    <그럼 우리 귀여운 메이를 많이 그려 주겠어?>

    <당연합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하츠벨루아 공작가의 유일한 공녀는 가족들과 사용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정원사인 헬레나가 예쁜 꽃을 피우면 유모 유디가 메이아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다.

    그러면 화가 퀴니는 빠른 속도로 붓을 놀려 그 모습을 그림으로 담았다.

    퀴니가 그린 그림들은 공작저 곳곳에 미술관처럼 전시되어 지나다니는 사람들 마음을 설레게 했다. 저택 여기저기 사랑스러운 메이아가 그려진 그림을 더 많이 걸라는 데이빗의 명령도 한몫했다. 제국 최고의 사랑스러움을 모두에게 알려야 한다며 퀴니에게 그림 그릴 때 온 힘을 다해 달라고 부탁까지 했었다.

    데이빗과 바이올렛은 퀴니의 그림을 모두 좋아했으며 완성된 메이아의 인물화를 무척 아꼈다.

    화가 퀴니는 그때가 너무나도 그리웠다. 행복한 웃음이 가득한 하츠벨루아 공작가를.

    마음 따뜻한 공작 부부와 메이아의 해맑은 미소. 충성심 강한 사용인들.

    헬레나와 항상 무슨 꽃으로 정원을 가꿀 것인지를 시시비비 가리는 것도.

    메이아 공녀님에게 어울리는 색의 드레스를 유모 유디와 이야기하는 것도.

    ‘그 모든 것이 그립구나.’

    추억은 추억으로만 곱씹으며 놔둬야 한다. 자꾸만 추억을 떠올릴수록 현실이 싫어지니 말이다.

    영감을 주고 지지를 보내 준 데이빗이 사라진 이후, 지금의 퀴니는 영감을 잃었다.

    특히, 메이아가 마탑으로 떠난 이후부터는 멍해지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림을 사랑하지만, 영감을 받지 못한 화가는 권태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 와중 시리우스 대제국의 플로렌스 대공가에서 이직을 부탁했다.

    많은 이직금과 함께. 하지만 쉽사리 자리를 옮기기도 그랬다.

    메이아가 하츠벨루아 공작가로 되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인식 전날에는 돌아올 테니 말이다. 그녀가 이곳에 있는 한 죽어도 옮길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직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생겼다.

    <진짜 퀴니 너 짜증 나는 거 알아? 그림을 이렇게밖에 못 그려?>

    <죄송합니다. 다시 그리겠습니다.>

    메릴은 퀴니에게 다가가 화구통을 던지고 그린 그림을 찢어 버렸다.

    <너 잘릴 준비나 해!>

    <…….>

    메릴이 던지고 간 화구통은 메이아가 직접 선물해 준 거다.

    최고로 아끼는 물건이 깨졌다. 퀴니의 눈가에선 눈물이 흘렀다.

    <울어? 어디서 더러운 눈물 흘리고 있는 거지? 썩 꺼져! 꼴도 보기도 싫으니까!>

    퍽.

    쨍그랑!

    <윽.>

    메릴의 발길질에 퀴니는 저항하지 않고 맞을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메릴 공녀님.>

    <아! 꺼지라고!>

    메릴이 던진 물병에 퀴니는 손을 보호하기 위해 등이나 머리를 내밀어 맞았다.

    화가에게 있어 손을 다친다는 건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이번에는 물병이 날아와 여기에 얻어맞은 퀴니의 머리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려 왔다. 그걸 본 헬레나와 유디는 무척 놀라며 분노했다. 괜찮다며 웃어넘겼지만 그날 밤 퀴니는 숨죽이며 아주 많이 울었다.

    메릴의 폭력에 버티다가는 손이 망가질 것 같아 겁이 났다. 그래서 하츠벨루아 공작저를 잠시 떠나기로 결심했다.

    대신에 메이아 공녀님의 초상권만큼은 꼭 가져가야 했다. 다행히 가져올 수 있어 미련 없이 공작저를 떠날 수 있었다.

    <정말 가는 거야? 퀴니.>

    떠나는 그를 헬레나와 유디가 걱정했다.

    그들은 퀴니가 떠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컸다.

    <그래. 돈도 많이 주고 아름다운 남쪽 바다를 바라보면 내 영감이 살아날지도 모르지! 그리고 1년 계약직이고, 아가씨 성인식 날 맞춰 돌아오는 것까지 이야기가 마무리되었어.>

    <그래.>

    <헬레나, 우리 메이아 아가씨 오시면 잘 이야기해 줘. 에구! 유디 님, 그만 우십시오.>

    유모 유디는 떠나는 퀴니 앞에서 눈물을 계속 훔치며 슬퍼했다.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안해서 그래…….>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그만 우십시오.>

    <내가 나이가 먹을수록 눈물이 많아, 퀴니.>

    <아가씨가 돌아오신다면 편지를 보내 주세요. 휴가 내고 당장 달려올 테니까.>

    떠나는 퀴니를 배웅 나온 헬레나와 유디 그리고 많은 사용인은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슬퍼했다.

    <다들 고마웠네. 편지하겠네!>

    퀴니는 한평생 하츠벨루아가에 충성했다.

    떠나는 그를 보며 사용인들은 오죽하면 저러겠느냐고 발을 동동 굴리며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그가 하츠벨루아 공작저를 떠났다는 소식에 카르펜 제국에 있는 예술계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다음에 공작저에 들어갈 화가가 누가 될 것인지 관심을 가졌다.

    <대체 왜? 퀴니 님께서.>

    <메릴 공녀님인가? 왜 요번에 메이아 님 자리 뺏은 사촌 언니요.>

    <네.>

    <퀴니 님의 그림을 찢었다네요.>

    <정말요? 그분 그림을 찢었다고요?>

    <메릴 공녀님 때문에 손을 다칠 뻔했다는 소문이 자자해. 다행히 손은 안 다치셨지만 말이야…….>

    <지금 하츠벨루아 공작가에서 화가를 모집한다는데 절대 갈 화가는 없을걸요.>

    <퀴니 님의 그림을 찢다니 제정신이 아니군요.>

    비록 미천한 평민 출신이지만 많은 화가 지망생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 퀴니였다. 그를 원하는 곳도 많았다.

    하지만 그가 하츠벨루아 공작가의 사람이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만큼 그의 이직을 놀라워했다.

    <퀴니 님 그림도 찢는 마당에…… 우리 그림도 찢겠죠.>

    <아무리 하츠벨루아 공작가라지만 가고 싶지 않군요.>

    <그 오랜 세월 계셨는데 오죽하면 떠나셨을까…… 쯧쯧.>

    퀴니가 떠난 이후 하츠벨루아 공작가에 그의 자리를 대신할 화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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