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베나블은 플로렌스 비밀 정보원들만이 알 수 있는 빨간 종을 마구간 위에 올려놓았다.
대공가의 비밀 정보원 헤롤드는 빨간 종 안에 든 쪽지를 확인했다.
‘무슨 일을 시키려 하시길래?’
오래간만에 일을 할 수 있다는 설렘이 헤롤드의 기분을 아주 들뜨게 했다.
그리고 천천히 쪽지 내용을 확인했다.
[카르펜 제국 하츠벨루아의 메이아 공녀님의 인적 사항, 특이 사항, 특히 초상화는 반드시 입수 바람.]
그리고 여기에 추가로 ‘하츠벨루아 공작 가문 화가 스카우트 제의서’가 있었다.
“뭐야, 헤롤드? 일이야? 와, 정말 오래간만의 일인데?”
비밀 정보원 중 유일한 여성인 스텔라가 헤롤드에게 다가가면서 물어보았다.
“빨간 종의 쪽지야. 네가 한번 봐.”
쪽지를 건네받은 스텔라는 쪽지를 보았다.
“응? 메이아 공녀님?”
“아는 귀족이야?”
“카르펜 제국에서 가장 유명하신 분이지.”
황태자의 약혼녀 카르펜 제국의 사교계의 꽃이자 많은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였다.
일 때문에 스쳐 지나가며 본 적이 있었다. 강렬하고 아름다운 미모가 아직도 기억에 남았다.
“다행이군. 그럼 이번 일은 네가 맡아라.”
“뭐야, 헤롤드는 안 해?”
헤롤드는 손에 든 ‘하츠벨루아 공작가의 화가 스카우트 제의서’를 흔들어 보았다.
“나는 이 일을 할 거야.”
“제의서?”
“메이아 공녀님 초상화를 구할 수 없으면 화가를 직접 대공가로 데려오라는 뜻이지 뭐겠어. 난 최선을 다해 스카우트를 하러 갈 테니 너는 공녀님에 관한 조사를 한 뒤에 베나블 집사님에게 보고서를 가져다줘.”
“알았어. 고생해.”
헤롤드는 손을 흔들며 뒤돌아 나갔고, 스텔라는 쪽지를 주머니에 넣고 어둠 속에 숨었다.
스텔라는 빠르게 정보들을 베나블에게 가져다주었다.
“초상화는 못 가져왔습니다. 대신 헤롤드가 공녀님 가문의 화가를 스카우트하러 떠나셨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보고서를 받아 들고 읽는 베나블의 표정은 심각했다.
“화가분은 어떻게서든 모셔와야 해! 돈은 얼마가 들더라도 상관없다고 헤롤드에게 전해 주도록.”
“알겠습니다.”
원래 귀족을 그린 초상화는 함부로 밖으로 나돌지 않는다. 초상화를 보고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밖으로 유출되는 일이 생긴다면 담당 화가가 큰 벌을 받게 된다.
그래서 가문의 화가가 초상권을 가져 그 사람만 그릴 수 있도록 철저하게 관리한다.
“초상화를 구하지 못했으니 꼭 화가분을 대공가로 모셔야 해.”
“그렇지만 초상권을 못 받으면…….”
“앞에서 하지 못하는 일은 뒤에서 할 수 있도록 설득해야지.”
그렇게 초조한 시간이 흘렀다. 테오도르의 병세는 더욱 심각해져 갔다.
베나블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고,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 헤롤드는 기쁜 소식을 들고 왔다.
“그분께서 이직을 수락하셨습니다.!”
베나블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틀어막았다.
“고생했네. 기특해!”
이젠 화가에게 메이아의 초상화를 몰래 그리게 설득하면 될 일이다.
그리고 공작저에 있는 화가 퀴니는 플로렌스 대공가로 왔다.
그가 우선은 1년간 계약직으로 일하겠다고 하자 베나블은 이를 수락했다.
“그러면 1년간 잘 부탁드립니다.”
“퀴니 님께서 대공저에 계시는 동안 최선을 다해서 최고의 작품을 그릴 수 있도록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퀴니는 궁금했다. 시리우스 대제국의 플로렌스 대공가에서 자신을 뭘 보고 이직을 부탁한 걸까? 돈도 엄청 많이 준다는 말에 처음에 의심했지만 막상 도착하니 생각보다 더 큰 환대에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플로렌스 대공가에는 화가가 없습니까?”
“……네. 화가가 안 계십니다.”
테오도르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그림을 볼 때마다 슬픈 눈빛으로 치워 달라 했었고, 그 모습을 곁에서 보던 대공가의 화가는 결국 떠나 버렸다. 자신의 뮤즈가 사라졌다며…….
“그런데 왜 하필 저를?”
“꼭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선 1년 계약서에 사인을 부탁드립니다.”
베나블은 계약서를 건네주었다. 퀴니는 서류를 들고 읽었다. 조건이 너무 좋았다.
“사인하기 전에 미리 말씀드리겠지만 꼭 제가 원하는 날 휴가를 주셔야 합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2주 전에만 미리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퀴니는 서류에 사인을 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화가 퀴니는 메이아 공녀가 떠난 직후 더는 하츠벨루아 공작가에 일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차였는데 마침 들어온 대공가에서의 스카우트 제의가 의아해하면서도 반가웠다.
헤롤드라는 자가 찾아와 건네준 스카우트 제의서의 조건들은 너무 좋았지만…… 아직 마탑에서 돌아오지 않은 메이아가 마음에 걸렸다.
그렇지만 결국 플로렌스 대공령에 오게 되었다. 아니 올 수밖에 없었다.
“전 누굴 그리면 되겠습니까?”
“퀴니 님, 설명하겠습니다.”
퀴니는 앞에 있는 차 한 모금을 목을 축이며 맞은 편에 있는 베나블의 말을 기다렸다.
“딸기 차는 입맛에 맞으십니까?”
“예, 맛있습니다. 제가 모시는 분이 좋아하는 차입니다. 혹시 플로렌스 대공 각하께서도 딸기 차를 좋아하십니까?”
“예, 가장 좋아하시는 차입니다.”
대답을 들은 퀴니의 얼굴이 그리움으로 번져 갔다.
“표정이 굉장히 슬퍼 보입니다. 혹시 모셨던 분께서 무슨 일 있으셨던 겁니까?”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여기로 오게 된 계기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비밀은 아니니.”
퀴니는 공작가에 있었던 일들을 침이 마르게 설명했다.
베나블은 마음 아파하고 공감하며 퀴니의 모든 말을 들어 주었다.
“너무하군요. 오죽하셨으면 공작가를 떠나셨을까?”
“지금 공녀님은 마탑에 가셨지만 데미안 황자가 공녀님을 황자비로 맞이하겠다며 공작저에 찾아와 현 공작인 루만 님에게 선전 포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공녀님이 지내고 계신 마탑에까지 쫓아간다 하길래 얼른 그분에게 편지는 띄웠는데 읽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퀴니는 속에서 열이 나는지 식은 딸기 차를 벌컥 마시고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데미안 황자가 우리 공녀님 쳐다볼 때 눈빛을 본다며 제 말에 공감하실 겁니다.”
“말씀을 들어 보니 공녀님께선 데미안 황자라는 분을 싫어하는군요.”
“싫어한다기보다는 아예 만나고 싶어 하시지를 않는다고 할까요? 공녀님은 그분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으신데 자꾸 와서 집착하고 찌르니 공녀님은 피하는 거죠.”
베나블은 메이아가 보낸 편지를 내용을 생각했다. 당분간 의뢰일로 답장을 보낼 수 없다는 내용은 어쩌면 의뢰가 아니고 데미안을 피해 도망가는 거라는 짐작이 들었다.
“이야기를 들으니 퀴니 님은 공녀님을 상당히 생각하시는군요.”
“그분이 황후로서 다스리는 카르펜 제국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이젠 없으니.”
베나블은 슬퍼하는 퀴니를 위로하며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혹시 하츠벨루아 가문에서 떠나실 때 메이아 공녀님의 초상권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초상권을 받았습니다. 현 하츠벨루아 공작님께서는 메이아 공녀님의 모습을 다른 데 가서 그리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도 않습니다!”
담당 화가가 그만둘 때 다른 데서 자신들의 얼굴이 팔리는 일이 없도록 계약서를 작성한다.
얼굴이 팔리는 순간 범죄의 표적이 된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루만은 알아서 하라 했다.
그 뜻은 메이아가 위험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루만의 발언이 공작저에 퍼지면서 하츠벨루아 공작저의 사용인들은 분노에 휩싸였다.
“메이아 공녀님의 유모 유디 님께서도 크게 화를 내셨으나, 제가 공녀님 초상화를 만들어 팔 일도 없으니 우선은 안심하셨지만, 너무 화가 나는 건 사실입니다.”
퀴니의 말을 듣고, 베나블은 잠시 뜸을 들이다 침착하게 이야기를 꺼내었다.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릴 것이 메이아 공녀님의 초상권과 관련 있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저희 대공 각하는 병에 걸리셨습니다……. 불치병입니다.”
이직한 곳의 가주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런데 왜 메이아의 초상권에 대해 물어보는 걸까?
“불치병과 저희 메이아 공녀님의 초상권이 무슨 상관입니까?”
“주인님은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열일곱 살이시지만 곧 성인식을 올릴 예정입니다.”
“나이도 어리시군요. 그런데 그분이 열일곱 살이신 것과 우리 메이아 공녀님 초상권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겁니까?”
“저희 주인님은 검술도 훌륭하시고, 심성도 고우시죠. 돈도 많으시고, 권력도 있으십니다. 플로렌스 대공가는 시리우스 제국의 황권도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하하.”
“네, 좋은 주인님이시군요. 그런데 그 사실이 메이아 공녀님의 초상권과 무슨 상관입니까?”
퀴니는 베나블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무슨 병에 걸리신 겁니까?”
“저희 주인님께서는 상사병 말기입니다. 현재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퀴니 화가님, 제발 도와주십시오!”
베나블은 일어나 허리를 깊이 숙였다.
“현재 퀴니 화가님 밖에 저희 주인님을 살려 주실 분이 없습니다.”
“그러니깐 그게 저희 메이아 공녀님의 초상권과 무슨 상관입니까? 정확히 말씀해 주십시오.”
베나블은 간절히 말했다.
“메이아 공녀님의 초상화를 가지고 계신 게 있다면 저희 주인님에게 보여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물론 초상화를 대여해 주시거나 아예 주시면 더 감사하겠습니다.”
베나블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퀴니는 입을 다물고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나는 건 딱 하나였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았다.
“설마 플로렌스 대공 각하의 상사병 상대가 저희 메이아 공녀님이십니까?”
바다 건너 시리우스 제국의 플로렌스 대공가에서 많은 돈을 주고 자신을 데리고 오려고 하는 것에 다소 의구심을 품긴 했다. 그리고 그 진짜 이유를 지금 알게 되었다.
“부탁드립니다. 주인님 목숨이 달린 일입니다.”
베나블이 간절히 설득했다.
퀴니는 테오도르를 한 번 만난 뒤에 결정하겠다 했고, 그제야 베나블은 숙였던 허리를 펴고 나갔다. 베나블은 시름시름 앓아누워 있는 테오도르를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