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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28화 (28/163)
  • 28화

    대부분 귀부인은 메릴의 행동을 지적했지만 황후인 엘루민이 들어온 이후 입을 닫았다.

    엘루민 또한 메이아가 무슨 짓을 했는지 이미 보고를 받았기 때문에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황후는 황후였다.

    남은 귀부인들을 데리고 빈틈없이 티 파티의 질서를 끝까지 유지하고 마무리 지었다.

    그렇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사교계에선 이미 황후의 티 파티에서 꽃병을 던진 메릴의 이야기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페르젠 후작은 직접 황후 엘르민에게 찾아와 메릴의 행동을 정식적으로 사과하지 않으면 더는 파츠래리 황태자에게 힘을 보탤 수 없다고 선전 포고를 했다.

    “분명 메릴이 잘못한 게 맞네.”

    페르젠 후작 또한 자신의 아내와 딸에게 무례하게 군 메릴을 따끔하게 혼내야 된다면서 엘르민을 압박했다.

    “그렇다면 제 딸과 제 아내에게 사과하라 하십시오. 꽃병을 던진다는 게 말이 됩니까? 시장 깡패도 아니고, 어찌 공녀라는 분께서 이건 저희 가문에서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알겠네.”

    “메릴 공녀 때문에 오히려 황태자 전하께서 키워 놓은 세력들이 데미안 황자 측으로 가려고 합니다. 만에 하나 메이아 공녀를 황자비로 맞이한다면 오히려 데미안 황자의 힘이 더 커질 겁니다.”

    페르젠 후작의 말에 엘르민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메이아 공녀님을 따르며 동경하고 존경하는 영애들의 아버지들과 귀부인들의 남편들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페르젠 후작의 말에 엘르민은 뭔가 깨달은 듯 뒤통수가 얼얼했다.

    황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익숙하고 편안했기에 소중함을 못 느끼고 놓치기 마련이오, 황후.>

    “더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메릴 공녀가 처신을 잘하도록 지켜보셔야 할 겁니다. 그 전에 제 처와 딸에게 꼭 사과하게 해 주십시오. 제가 할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한편 메릴은 자신은 황태자의 약혼녀인데 늙은 귀부인들한테 이런 수모를 받아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아빠가 이야기하던 거와는 달라.’

    물론 황후가 되는 메이아에게 고개 숙이기 싫었던 것도 있어 욕심을 부렸다.

    그런데 막상 만나 보니 잘생기고 예의 바르게 보이는 황태자가 끌렸고, 첫눈에 마음에 들었다.

    자신을 보고 환하게 웃던 그 미소가 마음에 쏙 들었다. 미래의 황제. 그의 옆자리에 앉는 여자는 제국 내 최고의 자리에 오른다. 자신이 황후의 자리에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약혼녀가 되고 국혼을 올리게 되면 메이아가 자신에게 머리를 숙여야 한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그렇지만…… 막상 약혼하고 나니 자신과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파츠래리.

    그리고 메이아보다 더 독한 황후 때문에 속상해져만 갔다.

    차라리 쿠룬달스 백작 영식을 먼저 만났더라면…….

    눈물을 흘리며 나온 메릴이 무작정 마차에 탑승하려 할 때였다.

    “메릴 공녀님!”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오자 메릴은 몸을 돌리고 자신을 부른 남자를 바라봤다.

    “……토마스.”

    메릴을 부른 건 토마스 쿠룬달스 백작 영식이었다.

    메릴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에게 답하자 토마스는 빠른 걸음으로 메릴에게 다가갔다.

    “공녀님, 우셨습니까? 눈가가 붉습니다.”

    토마스의 말에 메릴은 급하게 눈물을 훔쳤다.

    “우, 울긴요. 토마스, 황궁에 무슨 일이세요?”

    “일이 있어 잠시 들렀다가, 마차에 하츠벨루아 가문의 문양이 보이길래. 여기서 기다리면 메릴 공녀님 얼굴 볼 수 있을까 생각하다 보니……. 솔직히 말씀드리면 공녀님을 뵙기 위해 여기서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 주는 토마스의 말 한마디에 메릴은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흑…… 흑, 토마스.”

    갑자기 서럽게 우는 메릴의 모습에 토마스는 자신의 품에서 푸른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눈가를 닦아 주며 걱정스레 이야기했다.

    “무슨 일이 있으신 거군요. 마차에 탑승하시겠습니까?”

    메릴을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부한테 먼저 가라 할게요.”

    “제가 말하겠습니다.”

    메릴은 토마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쿠룬달스 백작 가문의 마차에 올랐다.

    토마스 주위를 한 번 살펴보곤 메릴를 뒤따라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이내 마차는 빠르게 황궁을 빠져나갔다.

    “흑, 흐으윽, 토마스……. 이런 추한 꼴 보여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무슨 일 있었던 겁니까?”

    “그냥. 저는 시골에 살다 와서 아무것도 모르는데 귀부인들께서, 흑.”

    “이런……. 사교계 신고식을 치르신 모양이군요. 귀부인들이 나이도 있으실 텐데. 너무들 하군요. 잘 빠져나오셨습니다. 그런 자리 있으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이렇게 그냥 자리 박차고 나왔다고 황후마마한테 혼날지도 몰라요.”

    토마스는 메릴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겨 그녀의 등을 다독이며 위로해 주기 시작했다.

    “메릴 공녀님은 하츠벨루아입니다. 무슨 고민을 하고, 무슨 눈치를 봅니까. 아무리 날고 난다는 귀부인들이라 하더라도 당신을 이렇게 대하면 안 되는 겁니다.”

    메릴은 소리 내며 울며 토마스의 위로를 받았다.

    “고마워요, 토마스.”

    “아닙니다. 울지 마십시오.”

    메릴은 토마스의 손수건으로 자신의 눈가를 계속 훔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메이아 자리를 뺏은 게 아닌데 그냥 아버지 말을 따랐을 뿐인데, 흑…….”

    토마스는 메릴의 뺨을 살짝 쓰다듬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안타깝다는 말투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당신이 우는 모습을 보는 게 이렇게 마음 아플 줄이야.”

    메릴은 토마스 품에 살짝 기대며 눈물을 삼켰다.

    “다들 저를 미워해요. 다들 메이아만 찾고 나랑 메이아를 비교하고, 흐끅.”

    토마스는 자신에게 기댄 메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아 주었다.

    “못된 사람들. 천벌 받을 겁니다. 우리 메릴 공녀님, 어떻게 하면 기분이 풀리실까요.”

    메릴은 잠시 훌쩍임을 멈추고 옆자리의 토마스를 쳐다봤다.

    “토마스, 저 쇼핑하고 싶어요.”

    “얼마든지 사 드리겠습니다. 보석? 드레스? 신발? 가방? 뭘 사고 싶으신가요? 가지고 싶으신 게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토마스는 환히 웃으며 메릴을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그의 포옹을 메릴은 거절하지 않고 더욱 파고들었다.

    “마음 같아선 세상 모든 걸 메릴 공녀님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 주세요?”

    “우린 친한 친구니…….”

    토마스는 말끝을 흐리며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친구라고 이렇게 잘해 주는 거예요?”

    “당신은 저에게 특별한 사람이라 그렇습니다.”

    메릴의 심장이 콩콩 뛰기 시작했다.

    *

    루만 하츠벨루아 공작은 기분이 언짢았다.

    이유는 아침부터 찾아온 데미안 폰 마브로 황자 때문이다.

    루만은 미소 가득한 얼굴로 차를 마시고 있는 데미안을 반갑지 않다는 듯 쳐다봤다.

    “공작, 내 말을 듣고 있는 건가?”

    “예, 황자 전하.”

    “나는 메이아 공녀를 황자비로 삼을 거야.”

    데미안의 말에 루만은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조카가 제시한 자유 결혼서를 신전에 공증받았기 때문이다.

    “저는 조카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시킬 생각입니다.”

    “내 명의로 된 다이아몬드 광산 루비 광산 그리고 뭘 줄까? 지참금은 원하는 만큼 주겠어.”

    입이 떡 벌어지는 재산을 서슴없이 주겠다는 데미안의 유혹적인 말에 메이아에게 쉽사리 ‘자유 결혼서’를 약속해 준 것 같아 속이 쓰렸다.

    하지만 이내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대체 왜 안 된다는 거야! 공작.”

    데미안은 꾸준히 공작저에 청혼서를 집어넣었지만, 루만 공작은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데미안이 이렇게까지 메이아와 결혼하겠다고 고집 피울지는 몰랐다.

    “전하, 아무리 청혼서를 넣으시더라도 메이아는 지금 없습니다. 마탑으로 떠났습니다.”

    “알고 있네. 어차피 가문 대 가문으로 혼인 서약 주고받으면 되지 않아? 곧 그녀가 성인이 되면 약혼이 아니라 결혼을 올리고 싶어.”

    “조카가 원하면 해 드리겠습니다.”

    데미안이 주는 지참금은 무척 욕심이 난다. 그렇지만 자신이 힘을 실어 주고 있는 파츠래리와 반대 세력을 가진 데미안이다. 그런데 메이아가 그와 결혼을 한다면?

    결과는 좋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만약에 메이아가 데미안과 결혼한다고 하면 우리 메릴과 파츠래리는 어쩌지?

    루만은 티 내지 않고 고민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초조한 기분이 들었지만 메이아와의 계약서 내용을 생각하면서 연신 다행이라며 속으로 안도했다.

    향후 5년간은 메이아는 절대 카르펜 제국의 어떠한 남자와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계약했다.

    그러니 그녀가 데미안과 결혼하고 싶다고 하면 그건 5년 뒤에 일어날 일이다.

    그 전에 메릴이 황태자비가 될 테니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조카의 의견을 존중해 주기로 했습니다. 약속했습니다.”

    루만의 거절에 쉽게 물러나거나 포기할 데미안이 아니었다.

    “그렇단 말이지. 그러면 메이아 공녀가 날 원하면 된다는 거군.”

    루만의 입이 바짝 말라가는 걸 느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계약 내용을 비밀에 부쳐야겠군.’

    “그러면 내 최선을 다해 메이아 공녀를 유혹할 수밖에 없겠군.”

    “황자 전하……. 정말 폐하와 루루나 마마께서도 허락하신 겁니까?”

    “그러니 내가 여기 온 게 아니겠어.”

    “메이아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습니다.”

    “메이아 공녀는 곧 성인식을 올리는데, 당연히 그 전에는 오겠지. 이거 너무 조카에게 관심이 없는 거 아닌가? 공작.”

    데미안의 말에 루만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부모님도 모두 여의고, 약혼녀 자리에서도 밀려나서 많이 외로울 거야. 내가 그 마음을 잘 위로해 줄 생각이거든. 마탑으로 갔다고 했지? 그러면 내가 마탑으로 찾아가 그녀를 데리고 오겠어.”

    데미안은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공작의 마음 잘 알았네. 조카를 위한 마음 말이야. 이만 난 가 봐야 하겠군……. 아 참. 그리고 이걸 메릴 공녀에게 전해 주게나.”

    데미안은 초대장을 하나 꺼내 루안에게 건네주었다.

    “우리 어머니의 티 파티 초대장이야. 메릴 공녀를 초대하고 싶으신 것 같아.”

    “루루나 마마의 티 파티 초대장입니까? 메릴에게 전하겠습니다.”

    “즐거운 티 파티가 될 거라 전해 주게.”

    방긋 웃던 데미안은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냉기가 뚝뚝 흐르는 차가운 눈빛으로 무심하게 입을 꾹 다물며 걸어 나갔다.

    “정말 죽이고 싶네, 루만 공작. 파혼시키자마자 그녀를 감히 마탑으로 보내?”

    그의 눈빛에는 살기로 험악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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