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메릴은 오늘 자신에게 만나자고 한 쿠룬달스가의 토마스 영식을 떠올리며 무료한 티 파티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메릴 공녀님은 황태자님의 약혼녀가 되셨으니 제가 감히 우러러볼 수가 없겠군요.>
<무슨 말이에요, 토마스 영식. 당신은 저와 친한 친구잖아요. 시골에서 살다 갑자기 공녀가 되어 수도에 올라온 저를 누구보다 보듬어 주는 건 토마스 영식밖에 없어요.>
<메릴 공녀님이 이름을 불러 주시니 가슴이 간질간질합니다.>
<토마스.>
<메릴 공녀님.>
자신을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봐 주는 토마스 생각에 메릴은 속으로 나오는 한숨을 삼켰다.
토마스는 그림과 음악에 조예가 깊으며 자신처럼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예법과 사교계에 얽매이지 않는 점도 자신과 닮았다.
무엇보다 그의 파란 머리칼이 매력적이었다.
<저희 집안에서는 사내는 대대로 푸른 머리카락을 지니고 태어납니다.>
<그래요? 그러면 쿠룬달스 백작도 머리칼이 푸르겠네요.>
<그렇습니다.>
그의 머리카락은 하늘 같다가도 자세히 보면 바다 같았다. 그가 가까이 올 때마다 풍기는 그의 향긋한 프리지어 향은 맡고 있어도 더 맡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매번 메릴이 황태자의 약혼녀이며, 미래 황후가 될 사람이니 친구로만 지내야만 한다고 말했다. 자꾸만 선을 긋는 토마스에게 더 애가 탔다.
그래서 매일 오던 황궁 방문도 요즘 줄여 가며 토마스를 만나고 있다.
자기가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리게 된 까닭은 황태자 파츠래리 때문이다.
자기를 외롭게 내버려 두고 메이아처럼 잔소리만 한다. 황태자와의 약혼을 너무 섣부르게 한 게 아닌가 싶다. 그저 황후가 될 메이아에게 고개 숙이기 싫었을 뿐이었는데…….
한숨만 계속 나왔다.
메릴의 표정이 점차 좋아지지 않자 티 파티의 귀부인들은 그녀의 눈치를 살살 보았다.
그중에 한 귀부인이 메릴에게 질문하며 대화의 장을 열었다.
“공녀님은 어떤 취미를 가지고 계시나요?”
“저야 뭐, 차 마시고 책도 읽고 그래요.”
“어머, 책이요? 독서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어떤 책을 보시나요?”
메릴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여러 가지 봐서 기억이 안 나네요.”
성의 없는 답변에 질문을 던진 귀부인은 부채를 펼쳐 자신의 입을 가렸다.
더는 질문하지 않겠다는 뜻이며, 대화하기 싫다는 제스처였다. 자리에 있던 귀부인들과 서로 눈짓을 오가며 메릴의 행동과 언행에 티를 내지 않고 불쾌해했다.
문을 열고 시종이 들어와 들어와서 외쳤다.
“페르젠 후작 부인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 말에 모두 술렁거리고 낮게 속삭였다.
“아니, 갑자기 후작 부인께서는 왜?”
“뻔하죠. 새로운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인 메릴 공녀님을 보러 온 것일지도.”
“여전히 미모가 아름다우시네요.”
“그러게요.”
그리고 다들 똑같이 생각했다.
메릴이 그 언행을 고치지 않는다면 엄격하기로 소문 난 페르젠 후작 부인이 가만있지 않으리라는 걸.
페르젠 후작 부인 라일라는 시녀가 안내해 준 자리로 이동해 자리에 앉았다.
“다들 오래간만입니다.”
“어머, 페르젠 후작 부인 정말 뵙고 싶었어요.”
“세상에, 오늘 드레스 매우 예쁘네요.”
“어머나, 그 드레스! 설마 디자이너 클레리라 작품 아닌가요?”
“역시 페르젠 후작 부인 눈썰미 좋으시네요.”
“당연하죠. 저도 그 디자이너의 팬인걸요.”
라일라의 입장만으로 귀부인들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지고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변했다.
분위기가 좋아질수록 메릴의 표정은 곤혹스럽게 변해 가기 시작했다.
이유는 바로 페르젠 후작 부인이 자신에게 제대로 인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페르젠 후작 부인!”
“아, 하츠벨루아 공녀.”
“공녀? 공녀님이 아니고 공녀? 페르젠 후작 부인은 제가 뭐로 보이시나요?”
처음부터 공격적인 말투에도 라일라는 시종일관 여유롭게 굴었다.
“당연히 하츠벨루아 공녀시죠.”
“전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예요. 들어오셨으면 저에게 먼저 예를 갖춰 인사를 해야 맞는 게 아닌가요?”
메릴은 얼굴을 팍 찡그리며 말했다.
“아니죠. 공녀가 먼저 나에게 인사를 해야 했습니다.”
“뭐라고요?”
메릴의 발언에 귀부인들은 얼굴이 빨개진 채 웃음을 참으려는 모습이 보였다.
“다들 왜 그러시는 겁니까! 제 말이 틀렸습니까?”
자리에 앉아 입을 가리고 있었던 귀부인은 부채를 다시 접으며 말했다.
“네, 공녀님께서 틀리셨습니다.”
틀렸다고 말하는 그 귀부인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메릴은 당당한 귀부인들의 모습에 다소 당황스러워졌다.
“그래도 전 미래의 황태자비예요. 황후가 될 거라고요! 그러면 저에게 예의를 갖춰야죠!”
라일라는 메릴을 보며 웃었다.
“인사 먼저 해 주지 않아서 화나신 겁니까? 메이아 공녀는 이렇게 목소리 높여 본 적이 없으셨는데…….”
메이아와 비교하는 발언에 메릴은 발끈했다.
“여기서 왜 메이아 이야기를 왜 하는 거예요! 지금 페르젠 후작 부인은 황태자 약혼녀한테 인사를 하지 않으셨어요! 그게 중요하죠!”
“예전에 메이아 공녀는 저에게 먼저 인사했답니다.”
“전 메이아와 달라요.”
“네, 아주 많이 다르시네요. 여러모로.”
메릴은 이야기할수록 자신에게 뭔가 불리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귀부인들은 웃음을 참는 모습이 보였고, 페르젠 후작 부인의 얼굴은 여유로웠으며 자꾸 이 자리에 없는 메이아를 꺼내 들었다.
메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여기에 있고 싶지가 않았다.
“전 이만 아파서 가 볼래요. 황후마마한테 전해 주세요.”
페르젠 후작 부인은 황제 폐하의 여동생이다. 이 자리에 그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다.
그러므로 후작 부인 타이틀이 아니더라도 라일라에게 메릴이 먼저 인사하는 게 맞는 것이다.
시녀 한 명이 급하게 메릴을 붙잡으며 말했다.
“안 되십니다, 메릴 공녀님.”
“뭐라?”
“가시면 안 됩니다. 황후마마를 기다…….”
철썩!
메릴은 한 손을 올려 시녀의 뺨을 세게 내려쳤다.
“내가 아프다는데. 못 가게 해? 감히 네가 뭔데!”
뺨을 맞고 고개가 꺾인 시녀는 바로 무릎을 꿇고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니다.”
시녀는 메릴에게 뺨을 맞고 가엾게 몸을 떠는 자신이 불쌍해져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시녀는 메릴에게 그래도 가지 말아 달라고 이야기해야 했다.
티 파티를 나가 버리면 황후의 체면에 먹칠을 하는 짓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너 앞으로 내 눈에 보이지 마.”
폭풍 같은 폭언을 들은 메이드는 눈물을 보였고, 귀부인들 모두 메릴을 날카롭게 쳐다봤다.
라일라는 메릴의 행동에 크게 분노했다. 분명 시녀의 행동은 옳았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걸 지적받고 메릴에게 폭행을 당했다.
또한, 시녀가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사람들 앞에서 손을 올리는 건 그만큼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보는 사람까지 불쾌하게 만드는 행동거지였다.
메릴이 지금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순간 황후의 뒤통수를 치고 가는 거와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지금 뭐 하시는 짓입니까! 메릴 공녀!”
라일라의 호통에 놀란 메릴은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그렇지만 자신은 황태자의 약혼녀다. 한낱 후작 부인이 자기에게 호통을 칠 수 없다.
“지금 페르젠 후작 부인, 저에게 언성을 높이신 겁니까?”
“사람들 앞에서 지금 시녀에게 손을 올리신 겁니까?”
“후작 부인께서 이래라저래라 하실 일은 아니십니다.”
“난 메릴 공녀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네.”
라일라는 더는 메릴에게 존댓말을 써 주지 않았다.
“지금 저에게 반말하신 겁니까? 전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입니다. 후작 부인이란 자가 어쩜 이리도 예의 없으십니까?”
“더는 말을 섞었다간 내 기분이 더러워지겠어. 메이아 공녀가 오늘따라 보고 싶군.”
“그놈의 메이아, 메이아. 다들 메이아만! 하…….”
사실 메릴은 이번에 약혼녀 자리를 바꾸면서 일그러진 얼굴로 슬퍼하는 메이아 얼굴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메이아는 오히려 덤덤하고 속 시원한 표정으로 공작가를 떠나 버렸다.
분명 자신이 약혼녀가 되고 승리해야 하는 건데 이겼다는 기분이 도저히 들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계속 메이아를 찾고 자기를 피한다.
“메이아, 메이아! 다들 메이아만 찾지만 이젠 약혼녀는 저란 말입니다! 그것도 황후마마와 황태자 전하도 허락한!”
자긴 아무리 노력해도 메이아가 될 순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메이아만을 원한다.
자기를 원하지 않는다.
“흑.”
메릴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두 떨어졌다. 라일라는 그 모습에 더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울 거면 안 보이는 데…….”
하지만 라일라의 말을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쨍그랑.
신경을 자꾸 건드리는 라일라를 노려보며 테이블 위에 있는 꽃병을 들고 라일라 발 근처에 던져 버렸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아 있던 귀부인들은 메릴의 행동에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시녀와 시종들은 서로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다.
“딸이나 엄마나 똑같아! 예의도 없고 사람 건드리기만 하고, 메이아만 찾고.”
메릴은 흐르는 눈물을 자신의 손으로 훔치며 티 파티 장소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세상에.”
“지금 페르젠 부인에게 꽃병을 던지고 간 거예요?”
“올리비아 영애까지 험담하신 거죠? 저도 지금 듣고도 못 믿겠습니다.”
귀부인들은 메릴의 행동에 망연자실했다. 아무리 화가 난다 하더라도 꽃병을 던지고 가다니.
“페르젠 부인, 괜찮으십니까?”
라일라 또한 메릴이 자신에게 꽃병까지 던질 줄은 몰랐다. 꽃병의 파편이 바로 앞까지 튀었다.
“황후마마께서 오신다면 이 라일라는 먼저 갔다 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제가 어른으로서 메릴 공녀를 몰아세운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페르젠 부인!”
“다들마저 즐겁게 즐기다 가세요.”
메릴과 라일라가 나가 버린 뒤 티 파티는 소란스러운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