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26화 (26/163)

26화

“메릴 공녀가 예비 황태자비로서 준비해야 한다는 걸 잊으셨습니까? 그런데 남에게 티 파티를 맡겼다고 내게 말하는 겁니까!”

메릴은 우물쭈물하며 황후에 말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메릴은 속으로 황후 역시 메이아랑 똑같은 말을 하며 잔소리한다는 생각에 짜증스러움이 올라왔다.

“말해 보세요! 메릴 공녀!”

“저는 티 파티를 열어 본 적도, 계획해 본 적도 없습니다. 시골에서 살다 왔는걸요. 메이아는 저한테 그런 거 하나 안 가르쳐 주고 마탑으로 갔단 말이에요. 그리고 저는……. 그러한 것을 가르쳐 주는 어머니도 안 계신단 말이에요. 흑, 흐끅.”

굵은 눈물 몇 방울 흘리는 메릴의 모습에 황후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

“후……. 이젠 메릴 공녀는 황태자의 약혼녀예요. 미래의 황태자비 즉, 황후가 될 사람이에요. 이번에는 제가 티 파티에 대한 예법을 잘 가르쳐 줄 테니, 당장 노르만 자작 부인에게 그만 준비하라고 하세요.”

엘르민의 어조가 다시 상냥하게 바뀌자 메릴은 나오는 눈물을 손으로 쓱 닦았다.

“난 메릴 공녀가 잘해 주리라 믿어요. 아니, 잘해야 합니다. 메릴 공녀! 내일부터 매일 황궁으로 아침 10시까지 오세요.”

매일 황궁에 오라는 말에 메릴은 순진무구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침 10시요? 11시 30분쯤 안 될까요? 그때 와서 파츠래리 님하고 황후마마랑 저랑 이렇게 셋이 점심 먹고 차 마시고 어때요?”

철없는 말에 엘르민은 미간을 찌푸린 채 이마를 짚었다.

“메릴 공녀, 황궁 어른이 이야기할 때 그 어떠한 말대답도 하지 않고 무조건 ‘네’라고 답해야 합니다.”

“전 제 의견과 생각을 말했을 뿐인데 말대답이라 하시면 메릴은 곤란해요.”

“황궁 예의입니다.”

“황궁 예의라도…… 메릴은…….”

“그만 말하죠. 메릴 공녀, 내일 당장 아침 10시 오세요. 그리고 이만 물러가세요.”

황후는 메릴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엘르민은 메릴이 울먹이며 밖으로 나가자마자 황태자 파츠래리에게로 갔다는 보고를 받았다.

엘르민은 몹시 피곤한 표정으로 목덜미와 머리 위주로 시녀들의 마사지를 받기 시작했다.

그 뒤 메릴은 첫날 아침에는 10시에 맞춰 황후궁에 도착했다.

황후는 최선을 다해 가르쳤다.

티 파티 계획을 세우는 방법과 아랫사람에게 지시하는 걸 알려 주었다.

물론 다른 귀부인에게 부탁해서 교육하려고 했지만 거부하는 부인들이 많아 황후 또한 어쩔 수가 없었다.

황후는 더는 말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잘 배웠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지만 메릴은 점점 10시 5분, 10시 10분, 10시 30분……. 마지막 날에는 11시에 도착했다.

지각의 이유는 몸이 좋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전혀 몸이 아파 보이지 않았다.

“메릴 공녀, 몸이 이젠 괜찮은가 보군.”

“엄청나게 아팠단 말이에요, 헤헤.”

“메릴 공녀. ‘아침에는 몸이 편치 않아 늦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황후마마’ 이렇게 말해야 하는 겁니다. 언어 예법 수업 잘 받고 있는 거 맞습니까?”

“네, 황후마마.”

엘르민 황후는 메릴과 이야기할수록 스스로 자괴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가르쳐도, 말해도 도통 말을 듣지 않는다. 하츠벨루아 공작가의 힘만 아니었다면…….

메이아가 몹시 그리운 엘르민이었다.

“메릴 공녀, 티 파티를 직접 계획해야 하는 이유가 뭐라 했죠?”

갑작스러운 엘르민의 질문에 메릴은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며 시간을 끌었다.

“첫날부터 가르쳤던 내용입니다.”

“차 마시려고…… 요.”

“안주인이 되기 위한 예비 연습이라 몇 번을 말하는 겁니까!”

“네.”

“요번 티 파티 콘셉트는?”

“메릴 하츠벨루아를 소개하는 자리라 했습니다.”

“그거 말고!”

엘르민은 답답함에 소리쳤다.

“하츠벨루아의 메릴이라고 합니다. 파츠래리 폰 마브로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입니다. 티 파티 계획은 잘 세웠으니 마음껏 즐기세요.”

우지끈.

황후는 결국 들고 있는 깃펜을 부러뜨리고 말았다.

“그냥 공녀는 입도 뻥긋하지 마세요!”

“네? 제가 뭐 틀리게 이야기했나요?”

황후는 메릴을 위해 자기소개 설명 1,000자 정도를 적어 외우게 했다.

하지만 메릴은 그걸 보자마자 한마디 했다.

<저 외우는 거 진짜 못 해요.>

그게 끝이었다. 노력하려는 모습도 안 보였다. 정말 안 외울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것뿐만 아니었다. 도저히 일을 맡길 수가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이번 티 파티에서 망신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지 싶었다.

“아, 머리야.”

“황후마마, 황태자 전하와 함께 점심 먹어요.”

“저는 일이 있어 점심 못 먹습니다. 파츠래리는 일이 있어 집무실에 없을 테니 바로 공작저로 돌아가세요.”

“……네.”

메릴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나갔다.

사용인들은 머리가 아파 쓰러질 것 같은 황후를 부축하며 측은하게 바라봤다.

“의원을 부르겠습니다, 마마.”

“괜찮다.”

메이아가 약혼녀로 있었을 땐 자신의 티 파티에 서로 오기 위해 선물들도 잔뜩 보내기도 하고 잘 보이려고 아부들도 떨었다.

생각해 보면 메이아와 함께하던 티 파티와 모임들은 항상 즐거운 나날이었다.

그리고 귀찮은 일들은 모두 메이아가 앞장서 빠르게 처리해 줬다.

그렇지만 이제는 자신이 와 달라고 초대장을 보내고 있다.

남을 설득해야만 하는 입장이 되니 비참한 기분만 들었다.

메이아가 너무 그립다. 그래도 파츠래리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참아야만 했다.

“전 공작 부부는 왜 그리 허망하게 가서는, 쯧쯧. 메이아 공녀가 6개월만 빨리 태어났어도…….”

바로 결혼을 시켰을 거다. 그렇다면 하츠벨루아 공작가의 힘은 파츠래리가 갖는 거였을 텐데…….

“마마, 괜찮으십니까.”

“비쥬……, 괜찮단다. 아니, 안 괜찮아. 어디서 저런 게. 하…… 아니다.”

아랫사람들에게 내 사람 뒷담화를 할 뻔했던 황후는 자신의 가슴을 꾹 내리누르며 화를 가라앉혔다.

그리고 걱정 많고 탈 많았던 티 파티의 날이 다가왔다.

황후는 피폐한 얼굴로 거울로 바라보며 입장 시간까지 기다렸다.

공동 티 파티의 경우, 지위가 낮은 이가 먼저 티 파티 장소에 도착한 사람들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 그리고 지위가 높은 공동 티 파티 주최자는 마지막에 입장을 한다.

“제발 아무 말 하지 말고. 메릴 공녀가 얌전하게 있길…….”

황후는 태어나서 이렇게 간절해진 적은 처음이었고 신을 찾는 것도 처음이었다.

*

메릴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황궁에 매일 오는데도 혼이 났다.

거기다가 어려운 티 파티 콘셉트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진행하라는 황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완전히 늙은 메이아 같았다. 아니, 메이아보다 더 했다.

메이아는 그래도 한 번만 이야기만 하지만 황후는 했던 말만 앵무새처럼 계속 반복적으로 말해서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다.

무엇보다 사교계 화법이니, 말투니 너무 복잡했다.

차라리 영식들과 와인 한잔 마시고 귀염받으며 노는 게 더 좋은 것 같았다.

‘잘생긴 쿠룬달스 백작 영식 보고 싶다.’

메릴은 현재 억지로 이 티 파티에 참석하게 되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아…….”

한숨을 쉬는 메릴의 눈치를 살짝 본 귀부인이 질문했다.

“메릴 공녀님, 무슨 고민 있으신가요?”

“아니에요. 다들 즐기세요.”

티 파티에는 귀족 가문 대부분의 귀부인들이 와 있었다. 그래서 오고 가는 이야기들 또한 고리타분해서 메릴은 저절로 나오는 하품을 참아야만 했다.

“그 소식 들으셨어요? 비탈라 부인 말이에요.”

“저도 들었어요. 아이가 없으니……. 결국엔.”

“결국, 하녀가 낳은 사생아를 호적에 올렸나 봅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 하녀는 쫓아냈다던데요.”

귀부인들의 이야기를 듣던 메릴은 포크를 내려놓고 짜증이 나는 어투로 말했다.

“아이를 낳지 못해서 하녀 소실로 낳은 사생아를 입적하다니. 저라면 절대 하녀 소실의 사생아 따위 인정하지 못할 거예요. 비탈라 부인은 정말 착하신 것 같지만……. 현명하지 못하신 것 같아요.”

그 말에 다들 침묵이 이어졌다. 노르만 자작 부인이 어색하게 답했다.

“그렇지만……. 메릴 공녀님, 후계가 없었으니 다행이지 않을까요?”

“흥, 차라리 방계 쪽에서 알아보는 게 낫죠. 아니면 첩을 만들어서 애를 만들던가요.”

그 말에 귀부인들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중에 사나후루나 백작 부인이 입을 열었다.

“공녀님께서는 후궁을 반대하신다고 제 딸아이에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공녀님께선 다른 사람에게 첩을 두라는 말을 쉽게 하십니다.”

사나후루나 백작 부인의 말에 옆에 있던 베이그란스 남작 부인이 거들었다.

“첩이란 건 귀족 영애뿐만 아니라 평민들이나 코르티잔도 할 수 있습니다. 알고 하시는 말씀하시는 겁니까?”

메릴 공녀는 순수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 말은 하녀 소실 사생아를 입적할 바엔 그게 낫다는 거죠. 다들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네요.”

해맑게 이야기하는 메릴을 보던 귀부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

사실 귀부인들은 메릴이 어떻게 나오는지 실험 삼아 꺼낸 이야기였지만, 굉장히 실망스러운 대답을 들어 표정이 좋지 않았다.

예전에 메이아와의 대화들이 저절로 회상되었다.

땡땡.

메이아는 스푼을 찻잔에 부딪치며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앞에서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뒤에서 하는 건 귀족으로서 올바르지 못한 행동입니다. 다들 자중해 주시죠.>

그 말에 모두 입을 닫았다. 카리스마 있게 모두를 제압하면 맞는 말만 골라 했다.

군더더기 없는 말과 도도한 눈빛 그리고 오만해 보이는 몸짓은 오히려 당연하게까지 여겨졌다.

그렇게 귀부인들은 메이아를 황후감으로 인정했었다.

하지만 바뀐 약혼녀인 메릴를 보면 뒷말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비아냥거리고 있으니 당연히 다들 심사가 좋지 않았다.

분명 뒷담화를 즐겨할 거라는 것이 안 봐도 뻔했다.

그리고 그 뒷담화의 주인공이 자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메릴을 보는 시선들이 곱지 않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