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해적들을 소탕한 뒤에 유람선에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메이아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그들은 아름다운 아가씨가 용기 있게 해적들을 제압하는 카리스마에 환호를 보냈다.
“하츠벨루아 공녀님이라면 카르펜 제국의 황태자 약혼녀 아니신가요?”
“들어 봤어요. 카르펜 제국의 자랑스러운 사교계의 꽃!”
“그렇지만 근래 하츠벨루아 공작 가문 주인이 바뀌었다는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야기 좀 해 보세요.”
“저도 듣고 싶네요.”
갑자기 들린 걸쭉한 남자 목소리에 귀부인과 영애들의 시선이 모여졌다.
“안녕하십니까. 베르튼가의 아쉴롬입니다. 메이아 하츠벨루아 공녀 이야기에 저도 끼고 싶습니다.”
“호호, 여자인 저희도 그분만 보면 난리 나는데 영식들은 오죽할까요…….”
“그럼요.”
“빨리 이야기해 주세요. 부인, 너무 궁금합니다.”
메이아의 최근 소식을 알고 있는 귀부인은 차 한 모금을 마시며 목을 축였다.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메이아 공녀님의 부모님이신 아름다운 전 공작 부부는 돌아가셨습니다. 산사태에 휩쓸려서 말이죠. 참고로 깊은 골짜기에 떨어지셔서 아직 부부의 시신을 찾지 못했답니다.”
“어머나.”
“안타까워라.”
“정령사에게 부탁을 해도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답니다. 아무래도 거친 물살에 시신이 훼손돼서 그럴 수도 있다는데 저도 자세한 건 모르겠네요. 두 분이 돌아가시고 다들 마음 아파했어요.”
그럴수록 사람들의 표정이 어둡게 변해 갔다.
“메이아 공녀님은 아직 성인이 아니므로 공작위를 받을 수가 없었답니다. 카르펜 제국은 스무 살이 되는 해 첫날에 모여 연회를 즐기면서 한 번에 성인식을 올립니다.”
“저희 시리우스 제국과 다르네요.”
“예, 카르펜 제국의 성인식은 그렇답니다.”
“부모님 돌아가시고 여행을 떠나신 거네요.”
메이아의 최근 정보를 알고 있던 귀부인은 다시 한번 차로 목을 축였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집중했다.
“카르펜 제국의 황태자 전하와 약혼 10년 만에 파혼당하셨답니다. 그 약혼자리는 메이아 공녀님의 사촌 언니로 바뀌었답니다.”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파혼당하고 속이 말이 아니시겠네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솔직히 공녀님께서 이 유람선을 타신 덕분에 우린 구원받았잖아요.”
“그것도 그러네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하는데 어쩌면 우리를 구해 주기 위해 신이 메이아 공녀님을 보내 주신 것 같아요.”
귀부인의 말에 다들 침묵하다 이윽고 한 영애가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아니, 지금부터 저는 무조건 메이아 공녀님 편이 되겠어요.”
사람들은 메이아의 안타까운 사정을 계속 이야기했고, 신문 기자 아쉴롬은 이렇게 좋은 먹잇감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면 메이아 공녀님을 껴안으신 남성분은?”
“시리우스 제국의 황위권을 가지고 계신 플로렌스 대공님이세요. 미혼이시죠.”
아쉴롬의 눈빛이 빛났다.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을까요?”
“호호. 물론이죠.”
갑판 위에 의자에 앉아 바람을 느끼는 메이아의 눈치를 살피며 사람들은 다가와 인사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살피던 한 사람은 책을 덮는 메이아를 보자마자 앞으로 나와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메이아 하츠벨루아 공녀님, 제 이름은 허트필린가의 조쉬입니다. 저번에 살려 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제 딸이 욕보일 뻔했는데,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뒤에 있던 사람도 나서 말했다.
“제 부인 또한.”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사람도.
“제 남편을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함을 전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메이아는 쉴 수가 없어 결국엔 아센에게 정중하게 사람들을 돌려보낼 수 있도록 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너무 고마워했다.
메이아에게 갖은 금은보화들을 비롯한 선물들까지 들어오기 시작했다. 받지 않으려고 돌려보냈지만 묵고 있는 방 앞에 선물을 두고 갔다. 갈수록 선물들은 쌓여 갔다.
갑판에서 의자에 앉아 쉴 때도 멀리서 다이아몬드를 슬쩍 놓고 가는 이들도 있었다.
메이아는 사람들의 선물을 주고 싶은 마음을 이해하고, 들어오는 선물을 야무지게 마법 가방에 다 넣었다.
사람들의 고마움과 선물보다 그녀가 신경 쓰이는 것은 바로 테오도르였다.
해적들을 물리치고 뛰어와 꼭 껴안은 이후부터 모습을 감추고, 자신의 눈치를 보며 뒤에서 몰래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빨개진 얼굴을 가리며 사라졌다.
메이아는 결국 애튼을 불려 물어보았다.
애튼은 메이아의 질문에 이해한다는 듯 답했다.
“그날 메이아 공녀님을 껴안아서 부끄럽고 죄송하다고…….”
“부끄럽다고요?”
“착하고 순수하신 분입니다. 어릴 때 전 대공 부부께서 돌아가시고, 오로지 대공가 일에만 집중하고 사셨습니다.”
메이아는 그가 피하는 원인을 알게 되었다. 짧은 숨바꼭질의 시작이었다.
테오도르는 한 짓이 있기에 메이아를 보기 부끄러웠다. 머리는 창피하니 피하자고 속삭이고, 마음은 도망가지 말라고, 그녀가 보고 싶다고 말하지만 머리와 몸은 따로 놀았다.
“미치겠다.”
그는 살면서 이런 감정은 처음 겪는다. 떨리고 초조하면서 무척 애틋한 감정이었다.
이걸 사랑이라고 말한 애튼을 보며 테오도르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며 안절부절못했다.
꼭 주인 잃은 강아지 꼴에 애튼은 뒤에서 한숨만 쉴 뿐이었다.
“대공 각하! 그렇게 도망만 다니시다가 애먼 놈이 공녀님한테 다가가면 어쩌시려고 합니까!”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정말 심장이 정지할 것 같아. 숨쉬기도 어려워……. 그녀만 보면 가슴이 너무 간질간질하고, 너무 두근두근 뛰고, 몸은 저절로 배배 꼬이고, 머리털을 모두 뽑아 버릴 만큼 가슴이 벅차. 안 그러고 싶은데 내 몸도 마음도 말을 안 들어.”
테오도르의 말에 애튼은 한숨만 쉬었다.
“에휴, 대공 각하, 그걸 보고 사랑이라 하는 겁니다.”
“공녀님에 대한 이 마음을 사랑이라고 표현해도 되는 걸까?”
“사랑에 빠지게 되면 그 사람을 보고만 있어도 부끄러워지죠. 그렇지만 부끄럽다는 이유만으로 피하게 된다면 사랑은 도망갑니다.”
애튼의 진심 어린 조언에 테오도르는 입을 꽉 다물었다.
사랑이 도망간다는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건 숨 쉴 수 없는 것과는 다른 통증이었다.
“도망간 사랑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애튼은 자신의 경험과 지인들 경험 토대로 테오도르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헤만의 짝사랑을 먼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대공 각하와 매우 비슷한 상황이니까요, 흠흠.”
애튼은 자기가 모시는 그가 좀 더 용기를 가지고 메이아에게 다가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 사랑에 대해 조언했다.
애튼과의 대화에서 용기를 얻은 테오도르는 메이아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터질 것 같은 가슴 때문에 자꾸 숨게 되었다.
결국, 머리가 시키는 대로 피해 다니던 그는 그녀와 우연히 마주치자 심장이 또 쿵 하고 내려앉았다.
“테오도르 대공님, 왜 피하세요?”
그녀가 씩 웃으며 다가오자 계속 심장은 쿵쿵거렸다.
“어디 안 좋으세요?”
“그날 죄송합니다. 그때 지켜 드리지도 못하고 함부로 껴안기도 했고…….”
‘무엇보다 자꾸 당신의 몸에 닿았던 그 달콤한 기억들이 절 괴롭힙니다.’
……라고 말할 수 없었다.
“너무 부끄럽고 죄송해서…….”
그날은 정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자괴감에 빠져 축 늘어진 테오도르를 본 메이아는 아주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테오도르 대공님, 손.”
“네?”
“손 주시겠어요. 손.”
테오도르의 얼굴은 새빨간 앵두처럼 점점 익어 갔다.
“손이요?”
“에스코트한다 생각하시면서 손을 주세요. 우리 손은 몇 번 잡아 봤잖아요.”
테오도르는 질끈 눈을 감고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한 손을 수줍게 메이아에게 내밀었다.
메이아는 그의 손을 살짝 잡아끌어 당겼다.
테오도르는 속절없이 메이아가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대공님, 왈츠 잘 추시나요?”
“예.”
“대공님, 우리는 그날 왈츠를 춘 거라고 생각하세요.”
“왈츠요?”
메이아는 테오도르에게 바짝 다가가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느긋이 말했다.
“제가 테오도르 대공님 어깨에 손 올리면 기분 나쁘시나요?”
“아닙니다. 얼마든지 올려 주십시오.”
다가온 메이아게서 풍겨 오는 은은한 향기를 맡자 테오도르는 자신의 호흡을 멈춰 버렸다.
생명의 위험이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그녀 곁에서 떨어지고 싶진 않았다.
사랑은 정말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죽어도 좋으니 떨어지기 싫었다.
“왈츠를 추기 위해선 여자의 한 손은 상대방 어깨에 얹고 남성은 여자의 허리에 손을 올리죠?”
“네.”
테오도르는 입을 오물거리며 떨리는 심장에게 그만 쿵쿵거리라며 속으로 계속 외쳤다.
그렇지만 심장은 말을 듣지 않았다.
심장 소리가 그녀에게 들릴 것 같아 부끄러웠다.
메이아와 눈이 마주치자 결국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메이아는 그의 어깨에서 손을 떼면서 말했다.
“테오도르 대공님이 저랑 친하게 지내시기로 해 놓고 이렇게 미안하다고 피해 버리시면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나요?”
메이아의 발언에 테오도르는 눈을 뜨고 다급하게 말했다.
“그건 오해입니다. 전 메이아 공녀님과 친하게 지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친하게 지내기 위해선 절 피하시면 안 되겠죠?”
테오도르는 갑자기 ‘부끄러워 피한다면 사랑이 도망간다’라고 했던 애튼의 말이 떠올랐다.
‘그건 안 돼!’
“안 피하겠습니다.”
메이아는 그의 답변에 만족해하며 미소 지었다. 그녀의 미소에 테오도르는 화답하듯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대공님은 웃으니깐 보기 좋네요. 자주 웃어요.”
“메이아 공녀님께서 제 웃는 얼굴이 보기 좋으신 겁니까?”
“웃으니깐 더 보기 좋아요. 이젠 시선 피하지 말고 얼굴 쳐다봐 주세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살아 계셨던 어린 시절에는 분명 웃었다.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즐거운 일은 웃음과 연관이 있었다.
그렇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웃음이 무엇인지 잊었다. 웃을 일도 없었고 사람과 대화를 통해 웃을 만한 일조차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를 만나고 이젠 웃음의 의미를 알아 가는 기분이 들었다.
저절로 입꼬리에 호선이 그려진다.
“자주 웃겠습니다.”
‘당신에게만…….’
테오도르는 자신의 치아를 만개하며 활짝 웃었다. 바다의 바람은 상쾌하게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