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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23화 (23/163)
  • 23화

    “죄송합니다, 메이아 공녀님. 이게, 그게 말이죠.”

    메이아는 고개를 젓고 온화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얼굴에 흘러내린 땀을 닦아 주었다.

    “괜찮아요. 걱정되어서 뛰어오신 거죠?”

    자신의 심정까지 이해해 주는 그녀의 말에 테오도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도 되고.”

    ‘당신이 다칠까 봐…… 무서웠어요.’

    뒷말을 삼킨 테오도르를 바라본 메이아는 웃었다.

    “걱정 고마워요, 테오도르 대공님.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와서 절 껴안을 줄은 몰랐어요. 얼추 해적들 정리는 다 끝났어요. 쥬안이 해적단 두목도 처리했고요.”

    그제야 테오도르는 허공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져 고개를 위로 들었다.

    무수히 떠 있는 얼음 창들에 느껴지는 마력은 분명 메이아의 것이었다.

    “대단하십니다.”

    감탄하는 테오도르를 향해 메이아는 손을 뻗어 그의 옷깃을 붙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환호 섞인 비명을 질렀다.

    테오도르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라면서 속수무책으로 메이아에게 끌려갔다.

    쿵쾅쿵쾅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공녀님.”

    테오도르가 부끄러움과 당황함 속에 다시 한번 생각이 가출하려고 했을 찰나, 메이아는 테오도르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젠 그만 허리에서 손 떼 주세요.”

    메이아의 말을 듣자마자 허리에서 손을 뗀 테오도르는 잔뜩 얼굴을 붉히며 허둥지둥했다.

    그리고 눈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선물을 기대했지만, 그 선물을 못 받은 기분이 들었다.

    해적들은 두목을 잃었고, 메이아를 이길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항복했다.

    메이아는 자신의 가방에서 마법 구속구를 꺼내 쥬안에게 건넸다.

    “마력 봉인구야. 저 대머리 마법사에게 채워, 쥬안.”

    “네.”

    쥬안은 해적단에 있는 대머리 마법사의 손목에 봉인구를 채웠다.

    그렇지만 메이아는 조금은 의아했다. 마법사라면 굳이 이런 해적질을 하지 않아도 돈을 벌 방법들이 대단히 많기 때문이다.

    “흠.”

    “아가씨, 무슨 고민이라도?”

    “이상해서 그래. 아주 이상해서…….”

    “무엇이?”

    “왜 마법사가 이렇게 해적질을 하는지 말이야.”

    메이아의 말을 뒤에서 듣고 있던 테오도르는 슬쩍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쥬안은 단검을 꺼내 들고 곧 불이라도 뿜을 것 같은 거친 눈빛으로 테오도르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쥬안.”

    “네, 아가씨.”

    “타국의 대공 각하시다. 너무 예의 없게 굴면 안 돼.”

    메이아의 말에 쥬안은 자신의 주름진 미간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가씨를 제멋대로 껴안은 남자가 타국의 대공 각하라는 이유만으로는 제가 용서되지 않습니다.”

    “내가 괜찮아.”

    메이아를 졸졸 쫓아다니는 테오도르가 아까 두꺼운 갑판 문을 검으로 베고 들어오는 걸 쥬안은 하찮게 쳐다보았다.

    이미 모든 상황을 메이아가 정리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만 해도 테오도르가 메이아에게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도 쥬안은 이해했다.

    ‘가까이 다가가서 아가씨 방패나 되어 버려라’라며 속으로 웃었다.

    그렇지만 그 이후에 테오도르가 한 행동은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았다.

    소중한 아가씨를 꽉 껴안아 버렸다. 해적들을 잡아야 하는 상황만 아니었다면 당장 다가가 목에 칼을 갖다 대었을 거다. 생각만 해도 열이 받는다.

    테오도르는 자신을 용서해 준 메이아를 바라보며 연신 죄송하다는 말만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메이아 공녀님은 마음이 넓으시군요. 기분 나쁘실 수도 있었을 텐데.”

    메이아는 테오도르가 자신을 껴안았을 때를 떠올렸다.

    덩치 큰 블랙 레트리버가 무섭다며 안겨 온 것 같았다.

    “깜짝 놀란 건 사실이지만. 기분 나쁘진 않았어요.”

    ‘응, 귀여웠어.’

    메이아의 말에 테오도르는 주먹을 쥐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입꼬리를 가렸다.

    입꼬리를 한껏 끌어 올리며 갑자기 미소 짓는 테오도르의 모습에 메이아는 의아해하며 물어보았다.

    “대공님,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갑자기.”

    “기분 아주 많이 좋습니다.”

    그 모습에 쥬안은 그저 말없이 분노했다. 날파리가 날아왔다.

    그것도 아주 시커멓고 커다란 날파리.

    ‘저 날파리를 어떻게 내쫓지?’

    쥬안은 끙끙거리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긴박했던 해적 소탕 작전은 빠르게 마무리가 되어 가기 시작했다.

    선장과 부선장은 바로 메이아에게 달려갔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마움을 받기 위해 한 것은 아니다. 당연히 해야만 한 일이었다.

    이 일로 분명 사람들은 메이아 하츠벨루아 공녀를 엄청나게 정의로운 사람이라 칭송하리라는 건 알고 있지만 메이아는 자신이 그렇게 정의롭지 않다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저, 해적들을 처리하지 않았다면 내가 받을 불이익을 먼저 생각했기에 움직였을 뿐이다.

    내가 공격하지 않는다면 공격받으니 말이다. 난 그런 사람일 뿐이다.

    “쥬안은 그림자의 권능으로 해적들 구속하고 곧 테일론에 도착하니 그때 경비대에 넘기도록 해. 마법사는 마탑에 넘길 거야.”

    “알겠습니다.”

    쥬안은 다시 한번 테오도르를 말없이 노려본 다음에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애튼은 그 모습에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그림자 일족은 자기가 평생 충성을 맹세한 사람을 맹목적으로 따른다는 말이 사실이군요.”

    애튼의 말에 메이아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쥬안은 제 ‘가족 같은 아이’예요.”

    메이아에게 가족 같은 사이란 자신에게 무한의 충성심과 애정으로 뭉쳐 있는 최고의 무기나 다름없었다. 세상이 반으로 나뉘더라도 오로지 내 편을 들어 주는 가족 ‘같은’ 사이 말이다.

    메이아는 쥬안을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한다. 그날은 달이 유난히 빛나던 밤이었다.

    모든 것이 잠들고 어둠에 잠겨 있을 때였지만 메이아는 늦게까지 공부를 하느라 잠들지 않고 있었다.

    유모 유디도 그리고 메이드들도 자신의 곁을 조용히 지키고 있었다.

    털썩.

    공부하고 있는 메이아는 뭔가가 등 뒤에서 털썩 쓰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메이아는 뒤를 돌아보았고, 유모와 메이드가 바닥에 쓰러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어두운 인영을 쳐다보며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었다.

    <죽이지 않고 기절시킨 거니?>

    <…….>

    <고마워. 죽였다면 난 참 괴로웠을 거야. 내 가족 같은 사람들이거든.>

    쥬안은 자신 앞에서 덜덜 떨 줄 알았던 작은 여자아이가 오히려 덤덤히 말하자 속으로 크게 당황했다.

    <공작저 경비가 이렇게 허술했던가? 그게 아니라면 네가 뛰어난 건가?>

    <난 당신을 죽이러 이곳으로 들어왔어. 안 무서워?>

    <내가 왜 무서워할 거라고 생각하니?>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은 없어?>

    메이아는 깃털 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너 같은 암살자를 내가 몇이나 만났을 것 같아?>

    <뭐?>

    <날 죽이고 얼마 받기로 한 거야? 아니면 다른 걸 받기로 한 거야?>

    <알 거 없어.>

    쥬안에겐 아픈 여동생인 아그니타가 있었다.

    그림자 일족은 그 수가 매우 적은 소수 민족이며, 쥬안과 여동생은 인간과 그림자 일족의 혼혈아였다. 쥬안은 그림자 일족의 권능이 일어났지만 여동생은 일족의 능력이 생기지 않았다.

    그로 인해 몸 안의 그림자 일족의 피와 평범한 사람의 피가 부딪치니 몸이 견디지 못해 여동생은 계속 앓고 있었다.

    아그니타 몸속에 있는 그림자 일족의 피를 누르기 위한 비용은 상당히 비싼 편이다.

    쥬안은 동생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팔았다. 다행히 그림자 일족의 권능을 이용한 암살 일로 제법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이 마지막 일이다.

    메이아 하츠벨루아만 죽인다면 이젠 돈 걱정하지 않고 동생을 살릴 수 있다.

    여동생을 치료할 수도 있다. 이것만 생각했다.

    <너 이름이 뭐야?>

    <알 거 없어. 널 죽일 거야.>

    <죽이겠다고? 그리고 뭘 얻을 거야?>

    쥬안에게 메이아는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난 하츠벨루아 공녀야. 내가 세상에서 구할 수 없는 건 시간밖에 없어.>

    그 말에 쥬안은 멈칫했다.

    메이아는 그 찰나의 멈칫거림을 놓치지 않았다.

    <난 널 배부르게 해 줄 수 있어. 네가 그들을 배신하더라도 너에게 불이익이 가지 않게 할 수 있어. 혹시 그들이 가족을 인질로 삼고 있는 거니? 큰 빚이 있니? 원한다면 널 죽은 사람으로도 만들어 주고 새 출발 도와줄게. 지금까지 나에게 온 여러 암살자가 내 도움을 받았어.>

    쥬안은 점점 밝아져 오는 방 안에서의 메이아를 바라보며 답했다.

    <믿을 수 없어.>

    자신 앞에 있는 암살 대상자인 메이아의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에는 어떠한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풍겨 오는 분위기가 제법 매서웠지만 한편으로는 부드러웠다.

    도저히 어린 소녀가 가질 법한 오라와 분위기가 아니었다.

    메이아는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 상냥한 어조로 쥬안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어떠한 사람도 비밀은 지킬 순 없어. 입이 조용하면 몸짓으로 말할 것이고, 그렇게 그의 모든 곳에서 언젠가는 비밀이 새어 나오는 게 바로 사람이지.>

    <무슨 말이지?>

    <넌 날 처리하게 된 동시에 너도 처리될 거야. 넌 증인이자 가해자니깐.>

    쥬안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런 건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나는 그림자 일족이라. 그림자에 숨으면 괜찮아.>

    <가족들은 없는 거니?>

    자신은 그렇게 숨을 수 있겠지만. 여동생은? 쥬안은 메이아의 말에 혼란스러워졌다.

    <난 너의 가족들을 안전하게 지켜 줄 수 있어. 약속해. 어둠 속에 있는 너에게 나는 얼마든지 관대해질 수가 있어. 그렇지만 빛을 등지고 떠난 사람은 빛을 볼 때마다 후회하게 돼.>

    메이아는 쥬안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면 ‘운명’이 너를 삼킬지니.>

    메이아는 분명히 쥬안에게 말하고 있었다. 자신을 죽이는 잘못된 판단을 하지 말라고…….

    그리고 쥬안은 운명에 삼켜지지 않기 위해 손을 뻗었다.

    <여동생이 아파. 돈이 필요해. 집도, 먹을 것도 없어.>

    메이아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도와줄게. 여동생도, 너도 내 가족 같은 사람이 되어 줄래?>

    그렇게 쥬안과 아그니타는 메이아의 둘도 없는 가족 같은 사이가 되었다.

    메이아 덕분에 아그니타는 건강을 순식간에 되찾았다.

    그들에게 메이아는 돌아갈 집이고, 보살펴 준 부모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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