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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20화 (20/163)
  • 20화

    애튼은 생각에 잠겼다.

    안 지 얼마 안 되었지만 메이아는 지금까지 보아 온 영애 중에서도 가장 기품이 넘치고 아름답고 똑똑했다.

    테오도르 옆을 지킬 여자로 정말 잘 어울린다는 생각만 들었다.

    계속 생각하다 보니 애튼은 하나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현재 플로렌스 대공가의 안주인 자리는 비어 있다.

    정확히 말하면 테오도르가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다.

    전 대공 부부의 죽음 이후, 마음의 문을 닫고 다가오는 사람에게 적당한 선을 그으며 거리를 두었다. 가족의 죽음은 그에게 그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러니 저절로 연회나 파티에 참여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아름다운 여자들을 거부했다.

    시리우스 3세 황제 또한 그 부분을 이해해 주며 플로렌스 대공이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 잘 일어날 수 있도록 지지해 주었다.

    그리고 현재 열일곱 살이 된 테오도르는 대공가를 잘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테오도르는 메이아를 쫓아 안 타도 되는 유람선까지 타고, 에스코트를 하고, 녹아내린 표정으로 헤실헤실 웃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

    애튼은 저녁 식사를 하는 메이아와 테오도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테오도르의 태도만 보더라도 굉장히 메이아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게 눈에 보였다.

    게다가 둘 사이에서는 대공 부부가 할 법한 대화들이 오고 갔다.

    “실수했다고 사용인들을 험하게 다루는 것은 그들에게 공포를 심어 줄 뿐이지 충성스러운 마음을 끌어내지는 못하죠.”

    “저도 메이아 공녀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공포심으로 인해 생기는 충성심과 노블레스 베풀어 생기는 충성심은 다르죠. 전 후자를 더 지지할 뿐이에요.”

    오래간만에 보는 테오도르의 밝은 표정이 애튼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저런 분이 대공비가 되셔야지만 대공가는 안정된다!’

    애튼은 메이아와 대화하는 테오도르를 쳐다보며 눈썹을 치켜들었다.

    ‘저 봐. 쳐다보고 대화하느라 음식도 제대로 못 드시고.’

    애튼이 보기에 메이아가 무슨 말을 하든 귀까지 빨개지며 답변하는 테오도르는 사랑에 빠진 순진한 남자의 모습으로 보였다.

    무엇보다 자신과 단둘이 있을 때마다 테오도르는 메이아로 시작해서 메이아로 이야기를 끝낸다. 말끝마다 ‘메이아, 메이아’. 본인은 그게 좋아하는 감정인지 뭔지 모르는 것 같지만 그건 훌륭하고 유능한 보좌관 자신이 하나씩 알려 주면 될 일이다.

    자신이 테오도르의 사랑을 이룰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정략혼보다는 마음에 드는 여성과 이루어지는 것이 테오도르에게도 훨씬 행복일 테니 말이다.

    ‘좋았어!’

    애튼은 비장하게 주먹을 쥐며 다시금 다짐했다.

    *

    메이아는 새벽에 일어나 유람선의 갑판 위로 올라갔다.

    시원한 바람이 잔잔한 음악처럼 들려오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시간이 마음에 들었다.

    “오늘은 이걸 읽어 볼까.”

    메이아가 요즘 푹 빠져 읽고 있는 책은 과거의 영웅 루벨린이 쓴 일대기다. 그는 자신의 일기 속에 힘들었던 고난의 시기와 위험의 순간 그리고 살아가면서 사람은 왜 계속 배우는 걸 멈추면 안 되는지에 대해 적었는데, 메이아는 그런 철학적인 글이 마음에 와닿았다.

    [나는 지금 선택지 앞에 놓여 있다. 만약에 회귀할 수 있는 마법을 쓸 수 있었더라면 이 세 가지 모두를 선택하겠지.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덜 후회하는 쪽으로 가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 회귀할 수 있는 마법을 모른다. 만에 하나 배신당하는 결과를 겪게 되더라도 내 선택에 후회한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겠지.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혔다며 아파해선 안 되겠지…….]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다는 문구에서 파츠래리의 약혼녀 자리가 메릴 언니로 바뀌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과연 자신이 사라진 카르펜 제국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까?

    안 궁금한 것은 아니다. 궁금하다.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신경이 쓰였다.

    한순간에 최고의 자리에서 쫓겨난 나에 대해 사람들이 과연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을까?

    비운의 주인공이 된 황태자의 전 약혼녀? 불쌍한 여자?

    분명한 건 그들이 뭐라고 이야기하고 생각하든 그 진실과 상관없이 자기 자신이 이미 사람들의 말을 상상해 마음에 스스로 상처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도저히 기분이 도저히 가라앉지 않았다.

    “정말 엉망이다.”

    메이아는 책을 덮고 다시 한번 바다 지평선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귓가에 생생히 들려오는 부모님의 목소리에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오른다.

    <메이는 훌륭한 황후마마가 될 거야!>

    <우리 딸이 최고야.>

    자신은 황태자의 약혼녀로서 미래 황후로서 철저한 교육을 받아 왔다.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아니, 필요 자체가 사라졌다가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자신은 마탑에 가서 스승인 푸링을 만난 뒤에 뭘 하면 좋을까.

    더는 자신이 나아가야 목표도 이젠 없다.

    자신은 이젠 황태자의 약혼녀가 아니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린 것 같다. 아니, 잃어버렸다.

    앞으로 내가 뭘 해야 할지, 뭘 결정해야 좋을지도 모르겠다.

    오로지 황후가 되기 위해서만 달려왔다.

    ‘그렇다면 이젠 달리지 못하는 나는 뭘 하고 싶은 걸까.’

    폭풍우가 지나가야지만 새는 둥지에서 나와 노래한다고 그랬다.

    하지만 폭풍우가 지나가도 새는 쉽게 둥지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이미 폭풍우 때문에 날개가 꺾인 새는 두 번 다시…… 날 수 없으니까…….

    메이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두 번 다시 하늘을 날지 못하더라도. 난 그 높은 하늘을 그리워하면 안 돼, 절대.’

    답답함에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물며 과거를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메이아 공녀님.”

    메이아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뛰어왔는지 빨갛게 상기된 뺨과 귀까지 빨개진 테오도르가 뒤에 서 있었다.

    “메이아 공녀님, 일찍 일어나셨네요.”

    “네, 아침에 이렇게 바다 보며 책을 읽으니 좋네요. 테오도르 대공님도 일찍 일어나셨네요.”

    “아침잠이 없는 편이라서요. 아침 검술 훈련하고 나오는 길입니다. 그나저나 무슨 책을 보고 계셨습니까?”

    “과거 영웅 루벨린의 일대기를 읽고 있었어요.”

    “저도 그 책 좋아합니다.”

    “저도 요즘 이 책이 좋아졌어요…….”

    말끝을 잠시 흐리는 메이아를 테오도르는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루벨린의 괴로움과 그리움이 공감되어서요.”

    메이아의 말에 테오도르는 더는 답을 하지 않았다. 말하는 그녀의 얼굴이 꽤 씁쓸하고 쓸쓸해 보였기 때문이다.

    혹시 그녀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는 걸까?

    메이아가 무슨 생각으로 이 시간에 나와 바다를 보며 책을 보다 쓸쓸해하는지 테오도르는 알고 싶었지만 질문은 하지 않았다.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지끈지끈.

    그녀의 어두운 표정을 보자 자신의 왼쪽 가슴이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테오도르는 흠칫했다.

    “왜 그러세요?”

    “아닙니다. 전 괜찮습니다.”

    테오도르의 머릿속은 말 그대로 복잡스러웠다.

    쓸쓸해하는 그녀를 위해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무슨 이야길 해야 될지 모르겠고, 그저 왼쪽 심장이 아팠다.

    ‘나 어디 이상한 건가.’

    어딘가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면서 자신의 왼쪽 가슴 옷깃을 꽉 쥐어 잡은 테오도르의 모습에 메이아는 걱정스럽게 그를 쳐다봤다.

    “어디 아프세요? 표정이.”

    “괜찮습니다. 아침 운동을 열심히 해서 그런지 숨이 차서.”

    그는 말꼬리를 흐리며 머뭇거리다 이내 뭔가 결심한 듯 그녀에게 말했다.

    “쓸쓸해 보이십니다.”

    “제가 쓸쓸해 보였나요?”

    “무슨 생각 중이신지 궁금합니다.”

    테오도르는 용기 내 물어보았다. 메이아는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하늘을 바라보며 답했다.

    “하늘을 날지 못하는 새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늘을 날지 못하는 새요? 그 새 혹시 날개가 다쳤습니까?”

    테오도르의 질문에 메이아는 풉, 하고 웃었다.

    “새가 다쳤다면 치료하면 됩니다. 메이아 공녀님이 키우시는 새입니까? 제가 정성껏 돌보고 치료해 드릴 수 있습니다. 대공가에는 최고의 수의사가 있습니다. 그는 말들을 돌보면서…….”

    메이아는 귀까지 빨개지며 자신에게 최선을 다해 설명하는 테오도르가 귀엽게 느껴졌다.

    과거를 생각하며 말한 날지 못한 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에 우울했던 기분이 날아가는 것 같았다.

    “테오도르 대공님은 자상하시네요.”

    “네?”

    새빨간 사과도 이보다 빨개질 수 없을 것이다. 테오도르는 수줍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뭐가요?”

    “자상하다고 칭찬해 주셔서요. 그런 말은 처음 듣습니다.”

    메이아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쳐다봤다. 작은 칭찬이 그에겐 큰 고마움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아침 식사 전까지 우리 대화나 할까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네, 우리 제법 친한 사이 아닌가요? 서로 이름도 부르는 사이잖아요.”

    테오도르는 메이아의 말에 환하게 웃었다.

    바다 저편에서 고개를 내밀며 떠오르는 태양이 그의 웃음을 한층 더 빛나게 했다.

    메이아는 심장이 콩콩 뛰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갸름한 달걀형의 얼굴에 맑고 빛나는 푸른 눈동자와 길고 풍성한 은빛 머리카락.

    항상 입꼬리를 올리며 웃고 있는 얼굴은 온화해 보이지만 카리스마까지 엿보였다.

    테오도르는 인형보다 더 예쁘다고 느껴지는 메이아가 자신에게 웃어 줄 때마다 심장이 철렁거리며 아파져 온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심박 수가 올라간다.

    심장의 아픔과 동시에 몽실몽실하며 들뜬 기분이 들었다.

    테오도르는 바람에 휘날리는 은빛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고 싶었지만 차마 허락 없이는 하지 못하는 행동이라 테오도르는 상상만 했다.

    “정말 절경이에요, 바다.”

    “메이아 공녀님은 바다를 참 좋아하시나 봅니다.”

    “네, 실제로 본 건 요번이 처음인데 마음에 들어요. 바다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테오도르는 입술 양 끝으로 살짝 곡선을 그리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메이아만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저도 좋. 아. 합. 니. 다.”

    오늘 테오도르는 참 이상했다.

    잘 웃는다.

    머리 위에 꽃이라도 핀 사람처럼 미소를 짓는다. 물론 웃으니깐 더 잘생겨 보이긴 했다.

    그의 당황하면서 얼굴을 잔뜩 붉히는 모습을 보는 게 더 좋은데…….

    메이아는 몸을 돌려 미소 짓는 테오도르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생각해 보니 좋아하게 된 것 같다가 아니고, 좋아하네요.”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테오도르는 순식간에 새빨개진 얼굴로 허둥대지 않기 위해 메이아 앞에서 갖은 애를 다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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