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꽃이 걸어 들어오는 것 같아.’
메이아가 걸어오는 모습에 몽롱한 기분에 휩싸이는 것 같았다.
그리곤 정신을 차리고 메이아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면 외쳤다.
“하츠벨루아 공녀님!”
메이아는 웃으며 한걸음에 달려오는 테오도르를 쳐다봤다.
자신에게 뛰어오는 테오도르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 뛰어오는 해맑은 강아지 같았다. 그래, 개. 멍멍하고 짓는.
“공녀님.”
해맑게 다가와 놓고선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다니…….
“제가 언제 올지 알고 기다리신 거예요?”
메이아의 말 한마디에 테오도르는 축 처진 눈썹과 눈망울로 자신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니, 대공이란 사람이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사과를 하다니!
메이아는 오히려 테오도르의 말에 당황했다.
“죄송하다는 말 듣기 위해서 한 말은 아니에요.”
“그래도 제가 기다려서 기분 나쁘신 건 아니시죠?”
테오도르의 말에 메이아는 멍해졌다.
왜 자신의 눈치를 보며 이야기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아니에요. 기분 나쁘지 않았어요. 겨우 저녁 식사지만 아까의 실례 용서해 주세요.”
메이아의 말에 테오도르는 상냥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답했다.
“저에게 겨우 저녁 식사가 아닙니다. 공녀님과 하는 식사입니다.”
테오도르는 메이아를 쳐다보며 말했지만 시선을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다.
메이아의 맑은 눈동자를 마주했을 뿐인데 부끄러운 기분 때문에 저절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보고 있으면 너무 좋은데 왜 눈이 마주치면 시선을 피하게 되는 걸까!
시선을 피하든 피하지 않든 계속 둥둥거리는 자신의 왼쪽 가슴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아찔함이 계속 느껴졌다.
여전히 빈틈없는 식사 예법을 보여 주는 메이아를 테오도르는 멍하게 쳐다봤다.
꽃을 보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운 생각인 것처럼 테오도르 또한 그랬다. 그녀를 보면 아름다운 꽃이 생각났다.
‘……꽃이야.’
메이아의 식사 모습은 아름다운 은방울꽃이 가만히 앉아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 같았다.
테오도르는 고개를 좌우로 도리질하고 메이아를 다시 쳐다봐도 자꾸 그녀가 은방울꽃처럼 보였다.
“대공 각하, 식사 시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건 예법에 어긋나는 건 잘 알고 계시죠? 아니면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 죄송합니다. 얼굴에 뭐 묻지 않았습니다. 드시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요.
“네?”
“아, 아닙니다. 너무 쳐다봐서 죄송합니다.”
살짝 붉어진 뺨을 손가락으로 긁적거리며 메이아에게서 시선을 거둔 테오도르는 식사에 집중하는 척했다. 한동안 침묵 속에서 식사했다.
그 침묵을 먼저 깬 것은 테오도르였다.
“아까 카페에서 보았던 마리엔느 부인은 잘 돌아가셨나요? 많이 우시던데.”
메이아는 테오도르의 질문에 한숨을 살짝 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리엔느 부인이 자신을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나 자신을 많이 따를 줄은 몰랐다.
자신은 그저 그녀에게 작은 친절을 베풀었을 뿐이다.
<제가 이렇게까지 열심히 사는 이유가 무엇인데요. 황후가 되는 메이아 공녀님 곁을 보필하기 위해서입니다.>
<마리엔느 부인…….>
<공녀님은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절 남작 부인으로 티 파티에 처음 초대 주신 분도…… 아이를 낳았을 때 보내 주신 축하 선물도 모두 공녀님이 처음이었습니다. 전 공녀님에게 사람으로서 아니, 귀족으로서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흐읍.>
<그만 울어요…….>
<어떻게 10년 동안 전하 곁을 지키신 공녀님을 이리 내쫓는단 말입니까!>
작고 초라했던 알렝가의 마리엔느 남작 부인은 자신과 만난 뒤 사람이 점점 변해 갔다.
사업가로 집안을 책임지는 안주인으로서 인맥들 또한 점점 쌓여 가 사교계에서 중요한 인사가 되었다.
황후가 된다면 분명 훌륭한 자신의 사람이 되어줄 사람으로 그녀는 성장했다.
<저는 메이아 공녀님께서 황후가 된다면 옆에서 보필하기 위해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어쩜 이렇게 불행한 일이 겹쳐 오는지……. 흑흑.>
<마리엔느 부인, 전 불행하다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공녀님, 전 마음이 찢어집니다.>
<제가 황태자 전하와 파혼한 일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게 아니면 부모님이 돌아가셨던 것? 그런 일들로 제 불행이 결정되지는 않습니다. 제 불행은 제가 판단합니다.>
아까의 대화를 생각했던 메이아는 질문하는 테오도르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돌아가셨어요. 아까 많이 놀라셨죠?”
“저보다는 공녀님께서 놀라신 것 같아서 걱정되었습니다.”
메이아는 말을 멈추고 테오도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고작 이틀 본 사람이 나의 무엇을 보고 걱정한다고 말하는 걸까?
“절 걱정했다고요?”
“네, 여러 가지 곤란한 일들을 겪으신 것 같았습니다.”
“뭐……, 숨길 이야긴 아니에요.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셨고, 아직 전 성인식을 치르지 않아 공작위를 이을 수가 없어 삼촌이 공작위를 받으셨죠.”
메이아는 테오도르를 바라보며 마저 이야기했다.
“원래는 황태자 전하와 약혼 관계에 있었습니다. 흔한 정략혼이었죠. 그런데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삼촌이 공작이 되니 저희 사촌 언니가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로 바뀌었을 뿐이에요. 흔한 이야기예요…….”
“그래서 여행을 떠나신 겁니까? 그림자 일족만 한 명 데리고.”
메이아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여행이라면 여행이겠네요. 바다가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엘른 항구에 온 거예요.”
자신 앞에 있는 여자는 슬픈 일을 겪었는데도 오히려 괜찮다는 얼굴로 덤덤히 말했다.
“강하시군요. 마음이.”
“제가 강해요?”
“저는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걸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걸렸고, 슬퍼서 혼자 많이 울었습니다. 대공가의 후계자로서 책임져야 하고 저에게 기대하는 가신들과 사용인들을 위해서 억지로 강해져야만 했죠.”
테오도르는 부모님의 죽음 뒤 미소를 잃었다.
다가오는 사람을 적당히 거절하고 거리를 두고 오로지 냉정한 판단만을 내리며 살아왔다.
“힘드셨겠어요. 그런데 지금 모습 보니 잘 극복하셨네요.”
아니, 전혀 극복하지 못했다. 그런 척할 뿐이다.
메이아는 올곧은 눈동자 테오도르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봤다. 안 지 얼마 안 되지만 진중함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테오도르는 자신의 눈과 마주치자 눈동자를 계속 좌우로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보여 미소가 지어졌다.
“혹시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습니까?”
“무슨 부탁이요? 대공가 마법사 취직은 안 됩니다.”
“제 이름…… 테오도르라고 불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름을요?”
“예.”
애칭은 허락하는 건 부부나 연인 사이 친한 친구나 가족들뿐이지만 이름으로 부르는 건 친한 사이라는 뜻이다.
그가 이름을 불러 달라는 건 친해지고 싶다는 뜻이다.
“저와 친해지고 싶으신 거예요?”
친해지고 싶으냐는 물음과 함께 미소 짓는 그녀를 보며 테오도르는 어깨를 움찔했다. 심장이 바닥에 쿵 하고 떨어지는 듯한 충격도 느꼈다.
“네, 안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친해지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도 메이아 공녀님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만난 지 고작 이틀째지만 메이아는 생각했다.
시리우스 제국의 대공과 친목을 쌓아 두면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금세 생각을 정리한 메이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테오도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노골적인 시선에 부끄러워진 테오도르는 살짝 고개를 숙여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이름…… 불러 드리면 되는 거죠?”
“……예.”
그녀에게 이름을 불리는 일이 생기다니 연무장을 100바퀴 돌았을 때보다 더 심하게 심장이 쿵쿵거렸다.
“테오도르 대공 각하, 이렇게요?”
그녀의 입에서 이름이 불린 순간, 테이블 위의 음식만 쳐다보던 테오도르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입을 들썩거리며 입꼬리가 크게 호선을 그렸다.
여전히 그의 얼굴과 귓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름을 자주 불러 주십시오, 메이아 공녀님.”
메이아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고 자신이 그녀의 이름을 말했을 때 심장의 정지할 것만 같았다.
고작 이름 한번 불렸을 뿐인데 테오도르는 주체할 수 없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거지? 그리고 심장이 아프게 뛰는 이유가 뭘까.
분명한 건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메이아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무척이나 기분이 좋다는 점이었다.
테오도르는 올라간 입꼬리를 내리는 건 포기하고 메이아에게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수줍게 또 이름을 불러 보았다.
“메이아 공녀님.”
이름 한번 불러 보았을 뿐인데 테오도르는 또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뜨거운 열이 오른 자신의 뺨과 목덜미를 쓸었다. 왜 자꾸 얼굴을 붉히는 걸까?
“얼굴이 점점 빨개지시네요.”
“메이아 공녀님이 이름 불러 주셔서…….”
“테오도르 대공님?”
메이아가 또 이름을 불러 주자 테오도르는 더욱 얼굴을 붉히다 결국, 자신의 두 손으로 두 눈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온 메이아는 자신을 보고 자꾸 얼굴이 빨개지는 테오도르를 생각하며 웃었다.
이름을 몇 번 부른 것만으로도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갛게 익어 가는 모습이 무척 귀엽게 느껴졌다.
빨개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다고 가려지는 것도 아닌데 가리기 위해 애쓰는 모습에 자꾸 입술 꼬리가 올라갔다.
<얼굴 가리지 마세요, 테오도르 대공님.>
<……아, 네.>
덩치 큰 남자가 자신의 눈치를 보며 눈동자 굴리는 모습이 주인의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커다란 강아지 같아 보였다.
“풉.”
생각할수록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웃어 보는 게 얼마 만이지?
아니, 웃어 본 적이 있었던가?
메이아는 좋은 사람과 인맥을 쌓은 것 같아 만족했다.
“생각할수록 귀엽네.”
아마도 대형견을 키웠더라면 이런 기분이 들었을 것 같다. 귀엽고 간질간질한 기분.
메이아는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잠깐의 마나 수련을 하기 위해 창문을 열고 가부좌를 틀어 바닥에 앉은 채 숨을 깊게 내쉬며 집중했다.
그런데 자꾸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하는 테오도르가 생각이 났다.
“푸풉.”
결국 또 웃음이 나왔다. 결국 마나 수련은 시작도 못 하고 침대에 누웠다.
유쾌한 만남이었고, 즐거운 하루였다.
“얼른 자자.”
포근한 침대에 누워 창문을 쳐다봤다.
달빛이 창문 틈 사이로 비치는 모습이 몽환적이었다.
눈을 감으니 어머니의 자장가 소리가 귓가에서 맴돌다 의식의 끈을 놓았다.
오늘은 꿈에서라도 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