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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11화 (11/163)
  • 11화

    카르펜 제국의 황제 아르헨은 ‘황제 자리는 힘 있는 자가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 또한 황제가 되기 위해 황태자였던 형을 밀어내고 형제들을 모조리 죽인 다음에야 그 자리에 앉았다. 살기 위해서 앉아야만 했던 자리가 황제의 자리다.

    파츠래리는 하츠벨루아 공작가와 약혼하여 자신의 권력을 굳혔다.

    중립파를 고집하던 데이빗 하츠벨루아 공작이 갑작스럽게 파츠래리와 메이아를 약혼을 시킨다면 황제파에 힘을 실어 주겠다고 했다.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약혼녀가 바뀌었다.

    황제는 반대했지만 황후 엘르민과 파츠래리 입장에서는 지금의 하츠벨루아 공작의 딸인 메릴이 데미안과 결혼하는 꼴을 볼 수 없다며 약혼녀를 바꾼 것이다. 평소에 메이아를 무척 예쁘게 생각했던 황제 입장에선 파혼이 안타까웠다.

    “황후, 과연 약혼녀를 바꾼 게 잘한 일인 것 같소?”

    “예, 폐하. 어차피 공작 가문의 힘이 필요로 했을 뿐, 사람이 중요한 건 아니었습니다.”

    “난 분명히 반대했소.”

    “반대하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난 메이아 공녀를 참 괜찮게 봤소. 차분하고 귀족답고. 똑똑하고. 그만한 황후감이 없지. 그리고 죽은 데이빗이 뭐라고 생각하겠소. 자신들이 죽자마자 딸을 내쳐 버린 매정한 이라고 생각할 게 분명하오.”

    “죽은 이들은 말이 없는 법입니다.”

    황제는 가문의 힘만 보고 약혼녀를 바꾼 황후와 황태자에게 티는 내지 않았지만 사실 실망했다.

    메이아는 사교계의 꽃이다.

    많은 가문의 귀부인과 영애들이 메이아를 동경하며 그녀를 미래 황후감으로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황제는 잘 알고 있었다.

    “남자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왕으로 지내고 있지만 그 남자를 지배하는 건 정작…… 여자들이란 말이오.”

    사교계의 꽃으로 파츠래리의 내조를 정말 잘하고 있는 그녀를 내쳐 버렸으니 어쩌면 황태자 자리가 흔들릴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새로운 약혼녀인 메릴이 메이아만큼 내조를 잘한다면 상관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시골에서 살다 올라온 아가씨가 얼마만큼 배우고 메이아를 따라잡을지가 관건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하더라도 황제의 생각은 ‘메이아만큼은 아니다’였다.

    메이아만큼 완벽한 황후감이 없다.

    “다 익은 과일 수확을 눈앞에 두었는데 모두 버린 꼴이라니, 쯧.”

    아르헨의 혀 차는 소리에 엘르민은 미소 지으며 답했다.

    “과일은 익을수록 썩어 버리는 법입니다. 새로운 작물이 잘 자라날 수 있도록 가지 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폐하.”

    “과일은 썩어도 씨앗은 썩지 않는 법이오.”

    “폐하, 이미 약혼녀는 바뀌었습니다. 제가 작물이 잘 자라날 수 있도록 잘해 보겠습니다.”

    엘르민은 입꼬리만 살짝 올리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아르헨과 엘르민이 대화를 나누던 그 시각.

    집무실에 앉아 업무를 보던 파츠래리는 미칠 것만 같았다. 바로 메릴이 계속 방문할 때마다 여러 번 문을 두들기는 노크 소리 때문이다.

    똑똑.

    계속 노크 소리는 들려오고, 파츠래리 옆에 있던 보좌관 앤디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똑똑똑똑똑똑똑똑.

    “황태자 전하.”

    “아.”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약혼녀 메릴은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행동 때문에 계속 파츠래리에게 불쾌감을 주었다.

    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

    “문 열어 줘.”

    “예, 전하.”

    문이 열리고 메릴은 바로 방으로 들어왔다.

    “전하! 왜 이렇게 안 만나 주시는 거예요!”

    “메릴 공녀, 노크는 사용인들이 하는 것이거늘.”

    “보고 싶은 마음에 그런 건데. 일주일에 한 번밖에 못 만나서 저는 너무너무 괴로운데 전하는 괜찮으세요?”

    “일주일에 한 번도 나에겐 겨우 시간을 내는 것이오, 메릴 공녀.”

    “그래도 약혼녀인데 신경 써 주셔야죠!”

    “그래서 오늘 온 이유가 무엇이오?”

    메릴은 걸어 들어오더니 바로 집무실 소파에 앉았다.

    파츠래리는 미간이 절로 주름이 새겨졌다. 전혀 귀족 영애다운 행동이 아니었다.

    들어오자마자 자기 할 말만 하고 자신이 앉으라고 이야기하지도 않았는데도 그냥 앉아 버렸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뭐지?”

    “혹시 황제가 되신 뒤에 후궁을 들이실 생각입니까?”

    메릴의 황당한 질문에 파츠래리는 말문이 막혔다.

    황제가 된다면 후궁을 들이는 것은 귀족들과의 회의를 통해서 정해진다.

    물론 복잡한 정치 문제 내지는 정말 마음이 잘 맞는 사람을 후궁으로 맞이할 수 있다.

    “전 후궁을 받아 줄 수가 없으니 제 마음을 알아주세요.”

    “후궁을 받아 주고 안 받아 주고는 회의를 통해 결정되는 일이지. 그대가 내 약혼녀가 된 이유는 하츠벨루아 가문의 도움으로 나의 황태자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거 알지 않는가? 우린 정치적인 정략혼인 걸 알기 바라네, 메릴 공녀.”

    “전 후궁 안 받아 줄 거예요.”

    파츠래리는 입술을 짓궂게 깨물었다.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이 생떼를 써 버리니 웃음조차 나오지도 않았다.

    “지금 바쁜 사람 붙잡고 한다는 소리가 후궁 이야기요? 그대는 아직 나와 국혼도 올리지 않았소.”

    “그러니 약혼 말고 국혼을 올리지 그랬어요.”

    메릴의 말에 답답함을 느낀 파츠래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파츠래리 님, 저와 일주일에 세 번은 만나 주셔야 하겠어요.”

    “메이아 공녀와도 10년의 약혼 기간 동안 일주일에 한 번 만났소.”

    파츠래리의 메이아 발언에 메릴은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전 약혼녀와 저를 비교하시는 건가요? 흑.”

    파츠래리는 그저 당황스럽고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흐끅, 너무하세요. 전 황태자 전하가 보고 싶단 말이에요. 자주 만나고 싶고요. 왜 제 마음을 몰라 주시나요.”

    “나중에 이야기하지. 지금 난 회의를 해야 하니 당장 나가 주면 좋겠소, 메릴 공녀.”

    메릴은 명백한 축객령에 더욱 눈물을 흘렸다.

    “하아, 메릴 공녀. 이따가 저녁 같이 하지.”

    파츠래리의 말에 약간 기분이 나아졌는지 메릴은 표정을 풀고 밖으로 나가면서 한 손을 들고 힘차게 흔들었다.

    앤디는 메릴의 영애답지 않은 그 모습에 흠칫거렸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이따가 다시 올게요. 황궁으로요.”

    문을 닫고 나간 메릴을 바라보며 파츠래리는 괴롭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일하기 위해서 다시 서류를 보다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구겨 던져 버렸다.

    “진짜.”

    보좌관 앤디는 서류를 주우며 파츠래리를 살짝 흘겨봤다.

    “‘벌 받는 것 같군’이란 눈빛인데……, 앤디.”

    “후회하시는 겁니까? 전하?”

    “약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격하게 후회하는 중이야.”

    메이아와 약혼 기간에 이렇게 골치 아픈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메릴은 골치가 아파 왔다. 매우.

    “사교계 소문은 알고 계십니까? 전하.”

    “무슨 소문? 뭐 뻔하겠지, 약혼녀 바뀐 이야기.”

    “그것만이면 다행이게요. 황태자 전하를 지지해 주던 세력들과 2황자 지지 세력들이 메이아 공녀를 자신들의 가문 안주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츠벨루아 공작저에 청혼서와 연서를 넣기 시작했다 합니다.”

    “뭐라고?!”

    “메이아 공녀님은 사교계의 꽃입니다. 사교계의 꽃을 집안에 들이는 것만으로도 가문에 대한 수준이 한 폭 상승하는 것이니깐요. 어차피 메릴 공녀가…… 메이아 공녀 대신 사교계의 꽃이 되는 힘드실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른 소문으로는 올리비아 영애하고 메릴 공녀가 가문 대 가문으로 사이가 엄청나게 나빠졌다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메릴 공녀와 올리비아 영애하고의 다툼은 지금 사교계의 떠오르는 소문입니다.”

    “좀 더 이야기해 줘, 앤디.”

    앤디는 들은 대로 파츠래리에게 이야기했다.

    “모든 영애는 올리비아 영애 편을 들어 주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메릴 공녀님의 입지는 좁아진 것은 당연하다 볼 수 있겠습니다, 전하.”

    보조관 앤디의 말에 황태자 파츠래리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정확하게 집어낼 수 없는 위기감이 다가오는 느낌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다.

    *

    메이아는 방에 돌아와 바로 침대에 쓰러져 잠들었다.

    평소라면 이렇게까지 즉흥적으로 침대 위에 쓰러져 잠을 자진 않는다.

    항상 욕조에 몸을 씻고 아그니타와 유디의 마사지를 받고, 피부에 좋은 각종 향유를 바르고, 몸단장을 하고, 포근한 침대 위에 누워 유디가 읽어 주는 책과 정보들을 눈을 감고 외우다 잠든다.

    하지만 오늘은 침대 위에 쓰러지니 눈을 저절로 감겼다.

    ‘그냥 잘래.’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것도, 밤에 공부하지 않은 일도 메이아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바로 눈을 감았다가 뜨니 어두운 밤이 사라졌다.

    창문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따스한 아침 햇살이 지금은 아침 아니면 낮이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꽤 피곤했나 보네.”

    다시 눈을 감은 메이아는 잠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잠들지 못했다.

    “이래서 습관이 무서운 거야.”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니 7시였다.

    보통 메이아는 아침 7시쯤 일어나 체력을 키우기 위한 승마와 기초 체력 훈련 운동과 마나 수련을 한다.

    그다음에는 씻으면서 마사지로 피로를 풀고 아침 식사를 한 뒤에 황후가 갖춰야 할 다양한 덕목과 공부들 및 티 파티 참석, 황궁 행사 등등 엄청난 일정을 소화했다.

    ‘이젠 그렇게 아등바등하게 살 필요가 없지.’

    다시 눈을 감고 양을 한 마리씩 세어 보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더는 늦잠을 잘 수 없었던 메이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힘껏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크게 했다.

    욕실로 들어가 가볍게 씻은 뒤에 외출하기 편한 바지 차림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창문을 열었다.

    눈 앞에 펼쳐진 반짝이는 푸른 바다는 설렘을 가득 안겨 주었다.

    숨을 쉴 때마다 코끝을 스치는 바다 향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메이아는 자신의 마법 가방을 챙긴 뒤에 잠시 산책하러 갈 예정이니 점심을 방으로 가져다 달라는 편지와 청소하는 이들에게 팁을 남겼다.

    그리고 창문을 아까보다 더 활짝 열고 창밖으로 몸을 던지며 마법 주문을 외웠다.

    “플라이.”

    하늘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풍경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그러면 어제 봐 두었던 뒷산으로 가 볼까.”

    메이아는 어제 항구에 도착해서 봐 두었던 항구의 뒷산을 향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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