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메이아는 검은 머리 남자에게 공손히 말했다.
“죄송해요. 절 지켜 주는 아이예요. 낯선 사람이 저한테 다가올 때마다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지는 편이에요.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쥬안의 빠른 검을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피하지도 않은 채 예상한 것처럼 오히려 쥬안을 내려다보는 사내의 모습에 메이아는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느꼈다.
메이아의 속마음을 모르는 사내는 웃으며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사과받겠습니다. 저는 시리우스 제국에서 온 플로렌스가의 테오도르라고 합니다, 마법사님.”
플로렌스가라면 시리우스 제국의 대공가의 ‘성(姓)’이다.
왠지 마후라바인지 마라바인지 자작한테도 꿀리지 않고 반말을 내뱉을 때부터 작위가 높겠다고 생각은 했는데 생각보다 더 높은 계급이었다.
“표정을 보니 제가 누군지 아시는 것 같군요.”
“시리우스 제국의 플로렌스의 성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요?”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는 남자의 얼굴이 짓궂게 보였다.
메이아는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지 궁금해 그를 쳐다보았다.
“저한테 와 주시면 좋겠습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전 당신을 원합니다.”
메이아는 자신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지금 눈앞의 남자가 무슨 뜻을 가지고 이야기하는지 파악하기 위해 숨을 조용히 내쉬며 침착함을 찾아갈 때 남자는 다시 한번 웃으며 말했다.
“저와 함께 플로렌스 대공가로 가 주시면 좋겠습니다.”
메이아는 눈을 깜박거리며 대답을 하지 않은 채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테오도르는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을 기다렸지만 메이아는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처음 본 남자가 자신에게 고백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갑작스러운 고백이다.
더군다나 남자는 시리우스의 대공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고백을 거절해야 한다.
살면서 이렇게 난처한 적이 있었던가? 단연 없었다.
메이아가 미소 지으며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생각하던 와중 테오도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다른 곳에 이미 계약을 하신 겁니까?”
‘무슨 계약을 말하는 거지?’
“계약한 곳이 있다면 위약금은 저희가 상대방 측에 크게 보상을 하고 마법사님이 원하는 조건을 모두 맞춰 드리겠습니다.”
테오도르라는 남자는 내가 예상했던 것과 다른 말을 이어 나갔다. 그는 고백이 아니고, 마법사로서 스카우트 제의를 한 것이었다.
헛웃음이 나오는 걸 꾹 눌렀다. 그리고 고백이 아니라는 걸 다행이라 생각하며 그를 향해 산뜻하게 말했다.
“거절하겠습니다.”
그의 실망스러운 표정을 보면서 메이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메이아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테오도르 또한 쫓아 나왔다.
일부러 골목 사이사이 빙글빙글 돌아다녔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끈질기게 쫓아왔다.
처음에는 가는 방향이 비슷한가 보다 생각했지만 이렇게 쫓아오는 거 보니 고의로 쫓아 오는 것이 분명했다.
“그만 따라오시죠.”
메이아는 졸졸 따라오는 테오도르에게 말했다.
“따라가는 걸 들켰군요.”
“티 나게 따라오시는데 들키고 안 들키고가 있나요?”
“나름 거리를 두고 미행하고 있었습니다.”
테오도르는 화사하게 웃어 보았다.
웃는 그 모습에 메이아는 그가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키는 한 190cm 정도 되려나?
“웃으시면서 대답 회피하지 말아 주시겠어요?”
“혹시 아까처럼 안 좋은 일 겪으실까 봐 걱정돼서 쫓아가는 겁니다.”
“저에게 위험한 일이 생기더라도 제 몸 하나 지킬 능력은 되니 안 쫓아오셔도 됩니다.”
메이아의 도도한 말에 테오도르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했다.
“제가 마법사님을 쫓아다닌 이유는 또 만나지 못할까 봐 그랬습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메이아는 그의 대답을 나쁘게 듣지 않았다.
그냥 같은 방향이라고 이야기해도 되지만 테오도르는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다.
솔직한 사람을 나쁘게 보진 않는다.
“마법사님, 혹시 식사하시던 레스토랑 위에 호텔에서 지내십니까?”
이야기할까? 말까? 고민이 되었다.
우선 테오도르라는 사내는 아까 날려 버린 마후라바 자작처럼 무례한 사람이 아니지만,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답변 불가입니다.”
답을 회피하자마자 그는 외쳤다.
“저는 그곳에서 묵고 있습니다.”
“네.”
“혹시 같이 차 한잔 마실 기회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얼굴이 빨개진 채 있는 힘껏 말하는 테오도르를 메이아는 살짝 흘겨봤다.
“우연히 마주치면요. 그때 이름도 알려 드리고 커피 한잔하죠.”
그녀의 말에 테오도르는 몹시 아쉬워했다.
“그럼 이만.”
*
몇 시간 전, 테오도르는 엘른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출출함을 느꼈다.
“배고픈데, 애튼.”
테오도르는 자신보다 약간 키가 작은 애튼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침 호텔이 앞이니 저곳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시죠.”
“그러지. 텔레포트 이용은?”
“바로 이용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밥을 먹고 움직이지.”
애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스토랑으로 들어온 테오도르는 호텔의 외관만큼이나 좋아 보이는 인테리어와 직원들의 친절함에 만족스러워했다. 그리고 앉은 자리는 바로 창가 자리라 바다가 보이는 경치가 아름다웠고 해산물 요리도 마음에 들었다.
“여기 요리사를 대공 가로 스카우트하고 싶군.”
고기와 랍스터의 달콤한 육즙에 절로 미소를 지을 때였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먹던 음식에서 시선을 뗐다.
‘뭐지?’
사람들의 눈은 일제히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 또한 사람들 눈이 몰린 곳을 쳐다봤다.
화려한 은발에 푸른 눈동자의 도도한 미인이 지배인에게 안내받으며 들어오고 있었다.
살랑거리는 드레스 자락을 살짝 손으로 쥐고 들어오는 자태는 어느 귀한 집 영애의 모습이었다.
눈을 뗄 수 없는 우아한 기품이 느껴졌다. 아름다움이 지나치게 느껴졌다.
주위를 살짝 둘러보니 남녀노소 상관없이 들어오는 화려한 은발 미인을 쳐다보며 넋을 잃은 모습들이다.
레스토랑 안의 모든 사람의 눈길을 받으면 부담스러울 텐데 은발 미인은 그저 태연하기만 했다.
뭐랄까.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한 모습이었다.
자신과 멀지 않은 앞자리에 앉은 미인에게 눈길을 떼고 테이블 위에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다시 칼질하며 한 입씩 먹었다.
하지만 자꾸 앞에 여인에게 시선이 다시 갔다.
‘앞에 앉아서 그런가…….’
앞에서 흔들리는 은발은 불빛에 영롱하게 빛날 때마다 별빛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테오도르는 저도 모르게 계속 힐끔거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분명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만족스러워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음식을 먹고 있지만 맛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앞에 앉은 은발 아가씨에게 정신이 팔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예쁜 아가씨.”
심하게 취한 듯한 웬 귀족 영식이 은발 미인한테 다가가 말을 걸기 시작했고, 식사 시간을 방해받은 그녀의 말투에선 짜증이 잔뜩 묻어 나왔다.
‘저런 것도 귀족이라고. 쯧쯧.’
테오도르는 저도 모르게 참견했다.
“싫다는 숙녀에게 자꾸 치근덕거리는 게 젠타스의 귀족들입니까?”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그녀의 푸른 눈동자와 마주쳤다.
갑자기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걸 느꼈다.
‘왜 이러지?’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게 부끄러워졌다. 떨어진 심장은 다시 제자리로 올라왔지만 다시 또 한 번 쿵 하고 떨어졌다.
계속 올라왔다 내려갔다 쿵쿵거리는 심장에 테오도르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고 일부러 젠타스 귀족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젠타스 귀족이 갑자기 바람에 날아가 입구에서 고꾸라져 버린 것이다.
‘마법?’
“마법사?”
세상에 지금 이곳에서 마법사를 만나다니!
테오도르의 콩닥거렸던 심장이 두근두근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들어왔다.
“정의의 기사처럼 나서 주신 점 고맙습니다.”
도도하게 말하는 그녀의 앵두같이 도톰한 입술에 시선이 절로 갔다.
목소리도 매우 예쁘다.
뭔가 부끄러움이 온몸을 스멀스멀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아.
무슨 말을 해야 할 것만 같아서 내뱉은 질문은…….
“마법사이신 겁니까?”
“보시는 대로 그렇습니다.”
자신을 쳐다보는 은발 미인과 시선이 마주치자 왼쪽 가슴이 이상하게 쿵쿵거렸다.
“그럼.”
그녀가 자신에게 등을 돌리는 순간 온통 붙들어야 한다는 생각뿐이라 용기 내 다가갔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살기가 자신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인영이 자신의 목에 칼을 갖다 대었다. 테오도르는 메이아에게 다가가는 걸 멈췄다.
“쥬안, 칼을 내려놓으렴. 그분은 날 도와주신 분이야.”
쥬안은 바로 칼을 내려놓고 살벌한 기운을 내뿜으며 테오도르를 노려보았다.
“죄송해요. 절 지켜 주는 아이예요. 낯선 사람이 저한테 다가올 때마다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지는 편이에요.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녀는 자기 부하의 실수에 대해 대신 용서를 빌었다.
그 모습에도 책임감 있어 보이고 상냥해 보였다.
“저는 시리우스 제국에서 온 플로렌스가의 테오도르라고 합니다, 마법사님.”
자신의 이름을 듣고 난 뒤에 그녀의 표정이 약간 오묘해졌다.
선을 긋는 듯한 얼굴이랄까.
그래도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연신 그녀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그녀는 이름도 알려 주지 않고 뒤돌아 레스토랑을 나가 버렸다.
‘음식값을 내지 않고 나가네…….’
그렇다는 건 이곳 호텔에서 머무르고 있는 손님이란 뜻이다.
테오도르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다 말았다.
지내는 곳을 알더라도 언제 그녀가 호텔을 떠날지 모르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급한 마음에 쫓아갔다. 거절당했다. 차 한잔하자고 했지만, 또 거절당했다.
다시 만나면 그때는 차 한잔도 하고 이름도 알려 준다고 했다.
심장이 쿵쿵 불규칙하게 뛰었다.
뒤늦게 호텔 레스토랑에 음식값을 지불하고 쫓아 나온 애튼은 테오도르를 발견하고 그를 애타게 불렀다.
“대공 각하.”
어느새 다가온 보좌관 애튼이 테오도르 곁으로 다가왔다.
“애튼, 나 여기 며칠 머물고 싶어.”
테오도르가 웬 미인에게 말을 걸고 쫓아나가는 것까지 본 애튼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 여성분에게 혹시나 첫눈에 반하셨습니까?”
애튼의 말에 테오도르의 뺨은 잘 익은 자두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아니야. 마침 마법사잖아. 대공가로 스카우트 제의하고 싶어서.”
“에이, 아니신 것 같은데요. 지금 대공 각하 얼굴도 빨개지셨습니다.”
“이곳에 내가 지낼 방을 잡아 줘, 애튼.”
“빨리 대공가로 돌아가야 합니다! 해적들 때문에 골머리도 아픈데…….”
애튼의 애달픈 외침은 테오도르에게 들리지 않았다.
지금 그는 자신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은발 미인의 이름을 알고 싶다.
그러니 우연이라도 마주칠 수 있도록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