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메이아 또한 눈물을 참으려고 했지만 유디의 울음소리에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유모, 고맙고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당연하죠. 이 유모도 아가씨 많이 사랑합니다. 제 목숨보다 더요.”
“알지, 그리고 유모 여기 편지들 보이지?”
“네, 아가씨.”
“모두 부쳐 줘. 그리고 이 편지 한 장은 혹시나 황태자 전하를 만나면 전해 줘.”
“알겠습니다. 유모가 여기서 망부석처럼 기다릴 테니 꼭 돌아오셔야 하고 아프지 마세요.”
“이래 봬도 마법이 4써클이야. 소드 마스터급 아니면 다칠 일 없으니깐 염려하지 마.”
웃으며 말하는 메이아의 얼굴은 싱그러운 초록 잎 같았다. 그래도 유디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쥬안을 데리고 다닐 거니깐 걱정하지 말고.”
“네. 쥬안, 아가씨를 잘 지켜 드려야 한다.”
하지만 방 안에는 유디와 메이아뿐이었다.
메이아가 자신의 그림자를 보며 “쥬안, 나와 봐.”라는 말을 속삭이자 그림자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검은 로브로 둘러 싸매져 있는 인영이 그림자 속에서 서서히 나왔다.
“예, 아가씨.”
메이아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사내는 그림자 일족이다.
그림자 일족들에게는 그림자 속에 숨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암살과 전투에 능했다.
“쥬안.”
“네, 아가씨.”
“마탑으로 갈 예정이야.”
“곁을 지키겠습니다.”
충성스러운 쥬안은 메이아에게 납작 엎드리며 목숨 바쳐 지키겠다 말했다.
“유디, 걱정하지 마. 쥬안은 가족 같은 아이야.”
“잘 알죠…….”
“쥬안, 떠나기 전에 아그니타한테 다녀와 줄래?”
“아그니타요?”
“우리 부모님 시신 찾겠다고 골짜기로 떠난 이후 돌아오지를 않네. 내가 없는 동안 공작저를 잘 지키고 있으라고 전해 줘.”
아그니타에게 가야 할 생각에 쥬안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깊은 골짜기로 편지를 보냈는데 안 닿았나 봐.”
“알겠습니다.”
쥬안에게 심부름을 보낸 뒤 메이아는 자신의 마법 이공간에서 더위와 추위를 이겨 낼 수 있는 망토와 부츠를 꺼내 신었다.
망토가 약간 낡아 보이지만 재질은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다. 웬만한 마법 공격을 튕겨 낼 수 있으며, 물리력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망토에는 하츠벨루아 공작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마법이 걸린 가방을 꺼냈다. 경량화 마법이 걸려 있어 무거운 물건을 넣어도 절대 무게감을 느낄 수 없었다.
유디는 메이아의 마법 가방에 냉기 마정석과 함께 음식을 동봉해 넣었다. 혹시 모를 추위를 대비하여 온기 마정석도 따로 준비해 넣었다.
가벼운 차림으로 공작저에서 나와 텔레포트 하는 곳으로 향했다.
“아가씨, 저는 걱정됩니다.”
“다녀올게, 유모. 편지 쓸게. 걱정하지 마! 아그니타 잘 챙겨 주고, 내가 없으면 세상 떠나가게 울지도 모르니깐.”
“알겠습니다, 아가씨. 도착하자마자 편지 보내 주세요.”
메이아는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예쁘고 환한 미소로 유디에게 손을 흔들며 떠났다.
텔레포트를 쓰면 쉽게 마탑 입구까지 갈 수 있었으나 메이아는 바다도 보고 항구를 통해 마탑으로 갈 생각이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바다.
책으로만 본 게 전부인 바다를 실제로 본다면 살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
메이아는 텔레포트를 타고 엘른 항구에 도착했다.
돈은 충분하니 먼저 지낼 호텔을 알아봐야 했다.
항구 안내 책자 그리고 마탑으로 가기 위한 배편도 알아봐야 했다.
“알아봐야 할 일이 은근히 많은데?”
[아가씨.]
그림자 속에 있던 쥬안이었다.
“다녀온 거야? 아그니타는 어때?”
[아그니타는 건강합니다. 공작저로 돌아가겠다고 했습니다.]
“고마운 아이야. 한 핏줄이 흐르는 삼촌은 나 몰라라 하는데…….”
[당연한 일입니다.]
“다녀오느라 고생했어.”
[아닙니다. 뭐든지 시켜 주십시오.]
불어오는 바람에 소금의 짠맛이 느껴졌다.
바닷바람에 은빛 머리카락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메이아는 가방에서 끈을 찾아 머리를 질끈 묶었다.
‘먼저 잘 장소부터 찾아보자.’
두리번거리자 제일 호화스럽게 보이는 건물이 보였다.
“좋아 보이는 호텔인데?”
휘황찬란한 호텔 입구에 들어서자 안내인 한 명이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인사를 하는 안내인에게 메이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 줬다.
안내인은 호텔 입구에 들어오는 메이아를 이미 위아래로 흘겨봤었다.
망토는 낡아 보였지만 꽤 고급 재질이었다. 행색이 여행객이지만 은빛 머리카락을 묶은 끈부터 둘러매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같이 고가품이다.
인사를 했는데도 고개를 끄덕이는 건 그만큼 아랫사람들을 거느리는 사람이란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풍겨 나오는 오라가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는 느낌이 들어 그는 호텔 안내 10년 차의 촉을 믿기로 했다.
“VVIP 룸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메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VVIP 룸은 하룻밤 숙박비만 다른 객실의 100배로 비싼 방이다. 그걸 가격도 물어보지 않고 끄덕이며 안내해 달라는 메이아에 안내인은 쾌재를 불렀다.
호텔 안내인은 자신의 촉이 정확하다는 것에 의기양양 걸어 나갔다.
“쥬안도 방 잡아 줄게.”
[아닙니다, 아가씨. 저는 밖에서 지키고 있겠습니다.]
“방이 필요하면 이야기해.”
[알겠습니다.]
“식사하지 않으셨다면 저희 호텔 레스토랑도 이용해 보십시오. 정말 맛있습니다.”
“바로 내려가면 되는 건가?”
“제가 예약하겠습니다. 방 호수를 말하면 될 것입니다.”
“알았어.”
“그리고 아가씨를 모실 메이드 세 명을 올려보내겠습니다.”
“아니야. 나 혼자 있을 거니 메이드는 보낼 필요 없어.”
“아! 알겠습니다. 필요하면 말씀해 주십시오.”
안내인은 싱글벙글 웃으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빠르게 사라졌다.
메이아는 마법 이공간에서 가벼운 드레스를 꺼내 입은 뒤에 호텔 내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다.
레스토랑으로 내려온 메이아가 방 호수를 이야기하자 레스토랑의 지배인이 직접 자리를 안내했다.
메이아가 자리에 앉자마자 여기저기서 많은 눈길이 쏟아졌다.
영롱한 은빛 머리카락과 바다 같은 푸른 눈빛의 미인이 들어오니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 앉으십시오. 추천 메뉴로 바로 음식을 내오겠습니다.”
“응.”
앉자마자 바로 식사가 준비되었다. 부드러운 스테이크에 크림 수프를 비롯해 다양한 음식들을 보니 절로 군침이 돌았다.
“풍미가 깊은데.”
만족스러운 식사를 즐기고 있는 메이아에게 뚱뚱한 남성이 술 냄새를 풍기며 다가왔다.
“흠흠, 아가씨.”
뚱뚱한 사내가 말을 걸기 시작하면서 메이아의 즐거운 식사 시간은 금세 끝이 나 버렸다.
“정말 아름다우시군요. 아가씨, 혹시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아니요.”
“제가 여기 맛있는 밥을 사 드리겠습니다.”
“제가 돈 드릴 테니 말 걸지 말아 주실래요?”
“도도한 게 딱 제 스타일입니다, 하하하.”
“어느 집 영식인지 모르겠으나.”
“저는 젠타스 제국에서 온 마후라바 자작이라 합니다, 아름다운 아가씨.”
히죽히죽 웃으며 말하는 마후라바 자작의 말에 메이아는 짜증이 올라왔다.
두 번이나 거절했으면 그냥 갈 것이지 꿋꿋하게 자신을 쳐다보며 음흉하고 더러운 눈빛으로 얼굴을 훑어보니 마음에 안 들었다.
메이아가 ‘얼굴에 확 물을 부어 버릴까?’ 고민하는 찰나 마후라바 자작은 제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혼자 여행 다니는 걸 보니 귀족 영애는 아닌 것 같고.”
혼자서 여행 다니는 귀족 영애가 흔치 않은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걸 지레짐작으로 내뱉는 마후라바 자작을 메이아는 한심하게 쳐다봤다.
“얼굴이 매우 예쁘니 예의 없게 굴어도 봐줄게. 오늘 밤 바닷바람 때문에 추울 수도 있으니 내가 침대를 따뜻하게 해 줄까?”
메이아는 접었던 손수건을 펼치고 입을 닦으며 인상 썼다.
“이…….”
다시 한번 강하게 거절하려는 순간이었다.
“싫다는 숙녀에게 자꾸 치근덕거리는 게 젠타스의 귀족들입니까?”
메이아가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자신이 앉아 있는 뒷자리에서 식사하던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마후라바 자작 또한 메이아 시선을 따라 검은 머리의 사내를 쳐다봤다.
검은 머리 남자는 천천히 칼로 스테이크를 내리그으며 말했다.
“레이디가 두 번이나 거절했는데도 계속 말 거는 게 보기 불편하군.”
“너 내가 누군지 알고서 말하는 거야?”
“그럼 당신은 내가 누군지 알고 반말을 지껄이는 거지?”
마후라바 자작은 검은 머리 사내의 말에 잠시 주춤했다.
메이아는 이 상황이 그저 즐겁지가 않았다.
“짜증이 나네.”
짜증이 난 메이아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강한 바람이 일렁거리기 시작하며 마후라바 자작을 에워쌌다.
“이게 뭐야. 아악!”
몸이 둥둥 떠오른 마후라바 자작은 순식간에 입구까지 날아갔다.
우스꽝스럽게 넘어지자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웃기 시작했다.
“히익! 저 계집애 마법사였잖아!”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자신이 저 멀리 날려 갔다는 사실에 겁먹은 마후라바 자작은 바로 퇴장해 버렸다.
메이아는 몸을 돌려 검은 머리의 사내에게 도도하게 말했다.
“정의의 기사처럼 나서 주신 점 고맙습니다.”
우선은 도와준 거니 고맙다는 인사를 했지만 검은 머리 사내는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
“마법사이신 겁니까?”
“보신 대로 그렇습니다.”
“마법사를 만나다니…….”
얼굴을 붉히며 감탄하는 사내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꽤 잘생긴 사내였다.
이곳에 있는 걸 보니 저 사내도 있는 귀족 집 자식일 터. 절대 엮이지 말아야 한다.
“마법사라니. 어쩐지 귀족 상대로 주눅 한번 안 든 이유가 있으셨군요.”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고 말한 검은 머리의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메이아에게 활짝 웃으며 다가와 말했다.
“마법사님, 성함을 알려 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와 동시에 메이아의 그림자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저희 아가씨에게 다가오지 마십시오.”
쥬안은 자신의 단검을 꺼내 들며 검은 머리 사내 목 언저리에 칼끝을 향했다.
“쥬안, 칼을 내려놓으렴. 그분은 날 도와주신 분이야.”
“아가씨.”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쥬안은 바로 단검을 내려놓고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