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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3화 (3/163)
  • 3화

    메릴은 양보해 줬다 말하지만 자신의 입장에선 강탈이다.

    “아직 바뀌지 않았어, 언니.”

    긴 세월 자신을 예쁘게 여긴 황실 어른들을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은 불안했다. 믿어야 하는데 왜 이리 불편할까.

    의심하지 않을 거라 속으로 다짐했지만 자신에게 마법을 가르친 푸링 스승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인생은 언제나 폭풍우를 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잔잔하게 보이는 파도는 언제 돌변할지 모릅니다. 항상 만일을 대비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파도칠지 모르는 바다에 배신당해 나 자신만 손해 봅니다.>

    <폭풍우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준비한 물자로 인해 오히려 손해 보는 거 아닌가요, 스승님?>

    <그래서 만약이란 건 참 그렇답니다. 만약에 괜찮으면? 만약에 폭풍우가 안 온다면? 그런데 ‘그 만약’을 믿고 대비하지 않으면 자신이 다치게 된답니다.>

    <다친다고요?>

    <아, 폭풍우에 대비할걸. 이런 후회 속에서 자괴감에 빠지면, 그게 더 손해이지 않겠습니까? 제가 공녀님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어떠한 비싼 보물보다도 자신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 ‘만약에’라는 게 의심되면 대비를 꼭 하셔야 합니다.>

    <대비를 하면요?>

    <적어도 후회는 하지 않게 됩니다.>

    <스승님도 대비를 항상 하시나요?>

    <당연합니다. 제가 80년을 살아가면서 느낀 것입니다. 덕분에 이렇게 오래 살아 있지 않습니까, 허허허.>

    <그러면 스승님 폭풍우가 언제 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의심입니다.>

    <의심이요?>

    <뭐든지 의심이 든다면 대비하십시오. 의심스러운 대상이 설령 부모님일지라도 말이죠.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담벼락이 무너질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이 의심입니다. 무너질 것 같은 담벼락은 누군가의 눈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가 볼 때는 곧 무너질 것 같은 거죠. 그럴 때 무너지지 말라고 담벼락을 보수한다면 무너지지 않겠죠?>

    그때는 푸링의 말을 가볍게 생각했다.

    <투명한 물길 속은 볼 수 있지만 사람 속은 못 본다 했습니다. 의심이 곧 폭풍우가 오기 전이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믿어 의심치 않는 분들에게 한 번의 의심이 생겼다.

    ‘10년을 함께한 세월이 있어. 믿어야 해.’

    믿어야 한다는 생각은 곧 의심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미 의심을 해 버렸다. 할 수밖에 없다. 루만과 메릴의 행동은 너무 당당했으며 파혼이 확정 난 것처럼 말하고 있었으니까.

    <의심이 든다면 폭풍우 치기 전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만약 아무 일도 없다면 다행이지만 의심을 하고 폭풍우 대비를 한다면 적어도 손해는 보지 않을 겁니다.>

    잔잔한 파도에 곧 폭풍우가 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비를 해야겠다. 폭풍우에 휘말려 다치지 않기 위해서.

    의심은 점점 커져만 갔다.

    메이아는 하루에도 수많은 초대장과 편지를 받는다.

    하지만 그녀가 정작 기다리던 편지는 받지 못했다. 바로 황후 엘르민의 편지였다.

    벌써 일주일이 넘도록 엘르민의 편지가 오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티 파티 준비를 위해 의견을 물어보거나 황궁에 와 달라는 편지가 오고도 남았을 텐데 오지 않았다.

    편지가 뚝 끊겼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대체 왜 보내지 않으신 걸까?

    “편지 보내셨죠?”

    “응, 보냈지. 그런데 답장조차 안 주시네.”

    유디는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메릴 언니는 황궁에 갔다지?”

    “……네.”

    “이런 상황이 생기니 파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네…….”

    유디를 비롯해 메이아를 시중들던 시녀들은 한없이 가녀리고 연약한 메이아의 말에 안절부절못했다.

    그녀들은 메이아가 어릴 때부터 황후가 되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한 것을 잘 알고 있다.

    “유디.”

    “네.”

    “아그니타는 아직도 골짜기에 있는 거야?”

    “예, 밥이나 잘 챙겨 먹고 있는지 걱정이 되네요.”

    “아그니타한테 공작저로 돌아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메이아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측은하게 입을 열었다.

    “설마 메릴 언니를 황태자비로 만들기 위해 부모님이 남겨 주신 내 자리를 빼앗을까?”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메이아는 남은 초대장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한 초대장에서 손을 멈췄다. 초대장 봉투에는 ‘페르젠가의 올리비아’라고 적혀 있었다.

    “올리비아 영애의 티 파티에 참석해야겠어.”

    “네? 올리비아 영애의 티 파티요?”

    메이아는 싱긋 웃었다.

    “응, 올리비아 영애가 보고 싶네.”

    만약에 올지도 모를 폭풍우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올리비아 영애가 여는 티 파티만큼 최적의 장소도 없었다.

    페르젠가의 올리비아.

    올리비아는 영애들 사이에서 사교계의 이인자라 불린다. 그렇게 불리는 이유는 가문의 차이도 있지만, 사교계의 꽃으로 오랫동안 군림한 메이아의 자리를 단 한 번도 빼앗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말 가실 거예요?”

    유디는 걱정스레 물었다.

    “유디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

    메이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올리비아 영애의 티 파티에 가면 무척 즐거운 일이 생길 것 같아. 그리고 궁금해.”

    메릴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메이아의 파혼’을 언급을 하고 다닌다.

    게다가 약혼녀가 자신으로 바뀔 거라는 식으로 말하고 다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걸 역이용하기로 결심했다.

    *

    똑똑똑.

    “푸링입니다, 공녀님.”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긴 흰 수염과 하얀 머리의 늙은 마법사였다.

    “공녀님, 오늘은 안색이 좋으시군요.”

    메이아의 마법 스승이자 마탑의 여섯 명의 대마법사 중 한 명인 푸링은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푸링에게 있어 메이아의 아버지인 데이빗은 은인이었다. 그분이 돌아가신 일은 충격적이었지만, 은인의 딸을 지키고 돌봐 줘야 한다.

    원래라면 푸링은 정해진 요일에만 방문하여 메이아에게 마법을 가르쳤지만 데이빗과 바이올렛 부부의 죽음으로 인해 혼자 된 메이아를 내버려 둘 수 없어 당분간 공작저에 머물며 살뜰히 그녀를 보살피고 있었다.

    “마탑에 가야 하신다면 얼른 가 보세요. 스승님, 전 이젠 괜찮습니다.”

    푸링은 그녀의 마법 스승이기 전에 마탑의 대마법사다. 마탑에서 그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메이아는 모르지 않는다.

    푸링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마탑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당분간 마탑 일을 해야 돼서 떠나기 전 공녀님에게 인사를 드리려 합니다.”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을 바라보며 시녀들의 꾸밈을 받고 있던 메이아는 손을 저으며 턱짓으로 그녀들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시녀들은 메이아의 눈짓과 몸짓에 뒷걸음질 치며 바로 문을 조용히 닫고 나갔다.

    시녀들이 나간 걸 확인한 푸링은 자신의 길고 긴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이야기를 꺼냈다.

    “시리우스 제국에서 3써클 이상의 마법사들을 모조리 데리고 가서 현재 마탑 마법사의 수가 부족하다 합니다.”

    “시리우스 제국에서요? 뭐 전쟁이라도 한대요? 어차피 전쟁광 록벨리온 공작이 있을 텐데 새삼스럽게 마탑의 마법사들까지 고용하다니 무슨 생각인지 궁금하네요.”

    “시리우스 제국의 록벨리온 공작이 영지전을 한다 합니다.”

    “땅은 넓고 남는 게 돈이고 군사력이니…… 별짓을 다 하네요. 그런다고 마탑의 마법사들이 갈 이유는 없는데…… 혹시 보상이 좋나 보네요.”

    “역시 영민하십니다. 시리우스 제국 록벨리온 공작가의 마정석이 보상입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간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록벨리온 공작가에서도 신청한 마법사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채용하고 있습니다.”

    마정석은 마나가 담긴 돌로 두 가지 형태로 나뉜다.

    하나는 붉은 마정석. 하나는 푸른 마정석.

    각자의 쓰임은 다르지만, 공통점은 엄청 고가의 물건이라는 것이다.

    마법사들은 마정석을 구매하기 위해 마탑에서 의뢰를 받고 돈을 벌어 온다. 그런데 의뢰비가 무려 마정석이니 마법사들이 너도나도 시리우스 제국으로 가는 건 당연했다.

    “보상 한번 엄청나네요. 저 같아도 가겠어요.”

    푸링은 메이아의 안색을 다시 차근차근 살폈다.

    분명 입꼬리를 올리고 미소 짓고 있지만 말투에는 공허함이 느껴졌다.

    얼마 전 부모님을 잃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전혀 보여 주지 않았다. 오히려 태연한 언행을 보여 주며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푸링은 알고 있다.

    ‘속으로는 말이 안 될 정도로 슬프겠지.’

    “공녀님은 알고 계십니까?”

    “무엇을요?”

    “공녀님은 승리도, 패배도 적절히 잘 이용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메이아는 거울 속의 자신보다 거울 속에 비치는 푸링에게 시선을 줬다.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스승님께서는 지금까지 해 온 모든 일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푸링은 메이아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생각했다.

    그동안 그녀가 해 온 일은 오로지 황후가 되기 위한 공부뿐이었다.

    그 공부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된다는 뜻은 황후가 되기 위한 공부가 무용지물이 된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메이아가 절대 황후 자리를 포기할 리가 없을 텐데?

    푸링의 미간에 잔뜩 주름이 잡혔다.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공녀님, 내가 해 온 모든 일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해 온 모든 일의 성과를 내기 위해선 노력해야 하죠. 그런데 이제 와서 시간 들여 성공한 성과들을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시간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시간에 대한 예의요?”

    “시간은 언제나 우리를 지켜봅니다. 그리고 시간은 노력하는 이들에게 항상 성과를 줍니다.”

    메이아는 푸링의 말에 귀 기울였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살아간다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 시간이 필요하죠. 먹고, 웃고, 자고, 수련하고 이 모든 걸 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을 많이 들여 노력한 자에게 시간은 잘 성장했다며 ‘성과’를 줍니다.”

    푸링의 말에 메이아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시간을 들인 노력은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법입니다. 만약에 실망감이 든다면 훗날 시간이 흐른 뒤에는 분명 빛을 보게 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빛을 본 샤르딕 화가의 작품들처럼 말이죠.”

    “제가 시간에 대한 예의가 없었군요. 가시기 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공녀님, 만에 하나 폭풍우를 피하고 싶다면 언제든지 마탑으로 와 주십시오. 늙은 마법사의 이야기는 항상 즐겁답니다.”

    메이아는 능청스럽게 말하는 푸링의 말에 풉, 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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