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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1화 (1/163)
  • <<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

    1화

    메이아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사랑스러운 금발과 푸른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맞은편의 남자는 한때 자신의 약혼자였었다.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는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을 하며 고집 피우고 있었다.

    “메이아, 다시 한번 생각해 줘.”

    “불가능하다는 거 알고 말씀하시는 거죠? 전 이미…….”

    하얀 제복을 갖춰 입은 그는 안절부절못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파도처럼 그의 눈동자가 계속 흔들리며 긴장한 모습을 감추지 않고 보여 줬다.

    “메이아……, 부탁이야.”

    앞에 앉아 있는 전 약혼자와의 약혼 기간은 10년이었다.

    알고 지낸 햇수로는 12년이지만 이렇게까지 그가 긴장하면서 감정을 고스란히 보여 준 모습은 처음 본다.

    “파츠래리 황태자 전하, 저는…….”

    “제발…….”

    간절하게 매달리는 파츠래리에게 메이아는 마음을 정리한 속내를 말했다.

    “제가 파혼하고 힘들 때, 파츠래리 님하고 행복했었던 모든 기억이 저를 참 많이 괴롭히더라고요.”

    파츠래리가 어떻게 약혼녀인 자신을 대했는지. 얼마나 다정했는지.

    일주일에 꼭 한 번은 저녁 식사를 하고, 그 뒤 산책하며 제국의 미래를 대화할 때 행복했다.

    아니, 행복했었다.

    메이아는 테이블 위의 찻잔 손잡이를 매만지며 흐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약혼 기간 동안 참 행복했었어요.”

    과거형을 말하는 메이아를 바라보며 파츠래리는 간절함을 담아 말했다.

    “앞으로 내가 잘할게.”

    그는 무조건 그녀를 붙잡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매일 후회하고 있어. 메이아와 행복하고 평화로웠던 그 시절을 매일 생각하고 있어.”

    다시 한번 되돌아가고 싶었다.

    그 시간 속으로.

    아무 걱정이 없었던 그때로…….

    “그런데 전 파츠래리 님하고 행복했었던 기억들이 더는 저를 괴롭히지 않더라고요. 맞아요. 지금 전혀 괴롭지 않아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파츠래리는 이해했다.

    그래서 더욱 매달리며 말했다.

    “난 우리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노력할 거야. 너와 다시 행복해지고 싶어.”

    메이아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미 끝났어요. 시간이 지나면 파츠래리 님도 저와 보낸 시간이 더는 괴로워지지 않을 때가 올 거예요.”

    명백한 거절에 파츠래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매달리면 그녀가 다시 되돌아올 줄 알았다.

    “나에게 다시 돌아와 줘.”

    “더는 말씀드릴 게 없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저에게는 약혼자가 있습니다.”

    파츠래리는 간절함을 담아 말했지만 이미 마음을 닫은 메이아에게는 그 절실함이 닿지 않았다.

    “사랑해, 메이아. 내가 너무 늦게 깨달았어.”

    사랑 고백.

    약혼자가 있다고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들은 게 없다는 듯 달콤하게 사랑한다 말하는 그가 무척 불편했다.

    고백했으니 마음을 받아 달라는 강요처럼 들릴 뿐이었다.

    “저에게 아무리 사랑을 말씀하시더라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게 있을 때 잘할 것이지.’

    메이아는 자신의 영롱한 은발을 한번 쓸어 넘기고 애타게 매달리며 지난날의 파혼을 후회하고 있는 파츠래리를 아무런 감정 없이 쳐다보았다.

    “메이, 어떻게 하면 다시 돌아와 줄래?”

    파츠래리의 말에 메이아는 입술을 꽉 깨물다 힘주어 말했다.

    “절대.”

    ‘절대 당신한테는 안 돌아가.’

    믿었던 약혼 기간만큼 돌아온 건 배신이었다.

    이제 와서 나를 다시 붙잡는 것은 너무 염치없지 않은가!

    “안 돌아갑니다.”

    긍지 높은 공녀로서 살아온 삶이다.

    그는 모른다. 어떤 마음으로 약혼녀 자리를 내려놓았는지.

    그런데 이제 와서 예전 관계로 돌아가자고?

    “제가 죽더라도 전하에게 돌아갈 일은 없습니다.”

    파츠래리와 다시 약혼할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파츠래리는 창백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더욱 매달렸다.

    “날 용서해 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메이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약혼녀도 계신 분이 저에게 이러시는 건 옳지 않은 행동입니다. 메릴 언니에게 가 보세요.”

    “메릴 공녀와 파혼할 거야.”

    메이아는 앉아 있는 파츠래리를 무심히 쳐다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제발.”

    나가는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파츠래리의 목소리엔 후회와 자책감이 가득했다.

    “전 분명 약혼자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파츠래리는 답답함에 자신의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도와줄게, 메이.”

    메이아의 눈매가 가느다래졌다.

    “메릴 공녀에게 다 들었어. 플로렌스 대공에게 협박을 받아 약혼했다는 걸.”

    “협박이라니요?”

    그가 하는 말을 도통 이해할 수 없어 나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파츠래리를 다시 돌아봤다.

    “알고 있어. 플로렌스 대공이 메이아에게 첫눈에 반해서 결혼하지 않으면 카르펜 제국을 지도에서 지워 버리겠다고 협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와 약혼을 한 거라는 걸…….”

    메이아는 한숨을 작게 내쉬며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메릴 언니가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전혀 협박받지 않았습니다.”

    “나한테는 솔직하게 털어놔도 돼.”

    “전 대공님을 사랑해서 약혼했습니다.”

    메이아의 말에 응접실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플로렌스 대공을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파츠래리는 답답한 기분이 더 커졌다.

    애초부터 자신의 여자였다. 비록 한 번 떠나보냈지만 그녀는 카르펜 제국의 황후가 될 여자다.

    이젠 되찾기 위해 노력하려고 하지만 그녀는 그걸 거부하고 있다.

    “전 카르펜 제국의 황후도, 황태자비도 아닌 시리우스 제국의 플로렌스 대공비가 될 겁니다. 아니, 됩니다.”

    올곧은 메이아의 푸른 눈동자에는 한 치의 거짓이 보이지 않았다.

    나라 잃은 표정의 파츠래리는 괴로운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내가 파혼을 하는 게 아니었어……. 그랬다면 메이아가 그런 자에게 협박받아 약혼할 일 따위 없었을 텐데……. 하아…… 내가 잘못한 거야.”

    떠나보낸 걸 미치도록 후회했다.

    그녀가 얼마나 소중한지 잃어버린 후에야 알게 되었다.

    절대 메이아를 포기할 수 없었다.

    “내가 꼭 그와 파혼하는 방법을 찾아볼게.”

    “저 파혼 안 합니다.”

    “극악무도한 플로렌스 대공에게서 구해 줄게.”

    파츠래리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제 약혼자를 그렇게 매도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메이!”

    메이아는 파츠래리에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응접실 문을 열고 벗어난 메이아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뭐 협박?’

    한 입만 먹어도 목이 탁, 하고 막히는 텁텁한 스콘을 먹은 기분이 들었다.

    복도를 걸어가던 메이아는 사용인들의 기척을 느끼고 마법 이공간에서 손수건을 하나 꺼내 입을 가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걷던 사용인들은 손수건으로 입과 눈가를 누르는 그녀의 모습을 애잔하게 바라보며 인사했다.

    그들의 눈에는 메이아가 무척 가련해 보이고 슬퍼 보였다.

    “우시는 거 아니야?”

    “불쌍한 아가씨.”

    “황태자 전하가 오셨다면서?”

    “그렇지 않아도 약혼녀이신 메릴 공녀님을 만나러 오신 줄 알았는데…….”

    “알았는데?”

    “메이아 공녀님을 찾으셨어요. 그것도 아주 애타게.”

    “애타게? 잘못 본 거지?”

    “세상 애잔해 보였다고요!”

    “혹시…… 황태자 전하가 매달리신다거나…… 그런 거는 아니겠죠?”

    “설마요? 그렇게 얼굴이 두꺼우실까?”

    “전하께서 매달리셔도 메이아 아가씨 곁에는 플로렌스 대공 각하가 계시잖아요. 어림없죠.”

    “어휴, 우시는 거 보니깐 맘이 찢어진다. 저렇게 착한 분을…….”

    메이아는 살짝 비틀거리며 한 손으로 벽을 짚었다.

    그 모습을 본 사용인들은 깜짝 놀라며 메이아에게 달려갔다.

    “꺅! 아가씨.”

    “당장 유디 님을 불러!”

    “괜찮으세요?”

    “유디 님 말고 의원을 불러야지!”

    사용인들은 사색이 되어 메이아를 살펴보았다.

    메이아는 손수건으로 눈가 밑을 살짝 누르며 씁쓸하게 웃었다.

    “괜찮아. 다들 그냥 볼일 봐.”

    “아가씨…….”

    “난 방으로 먼저 가 볼게.”

    “방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니야. 난 괜찮아.”

    괜찮다고 말하는 메이아를 사용인들이 측은하게 바라봤다.

    *

    메이아 하츠벨루아는 어릴 때 파츠래리 폰 마브로 황태자와 약혼을 했다.

    그녀의 나이 아홉 살 때 일이었다.

    메이아는 잠자는 시간을 빼고 미래의 황태자비, 더 나아가 황후가 되기 위해 공작저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혹독한 수업을 받았다.

    워낙 어릴 때부터 교육받아 온 메이아는 공부가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자연스레 메이아는 황후가 되어 황제가 되는 파츠래리를 도와 제국의 안살림을 두루두루 살피고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너무 공부만 하니 머리가 아프고 싫을 때도 있었지만 자신을 따뜻하게 칭찬해 주고 안아 주시는 부모님을 실망하게 해 드리고 싶지 않았다.

    정치학, 사교술, 승마, 사냥, 피아노, 하프, 바이올린, 각종 춤, 역사와 수학……. 그 와중에 마법사 자질까지 발현되었다.

    공작 부부는 매우 기뻐하며 친하게 지내는 마탑의 대마법사 중 한 명인 푸링에게 메이아의 마법 수업을 부탁했다.

    메이아는 하루 24시간 중의 20시간을 황후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그녀는 그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약혼자였던 파츠래리는 황태자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하츠벨루아 공작가의 힘이 필요한 걸 알고 있었다.

    귀족의 정략혼이 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다행히 파츠래리와 메이아는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 오며 카르펜 제국의 사교계 대표 커플로 자리 잡았고, 사람들은 두 사람이 정말 잘 어울린다며 칭송했다.

    메이아는 황태자의 약혼녀로서 황후 엘르민과 황궁의 경조사를 도우며 유능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줌으로써 황궁 어른들에게 신뢰를 얻어 갔다.

    파츠래리 또한 메이아의 능력을 높이 샀다.

    황태후도, 황후도 모두 메이아를 예쁘게 여겼다. 귀족다운 몸가짐으로 계속 애쓰는 메이아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기에 들을 수 있는 칭찬이었다.

    메이아는 카르펜 제국 사교계의 꽃으로, 영애들은 그녀의 귀족다운 몸가짐을 동경하고 배우고 싶어 했다. 그녀의 결 좋은 은발과 푸른 눈동자, 하얀 피부는 많은 예술가와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뮤즈로 통했다.

    그렇게 10년을 황태자의 약혼녀로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열아홉 살의 메이아는 조만간 올릴 성인식을 기다렸다.

    카르펜 제국의 경우 남자와 여자 모두 스무 살이 되는 첫 번째 날에 모두 모여 성인식을 올린다.

    메이아 또한 스무 살이 되면 파츠래리와 국혼을 올리며 황태자비가 되는 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 생겼다.

    바로 부모님의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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