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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97화 (에필로그) (97/100)
  • 97화. 에필로그 1-1

    아일라는 카시스와 함께 대공성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 혼인을 하는 당사자인 만큼 아일라가 제가 준비할 것이 정말 없나 싶은 마음에 대공성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자 클로에가 쫓아다니면서 그런 아일라를 만류했다. 아일라는 클로에의 만류에 정원에서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그래도 내 혼인인데 정말 내가 할 일이 없다고?

    혼인하면 준비할 것도 많고 할 일도 많은 것 아닌가?

    “아가씨, 차 드세요.”

    “정말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된다고? 내 혼인 준비인데.”

    “네, 아무것도 하시지 않으셔도 돼요. 이미 준비가 다 되어 있고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저희가 알아서 준비할 거예요.”

    혼인하는 당사자는 나인데 왜 나보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거야.

    “정말 돌아왔네요.”

    누구지? 분명히 낯이 익고 기억에도 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아나스타샤 벨로체예요.”

    “아, 기억났다.”

    여기사.

    “기억났다니 다행이네요.”

    “벨로체 자작님. 여기는 왜.”

    “돌아왔다기에 궁금해서 와 봤어.”

    클로에의 질문에 아나스타샤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차 같이 마실래요?”

    “함께 티타임을 가져도 허락해 주신다면 기꺼이요.”

    “클로에 차를 한 잔 더 준비해 줘.”

    “예, 알겠습니다.”

    클로에는 아일라의 말에 찻잔을 하나 더 가져와 아나스타샤 앞에 놓고 차를 따라 줬다.

    “그거 알고 있나요? 아가씨.”

    “뭐를요?”

    “데프리카 백작 부부와 아가씨에게 집적댄 프란츠 백작가는 몰살되고 벤자민은 얼마 전 감옥에서 죽었답니다.”

    “네?”

    데프리카 부인이라면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벤자민이 누구인지 기억하기 위해서는 한참을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해야 했다. 두 번이나 막말을 하던 남자가 기억이 나 아일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가문은 몰살되고 벤자민 그는 감옥에서 죽었다고? 왜?

    “몰랐나 보군요. 하기는 전하께서 말하지 않으면 모르겠죠.”

    “어쩌다가 몰살당했는데요?”

    “데프리카 백작 부부는 이송 중에, 그리고 벤자민의 아버지인 프란츠 백작은 불법으로 노예 거래를 하다가 운도 없이 도적들을 만나서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하필이면 기사 서임을 받은 지 오래되지 않은 기사들이 길을 잃고 헤매다 프란츠 백작 일행을 만났는데, 거기에 또 수백의 도적 떼가 나타났다지 뭐예요. 그 자리에서 전부 몰살당했대요. 러셀 후작 각하께서 책임자로 갔는데 그 자리에 없었다고 하네요.”

    아니, 이게 무슨 말이야? 책임자가 함께 갔는데 사람들이 몰살당할 때는 마침 그 자리에 없었다고?

    “거기다 도적들이 전부 복면을 쓰고 있어서 신원을 확인할 수 없어, 찾는데 고전하고 있다지 뭐예요.”

    “어떻게 동행한 책임자가 없을 때 그런 일이 생겨요.”

    “글쎄요. 어떻게 된 걸까요?”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겁니까?”

    그때 한껏 굳은 카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시스는 그의 집무실 창 너머로 아나스타샤와 아일라 함께 있는 것을 보고는 정원으로 내려왔다.

    “쓸데없는 소리인가요. 전하의 연인도 알고 있어야죠.”

    “벨로체 자작. 그건 그녀가 몰라도 되는 일이다. 나는 러셀 후작과 기사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기로 했으니 끝난 일이다.”

    “잠깐만요. 왜 내가 알면 안 돼요? 그리고 몰살됐으면 호송하던 기사들은요? 그들도 죽었나요?”

    “그게 이상하죠? 그들은 살아 있답니다.”

    “벨로체 자작.”

    “예,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낮게 가라앉은 카시스의 목소리에 아나스타샤는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어지간히도 알리고 싶지 않은가 보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살아 있어요. 데프리카 백작 부부와 그 뭐냐? 프란츠 백작이 죽었다면서요? 노예 상인들하고 같이요.”

    호송 기사들은 당연히 죽었을 리가 없다. 윌리엄이 제 수하들을 죽일 리가 없으니까. 저와 함께 복면을 쓰고 도적 행세를 했던 선임 기사들이 그들을 기정만 시키고 나머지는 그가 써 놓은 각본대로 모두 죽었다.

    제 연인을 두 번이나 건드리고 모욕한 프란츠 영식과 그의 아버지인 불법 이종족 거래를 하던 프란츠 백작. 그리고 횡령을 저지른 데프리카 백작과 아일라를 무시하고 파르미온 공주와 함께 그녀를 죽이려 한 백작의 부인까지, 한 번에 처리한 것이다.

    그런데 제가 아일라의 일과 파르미온 왕국과의 전쟁으로 방치하며 잊고 있던 감옥에 가둬 둔 벤자민 프란츠가 생각나서 찾아갔을 때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방치도 방치였지만 제가 돌아오기 전까지 잘 대해 주라고 했더니, 정말 제 말대로 했는지 몸이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아일라에게 접근하고 모욕했으니 당연한 거였다. 아일라를 모욕하는 것은 저를 모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황족을 모욕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대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 죽은 것을 안타까워하지 마십시오.”

    당연한 결과였다. 제가 조금만 신경 쓰지 않으면 곧바로 제 욕심을 채우려는 자, 그리고 뒤에서 딴짓을 하며 저를 능멸하려는 자들이 나온다.

    “그만 들어갑시다.”

    “들어가자고요?”

    “예.”

    카시스는 아나스타샤를 힐끗 돌아봤다.

    “자작은 그만 수도로 돌아가도 되지 않나?”

    “저를 칼리스타로 보낸 것은 폐하십니다. 황명도 없이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전하.”

    “그냥 돌아가도 될 것 같은데. 폐하께서 자작을 왜 보냈는지 아는데. 폐하께서도 자작에게 뭐라 하지는 못할 테니.”

    “확실히 이전과는 다르신 것 같군요. 전하.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신 것 같아요.”

    아나스타샤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 미소가 씁쓸했다.

    “······.”

    “그리고 안심입니다. 그 무엇이든 어찌 되든지 상관없다는 듯이 사셨던 전하께서 진심으로 지키고 싶은 상대가 나타난 듯하니까요.”

    “자작도 좋은 상대를 만나기를 바라.”

    “감사합니다, 전하. 하온데 전하. 만일 저희 가문이 폐하께 적대하지 않았다면 전하와 저는 어찌 되었을까요.”

    “글쎄, 만일 황가와 그대의 가문이 적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진심이 아니었으면 이어지지 않았겠지.”

    “그렇겠지요. 아가씨, 전하를 잘 부탁드려요.”

    아일라는 눈을 껌뻑였다. 왜 그녀가 카시스를 제게 부탁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저는 그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그리고 아가씨와 친해지고 싶고 이곳에서 전하의 수하로 있고 싶으니 수도로 돌아가지는 않을 겁니다. 폐하께서 저를 이곳에 보내신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일 테니 말입니다.”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말하고는 정원을 빠져나갔다. 카시스는 그녀가 정원을 빠져나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혹시 연인 사이였어요?”

    카시스의 시선이 제 옆으로 와서 선 아일라에게로 향했다.

    “······.”

    “아니라는 말을 못 하는 것보니 그런가 보군요.”

    “글쎄, 지금은 그게 진짜 연인 사이였다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

    “무슨 대답이 그래요? 연인 사이였으면 연인 사이였고, 아니면 아닌 거지.”

    벨로체 공작은 저희와 적대하는 관계였어도 공녀는 아니었다. 그리고 저는 그녀를 그리 싫어하지도 않았다. 그건 폐하께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녀를 살려 달라고 한 건 자신이지만 정말 그녀를 연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나 확실한 것은 제가 아일라에게 주는 마음과는 다르다는 것 정도뿐이다.

    “친우라고 하기에도 연인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사이였을 뿐이니까.”

    “어중간하네요.”

    “지금 생각해 보면 확실히 어중간한 사이였지. 그래서 내 연인께서는 뭘 하고 있었습니까?”

    “할 일이 없어서 정원에서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어요. 혼인 준비를 하려고 하면 전부 자기들이 알아서 한다고 하니, 제가 할 일이 있어야 말이죠.”

    “그럼 저와 나가서 식사라도 하겠습니까?”

    혼인 준비가 아니라 나가서 식사를 하자고? 내 혼인인데, 왜 나는 아무것도 못하게 하는 건데.

    “제가 준비한 드레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드레스도 새로 맞추어도 됩니다.”

    “사이즈도 맞고 마음에 들어요.”

    카시스가 준비해 준 드레스가 마음에 들지 않을 리가 없다.

    “같이 나가려고요? 바쁘지 않아요?”

    “그리 바쁘지 않습니다. 바쁜 일은 이미 끝냈고요.”

    아일라는 정말이냐고 묻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언제 온 것인지, 카시스의 뒤쪽으로 미카엘과 이제키엘이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요? 아닌 것 같은데.”

    카시스는 아일라의 말을 듣자마자 뒤를 돌아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미카엘과 이제키엘은 시선을 회피하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바쁜 일은 정말 맞췄으니 걱정 마십시오. 그대와 같이 바람이나 쐴까 해서 말입니다. 대공성으로 돌아온 뒤로는 밖에 나가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나가자고요?”

    “예, 싫습니까?”

    “아니요, 나가요.”

    두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오랜만에 카시스와 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성으로 돌아오고 나서 카시스는 바빠서 성에서도 잘 마주치지 못했기에 이렇게라도 혼인 전에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아일라가 카시스의 팔짱을 끼며 잡아당기자 그가 잠시 움찔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피식’ 웃더니 아일라와 정원을 빠져나갔다.

    * * *

    시간은 지나 혼인식이 다가왔고 아일라는 카시스가 준비해 놓은 새하얀 눈꽃 같은 드레스를 입고 앞에 거울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세요, 아가씨? 긴장되세요?”

    “으, 응······.”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축하받고 싶었는데······.

    아버지는 아직도 화를 내시고 계시려나. 아버지께 내 혼인 축하받고 싶었는데.

    “괜찮을 거예요. 정말 아름다우세요, 아가씨.”

    클로에가 머리를 손질해 주며 대답하자, 라피스가 옆에서 도와줬다.

    “라피스는 계속 내 하녀로 있는 거야?”

    “예, 아가씨. 제가 아가씨 곁에 있는 것이 싫으신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

    네 본업은 하녀가 아니니까. 정말 계속 내 하녀로 있어도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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