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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96화 (96/100)
  • 96화

    “다, 다니엘. 제이드도 있었어?”

    “저희는 신경 쓰지 마세요. 저리로 가 있겠습니다.”

    “아, 아니요. 그럴 필요는 없어요. 다니엘은 카시스의 사람이니 올 수 있지만, 제이드 넌 왜 온 거야?”

    아일라는 카시스와 입맞춤 후에 붉어진 얼굴로 허리를 양손으로 짚으며 물었다.

    “말했잖습니까? 일단은 아직 공주님 호위라고 말입니다.”

    “나 아버지한테 쫓겨난 건데. 나를 따라왔다고? 내가 아니라 네 형을 따라온 거 아니야?”

    아일라의 말에 제이드의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반박하지는 않았다.

    “다니엘이 고향에 가 있는 동안 친해진 모양이군.”

    “뭐, 제이드가 조금은 기분을 풀고 다니엘에게 마음을 연 것 같아요.”

    “그거 다행이군. 아일라 이제 그만 가서 쉽시다. 피곤하지 않습니까?”

    카시스는 아일라의 어깨를 감싸고는 부드러운 눈길로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저는 괜찮은데 카시스가 쉬어야겠네요. 여기서 나를 계속 기다렸으면 피곤할 것 같아요.”

    “그대를 기다리는데 피곤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디로 갈 거예요? 성? 아니면 마을 여관?”

    “메르바에 여관을 잡아 뒀습니다. 그리로 가십시다.”

    카시스는 아일라를 감싸 안고는 걸음을 옮겼고, 다니엘이 그 뒤를 따르자 제이드도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카시스를 따라 여관으로 온 아일라는 손을 잡고 마주 누웠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파르미온 왕국에 다녀와 그대를 기다리며 그럭저럭 지냈습니다. 바다로 마중을 나가 있으면 더 빨리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나가 있던 것뿐입니다.”

    “힘들지 않았아요?”

    “그대가 보고 싶어 힘들었던 것 이외에는 힘든 일이 없었습니다.”

    그의 말에 아일라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게 물들었다.

    “미안해요, 너무 늦게 와서.”

    “늦지 않았습니다. 그대의 왕국에서 그대가 해야 할 일이 있었을 테니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제게 돌아와 주지 않았습니까. 그것보다 아까 쫓겨났다고 한 것 같은데.”

    “아, 그게······.”

    “아일라?”

    “아버지께서는 제가 당신을 선택하고 인간들과 서로 돕고 교류하려고 한 게 싫으신 모양이에요.”

    “그래서 쫓겨났습니까.”

    “음-, 그런 표정 짓지 마요. 정정할게요. 쫓겨난 게 아니라 어머니가 저를 보내 줬어요.”

    아버지가 이미 제게 딸이 아니라고 했으니 쫓겨난 것도 맞는 말이지만 어머니께서 보내 주신 것도 맞는 말이다.

    “왕비님은 허락한 겁니까.”

    “저는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허락해 줬다고 생각해요.”

    허락하지 않았다면 어머니는 제게 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제 딸이고 항상 지켜보고 있겠다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거다.

    어머니께서 카시스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카시스가 진심으로 저를 걱정하고 좋아하고 있다고 여겼기에 저를 돌려보내 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도 언젠가는 마음을 열고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될 거예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그대의 말대로 될 겁니다. 이제 그만 잡시다. 내일 출발해서 성으로 돌아가면 혼인 준비를 하고 한 달 안에 혼인을 할 겁니다.”

    “그렇게 빨리 준비만 해도 오래 걸릴 텐데.”

    “준비는 되어 있을 겁니다.”

    “네?”

    “준비해 두라 일러 뒀습니다. 그대의 드레스도 이미 맞춰 놓았습니다. 그대의 사이즈는 알고 있으니 드레스를 맞추는 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객은······. 칼리스타 귀족 몇만 초대하려고 합니다. 우리끼리 조촐하게 식을 올리고 그대의 아버지 화가 풀리면 그때 제대로 식을 치르고 싶습니다. 마린족들도 초대해서. 그러니 서운해도 그대의 가족들까지 모두 우리를 진심으로 축복해 줄 때 제대로 혼례를 치루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카시스······.”

    “그것이 그대가 더 기쁠 것 같습니다.”

    초청장을 보내도 오지 않는다면 그것보다 아일라를 슬프게 하는 일은 없을 거다. 아버지가 저와 카시스의 관계를 허락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언제 혼인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렇게 혼인도 못 하고 함께 지내다 보면 아일라를 둘러싸고 지저분한 소문이 돌 수도 있다. 그러니 혼인을 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도 아일라도 이미 혼기를 꽉 채우고도 넘긴 나이였으니까.

    “이제 정말 주무십시오.”

    카시스가 아일라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말하고는 아일라를 끌어안아 품에 가두었다. 그리고 아일라는 그의 가슴에 심장 소리를 듣다가 잠이 들었다.

    잠이 든 아일라를 품에 안아 체온을 느끼고 있는데도 그녀가 돌아온 것이 꿈일 것 같아서, 제가 자고 일어나면 품 안에 있던 아일라가 허상이었다는 듯이 사라지고 없을 것만 같아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카시스는 그녀의 동그란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 * *

    “아일라?”

    어느새 잠이 들었던 것인지 눈을 뜬 카시스는 아일라를 찾았지만 아일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대체 언제 잠이 들었던 거지. 아일라가 품에서 사라진 줄도 모르고 자고 있었다니.

    아일라가 없다. 분명 어제 돌아왔는데 아일라의 모습이 보이지가 않는다. 제가 환상을 본 것이었나.

    아니, 아일라가 돌아왔던 것이 맞나? 아일라가 돌아왔던 것이 정말 꿈이었나?

    아니다, 분명 아일라였다. 제 품에 안겨 있던 아일라의 체온과 감촉이 거짓일 리 없다. 그러니 그리움에 만들어 낸 환영일 리가 없다.

    “아니야, 꿈일 리가 없어. 품에 안고 있던 것이 이렇게 생생한데. 그게 꿈이라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있을 수 있는 건가? 내가 꿈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미쳐 버린 건가?

    “정말 꿈이었나?”

    어이가 없군. 내가 정말 미쳐 버린 건가.

    “카시스? 왜 그래요?”

    “!!?”

    귀를 파고드는 아일라의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아일라는 얇은 흰 원피스를 걸치고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하아-.”

    꿈이 아니었다. 내가 미친 것이 아니었어.

    “어디를 다녀온 겁니까?”

    “씻고 왔어요. 카시스가 너무 곤히 잠들었기에 깨우지 않으려고 내가 얼마나 조심했는데요.”

    하-, 내가 아일라가 품속에서 빠져나가는 것도 모를 만큼 깊이 잠이 들었었다고?

    “카시스.”

    “아무것도 아닙니다. 눈을 떴을 때 그대가 없어서 착각을 좀 했습니다.”

    “착각이요?”

    “그대가 돌아온 것이 꿈이라는 착각.”

    그리고 아일라가 제 품에서 빠져나가는 것도 모르고 자고 있었다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꿈 아니에요.”

    “압니다.”

    “어?”

    풀썩!

    카시스는 제 앞으로 다가온 아일라를 잡아 침대에 눕히고는 그녀의 양옆을 손으로 짚고 내려다봤다. 갑작스런 상황에 아일라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봤다.

    “이게 꿈일 리가 없는데. 꿈처럼 느껴집니다. 깨어나면 그대가 제게 곁에 없을 것 같아 그것이 무섭습니다.”

    저도 파르미온 왕국과 전쟁을 치르고 와서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혹시라도 그들이 아일라를 붙잡고 오지 못하게 할 것 같아 그것이 불안했나 보다.

    저를 내려다보며 불안하게 흔들리는 맑은 은청색 눈동자를 본 아일라는 손을 올려 그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나 이제 계속 당신 옆에 있을 거예요. 다시는 떠나지 않아요.”

    “알고 있습니다.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켰으니 앞으로 제 곁에 있겠다고 한 약속도 지킬 거라는 것을.”

    하지만 여전히 불안하다. 만일 또다시 아일라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이 생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니야, 안 돼. 두 번 다시 보내지 않아.

    “그러니 불안해하지 말아요.”

    “제 불안을 없애 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당신 불안이 없어지는데요?”

    카시스는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내리더니 아일라의 이마, 눈, 코, 입에 입을 맞추고는 목과 쇄골로 내려갔다.

    ‘자, 잠깐!’

    이 사람이 지금 뭐 하는 거야!

    마음속으로 비명을 지른 아일라가 카시스를 밀어 냈다.

    “지금 아침이에요!”

    “압니다.”

    아침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이른 아침도 아니었다. 거리에 사람들이 돌아다녀도 이상할 것이 없는 시간이다.

    아침인 줄 알고 있다면서 다시 제게 입을 맞추는 카시스를 아일라가 다시 밀어 냈다.

    “안다면서 뭐 하는 거예요?”

    “제 불안을 없애 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대를 사랑하는데 무슨 상관입니까.”

    “성으로 간다면서요. 가서 혼인 준비도 해야 하고요.”

    “조금 늦게 출발해도 됩니다. 그리고 그대가 준비할 건 없습니다. 다른 이들이 전부 준비해 놓을 겁니다.”

    “그래도 내 혼인인데 어떻게 그래요. 앗, 하지 말라니까요. 간지러워요. 아하하. 항복, 항복이요.”

    아일라는 어떻게해서든 카시스를 떨쳐 내 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시 카시스의 자잘한 입맞춤이 이어지고 간지러움을 참지 못한 아일라가 웃음을 터트리며 결국 항복 선언을 했다. 간지러움에 웃느라 눈에 눈물이 맺힌 아일라는 새침하게 카시스는 노려보더니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하아, 하아. 우리 언제 출발해요.”

    “하-, 오후에 출발해도 되고 출발을 하루 정도 더 미뤄도 됩니다. 출발은 미룬다고 혼인이 미뤄지는 일은 없습니다.”

    “당신 안 바빠요?”

    “괜찮습니다. 제가 좀 더 늦게 간다고 문제될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불안하지 않게, 제 앞에 있는 그대가 허상이 아니라 진짜라고 확인하는 것에 협조해 주십시오,”

    “밤새도록 확인해 놓고 아직도 제가 돌아온 게 믿기지 않아요?”

    아일라가 새침하게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러니 한 번 더 확인시켜 주셨으면 합니다. 아일라.”

    카시스는 다시 아일라의 입술을 머금으며 두 사람의 입맞춤이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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