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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95화 (95/100)
  • 95화

    “왕비도 인간의 편에 서려는 것이오?”

    “저는 인간의 편이 아니라 제 딸의 편에 서는 거예요. 그리고 아일라의 각인자는 아일라의 말대로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닌 듯했고요.”

    “왕비.”

    아슐레이는 세레스까지 인간의 편을 드는 것 같자 표정을 굳혔다.

    “아슐레이, 만일 아일라의 각인자를 우리들의 신인 포르세우스 님께서 인정했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세레스는 카시스가 바다의 신이 자신을 아일라의 각인자로 인정했다는 말이 떠올라 말했다. 카시스가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기에 그때 세레스도 당황했었다. 마린족은 여태껏 동족 이외에 각인자는 없었다.

    세레스의 말을 들은 아슐레이의 표정이 굳고 미간이 좁혀졌다.

    “그럴 리가 없지 않소.”

    “하지만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아요.”

    “왕비마저 인간에게 속지 마시오.”

    “그래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정말 포르세우스 님께서 두 사람을 허락하신 거라면 우리가 아무리 반대해도.”

    “왕비.”

    아슐레이가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으니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알았어요. 저도 당신이 인정하고 싶어 하지도 않고, 듣고 싶어 하지도 않으니 더 이상 말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저는 아일라와 연을 끊고 살 생각은 없어요. 그 아이는 제 딸이니까요.”

    세레스는 그 말을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 * *

    해가 저물어 가는 바닷가에 서 있던 카시스가 한 곳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서 아일라가 나오고 있었다.

    “아, 일라.”

    흔들리는 눈으로 아일라를 보고 있던 카시스가 입술이 달싹이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일라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나오던 것을 멈추고 앞을 봤다. 앞에 카시스가 서 있는 것을 본 아일라의 눈에 눈물이 들어찼다. 아일라는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어 보였다.

    “카시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고 카시스는 제 품으로 안겨 오는 아일라를 양팔로 받쳐 안아 들고는 올려다보며 눈을 마주쳤다. 아일라는 제 엉덩이를 받쳐 안아 든 카시스의 행동에 잠시 놀랐지만 입가에 다시 미소를 띠운 채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짚고 한 손은 그의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얼굴이 상한 것 같아요?”

    “그대로입니다.”

    “아닌데요. 정말로 무리한 거 아니에요?”

    “무리한 적 없습니다.”

    “그만 내려 줘요. 힘들지 않아요? 나 무거울 텐데.”

    카시스의 얼굴에 대었던 손으로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붙잡으며 말했다.

    “무겁지 않고 힘들지 않습니다.”

    “거짓말.”

    “거짓말 아닙니다. 보고 싶었습니다. 아일라.”

    “나도 보고 싶었어요, 카시스.”

    서로 마주 보고 미소 짓는 두 사람의 이마에 각인이 드러나 은은하게 빛났다.

    “이제 정말 내려 줘요. 힘들잖아요.”

    “힘들지 않습니다.”

    “그렇게 계속 올려다보고 있으면 고개도 아플 것 같은데요.”

    “전혀 아프지 않습니다. 내려놓으면 사라질 것 같아서 못 내려놓겠습니다.”

    “사라지지 않아요. 그리고 저 이제부터 계속 여기에 당신과 함께 있을 거예요.”

    잠시 아무 말 없이 올려다보던 카시스는 아일라를 내려놓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었다. 그러고는 아일라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며 되물었다.

    “정말입니까? 이제 정말 저와 계속 있는 겁니까?”

    “네, 그래요.”

    “이제 돌아가지 않는 겁니까?”

    “안 가요.”

    안 가는 것이 아니라 못 가는 거지만. 돌아갈 수 있다고 할지라도 카시스와 함께하기로 한 이상 아틀란으로 자주 가지는 못할 거다.

    “부모님이 허락한 겁니까?”

    “네.”

    아버지는 허락하지 않고 어머니만 허락했지만, 어머니라도 허락해 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몸이 전부 회복하지 않은 아버지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어머니께서 함께 계시니 괜찮을 거다. 그리고 아버지도 언젠가는 화를 푸시고 저를 용서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나 좀 안아 줄래요?”

    카시스는 아일라를 품에 가두며 끌어안았다. 아일라는 카시스의 가슴에 기대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있잖아요. 실은 아버지께서 화가 많이 나셨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아버지께서도 당신을 받아 주실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해요. 저를 당신에게 보내 준 건 어머니예요.”

    아일라는 아슐레이가 제게 더 이상 내 딸이 아니라고 했다는 말은 카시스에게는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품으로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아버지의 말에 상처받은 게 생각이 나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눈을 꼭 감고 손에 힘을 주자 그의 가슴께 옷이 구겨졌다.

    “아버지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아요. 그래도 지금은 어머니께서 허락해 주신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할래요.”

    “아일라.”

    제게는 바다도 아틀란도 부모님과 동족들도 소중하지만 제 각인자도 정말 소중하다. 그래서 돌아온다는 약속대로 돌아왔다. 제가 아틀란의 유일한 후계자이기는 하지만 아버지, 어머니도 아직 정정하시고 왕족이 아니어도 저보다 나은 자가 있으면 그가 왕이 될 것이다.

    인간들과 교류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돕는 정책을 시행하고 싶었지만 반대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인간은 위험하다,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안 좋은 소리를 들은 겁니까?”

    “우리를 이용하거나 노예로 부리지 않고 당신처럼 이종족을 구해 주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알아 주면 좋을 텐데. 왜 알아 주지 않는 걸까요? 내가 보고 겪은 일을 말해 줘도 믿지 않으니까 너무 속상해요.”

    당신은 다른데. 이종족이라 하더라도 구해 주고 보호해 주는데. 제 동족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위험하지 않은데.

    “갑자기 변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씩 바꿔 나가야 하는 겁니다. 이종족이 인간을 안 좋게 생각하는 건 당연한 겁니다. 우리가 지금껏 그들을 어찌 다루었는지,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대가 말했듯이 언젠가는 그대의 아버지도 생각을 달리할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 사이에 아이라도 생기면 저를 인정해 줄지 모르지 않습니까.”

    아일라는 그의 말에 놀라 고개를 들어 눈을 크게 뜨고 올려다봤다.

    아이?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게 아니지? 방금 우리 사이에 아이라고 한 거지?

    “지금 뭐라고 했어요?”

    “여기서 그대의 약속을 믿고 그대가 돌아오기를 매일 기다렸습니다.”

    “매일 여기서 기다렸다고요?”

    아일라는 제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싶어 되물었다.

    “그대가 언제 돌아올지 몰라서 매일 왔을 뿐입니다.”

    “설마, 아침 일찍 와서 밤늦게 돌아갔다거나, 여기서 밤을 지새우거나 한 건 아니죠?”

    “······.”

    카시스가 대답을 하지 않고 저를 빤히 바라보자 입을 살짝 벌린 아일라가 멍하니 카시스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카시스는 슬쩍 눈을 피했다.

    눈은 왜 피하는데. 정말 내가 말한 대로 한 거야?

    “그래도 며칠씩이나 이곳에서 밤을 새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미쳤어요.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그래요.”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대가 돌아오겠다고 한 말을 믿었다고.”

    “내 말을 믿어 주는 건 고맙지만 여기서 어떻게 몇 날 며칠을 기다려요. 그러다 병이라도 나면 어쩌려고요.”

    “저는 건강하니 병이 날 걱정은 없습니다.”

    “그건 모르는 일이에요. 대체 얼마나 여기서 기다린 거예요.”

    “한 달 반 정도 됐습니다.”

    아일라는 카시스의 대답에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잠을 자지 않아도 버틸 수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아니요, 당신이 아무리 건강하고 체력이 좋아도 밤을 계속 지새우면 건강을 해친다고요. 언제고 병이 나기 마련이라고요.”

    내가 아무리 은혼단을 주고 갔어도 너무한 거 아니야? 먹지도 않았을 것 같은데, 무리하고. 속상하게.

    “저를 걱정하는 겁니까?”

    “당연히 걱정하죠. 당신이 저를 걱정하는 것처럼 저도 당신을 걱정한다고요.”

    “알았습니다. 이제 그대가 돌아왔으니 다시는 이곳에서 밤을 지새우는 일은 없을 겁니다.”

    카시스는 그림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당연한 거고요.”

    “아일라.”

    아일라가 속상해하며 부루퉁한 표정을 짓지 ‘피식’ 웃으며 아일라의 얼굴을 어루만지다, 카시스가 품속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이게 뭐예요.”

    카시스가 상자 덮개를 열자, 안에는 아일라의 머리와 같은 물빛을 띠는 반지가 있었다.

    “카시스·····, 이거·····.”

    카시스는 반지를 꺼내 아일라의 손을 잡아 검지에 끼워 줬다.

    “그대가 돌아오면 손에 이렇게 끼워 주고 싶었습니다. 아일라, 저와 혼인해 주십시오.”

    “카시스.”

    “그대가 떠나기 전, 돌아오면 혼인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싫은 겁니까?”

    “아니요! 싫지 않아요!”

    아일라는 카시스의 눈이 어두워지는 것을 본 아일라는 고개를 저으면서 재빠르게 대답했다.

    “멋지게 청혼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당신이 이렇게 청혼해 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뻐요. 그런데, 파르미온 왕국으로 갔던 일은 어떻게 된 거예요. 혹시 전 약혼녀, 그분은 또 오는 건가요?”

    “이제 그녀와 만날 일은 없습니다.”

    만날 일이 없다고?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대답해 주면 됩니다. 저와 혼인해 주시겠습니까, 마린족의 아일라 아틀란 공주.”

    “당연하죠! 당신은 내 영혼의 반려인 각인자인걸요. 제가 당신 말고 누구하고 혼인하겠어요.”

    아일라의 말이 끝나자마자 카시스는 아일라의 허리를 팔로 감아 제 쪽으로 잡아당겨 품속에 가두고는 갈급한 입맞춤을 했다.

    두 사람의 입맞춤이 길어지는 가운데 짜증 섞인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저거 언제까지 보고 있어야 되는 거야?”

    “너는 왜 따라와서 그래. 그냥 고개 돌리고 못 본 체하면 될 것을.”

    “눈앞에서 저러는 걸 어떻게 못 본 체해. 그리고 일단 나는 아직 공주님 호위야.”

    아일라는 파드득 놀라 카시스를 밀어 내고 뒤를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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