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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94화 (94/100)
  • 94화

    “보, 볼모라니?”

    크레타는 믿을 수 없는 말에 목소리가 떨렸다.

    “공주가 대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으니 말해 주지. 우호국이라는 말은 제국과 에류시온 공국 같은 사이를 말하는 거다. 에류시온 공국은 감히 뒤에서 꿍꿍이를 꾸미고 있던 파르미온 왕국과는 다르지. 설마 제국군을 이길 수 있다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아, 그리고 하나 알려 줄 게 있는데······.”

    카시스가 크레타의 귓가에 속삭이자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크레타는 제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그게 무슨 말이냐고 차마 묻지도 못하고 충격을 받은 듯이 멍하니 카시스를 올려다보며 입술만 뻥끗거렸다.

    “그럼 내 연인에게 독을 먹이려고 한 여자를 그냥 둘 것이라고 생각한 건가?”

    크레타는 ‘말도 안 돼’와 ‘대체 언제’ 라는 말만 멍하니 반복했다. 카시스가 뒤를 슬쩍 돌아보자 킬리언과 그 뒤로 끌려나오는 왕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돌아가서 아일라를 기다리면 되는 건가.

    * * *

    아틀란으로 돌아온 아일라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바이칼 악시온의 잔당들의 처리와 아틀란을 안정시키는 일이었다. 아틀란으로 돌아온 지 세 달이 넘도록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아틀란이 예전처럼 안정을 되찾을 수 있게 힘쓰고 있었다.

    아틀란으로 돌아오고도 두 달이 넘도록 깨어나지 못하고 있던 아슐레이가 깨어난 지도 세 달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정무를 볼 정도로 회복이 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아일라가 아슐레이의 일까지 대신 보고 있었다.

    서류를 보느라 굽히고 있던 허리를 펴 기지개를 켜는데, 세레스가 노크를 하고는 들어왔다.

    “쉬면서 하거라.”

    “어머니.”

    “많이 힘들지. 미안하구나, 네게 전부 맡겨 놓아서.”

    “아니에요.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정무를 한 번도 본 적은 없었지만 아버지가 서류를 보는 것을 봐 왔고 어깨너머로 생각보다 많은 것을 배워 왔다. 그리고 제가 공주이기에 수업에 꼭 들어가는 것이 정치에 관한 것이었다.

    “아버지께서 복귀하시면 혼날지도 몰라서 많이 서투르다고요.”

    “혼날 각오를 했다니 나도 네게 쓴소리를 해야겠구나. 정말 인간들과 교류할 생각이니?”

    “어머니도 반대하시는 거죠.”

    “모든 이들이 반대하는데 무조건 밀고 나가는 것도 보기 좋지는 않단다. 특히 네 아버지가 허가해 주실 리가 없지 않니.”

    “아버지도 아셨군요.”

    오늘도 분명 아버지께서 오시려는 것을 어머니께서 말리고 대신 오신 것일 거다.

    “아버지나 어머니 그리고 동족들이 인간을 싫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저는 제 눈으로 직접 본 사람들을 믿고 싶어요.”

    “아일라.”

    세레스가 아일라를 조용히 불렀다. 제 친구가 인간을 사랑해 어찌 되었는지 들었음에도 인간에게 온전히 마음을 주는 제 딸이 걱정이 되었다.

    “저도 이제 알아요. 제가 어머니 이야기 속에 빠져 인간들을 동경했던 것을요. 하지만 저는 제가 본 사람들을 믿고 싶어요. 제가 그들에 대해 모든 걸 알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무턱대고 원망하고 싫어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 세상에는 이종족이라 하더라도 나쁜 사람들에게서 구해 주고 보호해 주려는 사람들도 있어요. 카시스는 이종족을 구해 주고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풀어 줬어요.”

    제가 뭍으로 올라가 숲에서 카시스를 처음 만난 날도 그러했다. 그는 저를 구해 주고도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날 구한 것이 엘프라고 했었는데 그 엘프도 그냥 풀어 줬다. 저는 분명 카시스 같은 사람이 더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카시스와 그 주변인들은 달라 황제라는 사람도 그리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고, 황제와 카시스가 제이드의 형을 구해 줬다고 들었어.

    “저는 카시스를 믿어요. 그라면 우리를 이용하지도 속여서 노예로 팔지도 않을 거예요.”

    “어리석은 말이로구나.”

    “아버지?”

    문 쪽에서 들린 목소리에 세레스가 놀라 뒤돌아보고 아일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회복도 되지 않았으면서 이리 움직이면 어떻게 해요! 저주가 그리 오랫동안 걸려 있던 만큼 회복도 더디다는 것을 당신도 알잖아요. 거기다 정신적으로 조종까지 당했으면서.”

    “어머니 말씀대로 아버지는 휴식이 필요해요.”

    “지금 내가 쉬는 것이 문제더냐.”

    아일라는 ‘그럼 뭐가 문젠데요.’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지금 그녀의 아버지는 쉬면서 몸을 회복하는 것이 먼저였다.

    “인간들을 믿을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너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왜 인간을 미워했다고 생각하느냐? 그건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인간들에게 잡혀 갔던 수없이 많은 마린족들이 노예로 부려지다 죽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우리를 이용할 뿐이다.”

    “물론 아버지께서 말하신 것 같은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제가 좋은 사람들을 더 만난 것일수도 있고요. 하지만 저는 저희 마린족을 이용하려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아버지와 마린족들이 알아 줬으면 해요. 지금까지의 인간들이 아닌 카시스와 주변인들 그리고 앞으로의 인간들을 봐 주세요. 저는 카시스와 함께하고 싶어요.”

    “그자 때문이냐? 그자가 너를 홀렸구나. 네 각인을 끊으면.”

    “싫어요. 저는 카시스가 제 각인자라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아버지께서 카시스와 제 각인을 끊으면 저는 미쳐 버리고 말 거예요.”

    “네가 지금!”

    “흥분하지 말아요. 아슐레이.”

    세레스는 소리치려는 아슐레이를 붙잡아 진정시키며 말했다.

    “상대방이 죽지 않은 상태에서 각인을 강제로 끊으면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저는 카시스가 아니면 싫어요. 그가 저를 구해 줬고 지켜 줬어요.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저는 다시는 두 분을 뵙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저주도 풀렸고 더 이상 조종당하지 않으시니까 내 말을 들어주실지도 몰라.

    “인간을 못 믿으시겠다면 저를 믿어 주시면 안 되나요? 제가 고른 사람을 믿어 주시면 안 되나요?”

    아일라가 슬픔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모님이 저를 믿어 주지 못하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을 거다.

    “제 선택을 믿어 주세요. 저는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우리는 분명 함께할 수 있고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그들과 다르지 않아요. 다른 것이라고는 우리가 물속에서 숨을 쉬고 물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는 것뿐이에요. 그거 이외에는 다를 게 하나도 없어요. 인간들 중에 우리를 이용하려는 자들이요? 그들은 바이칼 악시온 같은 자라고 생각하면 우리나 인간들이나 다를 게 없잖아요.”

    우리가 인간들을 받아들이면 서로 교류하고 도우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데.

    “네가 기어이 내 말은 듣지 않고 인간들의 편에 서서 우리를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네 고집대로 하겠다는 것이냐? 그래, 좋다. 하나, 우리는 끌어들이지 마라.”

    “아버지. 그런 게 아니에요.”

    “좋다. 어디 네 멋대로 해 보거라. 단, 우리에게 그 무엇도 바라지 마라. 축복받을 거란 생각도 하지 마라.”

    “당신······.”

    세레스가 눈을 크게 뜨고 아슐레이를 불렀다.

    “너는 더 이상 내 딸이 아니다.”

    아슐레이는 말을 마치자마자 세레스가 잡을 새도 없이 뒤돌아 나갔다. 이를 본 아일라의 눈이 커지며 눈물이 맺히고 입술까지 파르르 떨렸다.

    “아, 아버지······.”

    세레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린 아일라가 안쓰러워, 끌어안고 다독였다.

    “괜찮을 거다. 지금은 아버지도 화가 나서 그러시는 게야. 그러니 울지마렴. 네 아버지가 몸이 좋지 않다 해도 아무래도 내가 한소리는 해 줘야겠구나. 아무리 화가 났다 해도 되는 말과 안 되는 말이 있는 것인데. 아일라, 너는 누가 뭐래도 우리들의 딸이란다. 그것을 잊지 마렴. 아일라 아틀란, 우리들의 소중한 딸.”

    “흑! 어머니.”

    “아일라, 내가 보기에도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단다. 너를 생각하는 마음만은 진심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단다.”

    “흐윽! 어머니.”

    “나는 내 딸을 믿는단다. 함께하지는 못해도 우린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 우리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바다로 오렴. 나의 소중한 딸 우리는 언제나 네가 행복하기를 바란단다.”

    “으아아앙-!! 어머니! 흐윽! 어머니. 저는·····, 저는”

    “그러니 아틀란은 이제 우리에게 맡기고 네가 사랑하는 반려가 있는 곳으로, 뒤돌아보지 말고 가렴.”

    ‘네가 망설이고 뒤돌아보면 가지 못하게 붙잡고 싶을 테니.’라는 세레스의 말을 듣고 아일라는 한참을 그녀의 품에서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세레스의 품에서 그리 울고도 아슐레이의 진노에 아일라는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세레스가 그런 아일라의 등을 떠밀어 주었고, 얼마 후 아일라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면서 아틀란을 떠났다.

    떠나는 모습을 웃으며 배웅하던 세레스는 딸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자리를 떠나기 위해 뒤를 돈 순간 멈칫했다.

    “샤우드 경.”

    “왕비님을 뵙습니다.”

    “그대도 가세요. 에리얼이 서운해하겠지만 이제는 아틀란보다 그곳이 더 익숙하지 않나요? 그리고 아일라를 부탁해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가 보겠습니다.”

    다니엘은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아일라의 뒤를 따라갔다. 다니엘의 뒤를 따라가는 또 한 사람을 보고는 세레스는 피식 웃고는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온 세레스는 아슐레이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가가 화난 어투로 말했다.

    “후우-, 당신. 해도 되는 말이 있고 안 되는 말이 있어요.”

    “아일라가 마린족을 버리고 인간을 선택했다면 당신도 받아 주지 마시오.”

    “어떻게 그런 말을······. 아일라는 동족도 우리도 버리지 않았어요. 그리고 인간이라고 전부 우리를 이용하려 하거나 잡아서 노예로 부리려는 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아일라의 말을 틀리지 않아요. 우리가 마음을 달리해 대화를 하려 하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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