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89화 (89/100)
  • 89화

    “어제 네가 나가고 나서 이제키엘이 파르미온 왕국에서 환영족의 반응이 사라졌다고 하더군.”

    “이번에도 역시 파르미온 왕국입니까?”

    “그 후에 레안드로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번에도 놓치기는 했지만 확실히 잡아낸 것이 있다고 말이다.”

    “뭡니까?”

    “파르미온 왕궁. 거기서 놓쳤다는군.”

    카시스의 반반한 미간에 실금이 갔다.

    “이번에도 왕족이 관련 있습니까?”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왕궁에서 놓쳤다면 관련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숨겨 준 걸 수도 있고.”

    카시스의 이번에도, 라는 말에 킬리언은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제 어미인 폐황후는 흑마법사이기도 했지만 환영족과도 연관이 있었다.

    “그쪽 움직임도 이상하다고 하더군. 그래서 일단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전쟁입니까?”

    “아무래도 그리되겠지. 내 힘으로 누를 수 있는 것을 기회를 준 것인데. 이리 나온다면 어쩔 수 없지 않나. 또다시 어비스의 문을 열려고 한다면 막아야겠지.”

    “에류시온 공국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어떠십니까?”

    “성기사들이 필요하다 확정 지을 수는 없지. 성기사의 도움을 요청할 필요 없도록, 일이 벌어지기 전에 끝내자고.”

    “가능하겠습니까?”

    “불가능할 거야 없지. 나라 하나를 지도에서 지우면 되는 일이니까. 너 능력 되잖아.”

    카시스는 ‘형님보다는 아닙니다.’라고 작게 중얼였다.

    “칼립스는 확실히 끝낸 것 맞습니까?”

    “그래, 내가 상대한 건 칼립스 껍데기지만, 그때 앨피어스 대공의 신성력에 확실히 소멸했다. 그 녀석의 몸을 차지한 어비스 마왕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영혼의 조각과 힘이 그 정도였으니 본체가 넘어오면 이 세상은 멸망이다. 내 어머니도 위험한 걸 동생이랍시고 만들었어. 뭐, 칼립스가 너와 내가 같은 선황의 핏줄이 아니라는 사실과 흑마법, 그리고 환영족이 건넨 어비스 마왕의 영혼의 조각과 힘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밝혀서 더 수월하게 폐위시키고 처형할 수 있었지만.”

    “아직도 형님이 선황 폐하의 친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미 친자 감식 마도구로 형님이 선황 폐하의 친자임이 밝혀진 지 오래입니다. 어머니 가문은 폐황후처럼 힘 있는 가문이 아니고 정치적으로 선황 폐하께 도움을 줄 수 있는 가문이 아니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뒤로 물러나 선황 폐하를 포기하고 있었다고요. 하지만.”

    “내 모후와 잠자리를 하고 나면 꼭 술에 현 황태후 폐하를 찾아가셨다지. 그리고 미안하다고 하시며 함께하셨고. 선황 폐하께서 내 모후와 밤을 보내신 것은 손에 꼽힐 정도지만 황태후 폐하와는 아니지. 내 모후가 아니었다면 네 위에 형님은 무사히 태어날 수 있었겠군.”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형님인지 어떻게 압니까?”

    “그냥 감. 만일 황태후 폐하께서 아이를 잃지 않고 낳았다면 형님일 것 같았거든.”

    감도 참 좋으십니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성별도 알고. 작게 중얼거린 카시스는 킬리언을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작게 덧붙였다.

    “형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뭐?”

    “못 들었으면 마십시오.”

    제가 아무리 작게 말해도 못 들었을 리 없는데. 놀란 듯한 표정으로 되묻는 킬리언에게서 카시스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카시스가 고개를 돌려 버리자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래,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황태후 폐하께서 너보다 나를 더 아낀다는 말은 아닌 것 같구나.”

    “그건 형님의 생각이십니까?”

    “너 말이다. 하아, 됐다. 말을 말아야지. 그건 그렇고, 정말이지 말을 안 듣는 아우님이야. 나이가 같으니 그 형님 소리는 하지 말라는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형님이라고 부르는군. 언제쯤이면 그 형님 소리를 안 들을 수 있을까?”

    “아무리 나이가 같아도 형님은 형님이십니다. 그러니 제가 형님이라고 부르지 않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하는 킬리언의 말에 카시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네가 하도 돌아가지 않느냐고 성화이니, 나는 그만 돌아가 보마. 나도 돌아가서 준비를 해야 하니. 너도 출정할 준비해 두거라.”

    “직접 지휘하실 겁니까?”

    “그럼 제일 안전한 수도에서 결과만 기다릴까? 내가 황제라고 해서 안전한 곳에서 결과만 기다리지는 않을 거다. 그리고 내가 아끼는 아우는 최전선에서 서는데, 기사들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그럴 수 없지.”

    킬리언은 말을 마치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형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폐황후로 인해 사라졌던 아이가 다시 복수하기 위해서 폐황후의 몸을 빌어 태어난 것이 형님이신지도요. 그러니 황태후 폐하께서 저보다 형님을 더 좋아하시는 것이지요.’

    킬리언은 카시스의 말이 너무 진지해서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하지만 황태후 폐하께서 어릴 적부터 제게 잘해 준 이유는 카시스를 지키기 위해서였을 거다. 한 번 아이를 잃었기에 카시스를 잃고 싶지 않았을 테니.

    선황 폐하께서 현 황태후 폐하를 지키기 위해서 한 선택은 제 어머니와 가문이 원하는 대로 하는 일이었을 테니.

    ‘네게는 미안하구나. 하나, 네가 내 자식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네 어미를 황후에 자리에 앉힌 것도 네 어미를 품은 것도 사실이니, 너는 내 틀림없는 내 자식이다. 너를 미워하지도 싫어하지 않는다. 네게는 잘못이 없다, 킬리언.’

    저는 황족이 타고나는 검은 머리와 푸른 눈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어릴 적부터 자신의 태생을 수없이 의심했다. 선황 폐하께서는 어머니는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어머니께서 회임하시고 나서 단 한 번도 찾지 않으셨다고 했다.

    오랜만에 선황제의 말을 떠올린 킬리언은 걸음을 멈추고 창밖을 내다봤다.

    “정말 내가 황태후 폐하의 자식이었다면, 그래서 내가 정말 너와 친형제였으면 좋았겠구나.”

    * * *

    메르바 항구 마을의 해안가에서 카시스와 아일라가 마주하고 있었다.

    “바쁘면서 오지 않아도 되는데 뭐 하러 왔어요.”

    “저는 그대와 헤어지고 싶지 않은데 그대는 아닌가 봅니다.”

    카시스는 놓기 싫다는 듯이 그녀의 양손을 꼭 잡았고, 아일라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저도 싫어요. 하지만 우리는 서로 해야 할 일이 있잖아요. 저는 무책임한 공주가 되고 싶지 않아요. 우리 영원히 헤어지는 거 아니에요. 반드시 돌아온다고 제가 약속했잖아요. 아버지가 못 오게 하면 또 몰래 빠져나오죠, 뭐.”

    카시스는 잡고 있던 손을 잡아당겨 아일라를 끌어안았다.

    “안 갑니까? 적당히 하시죠.”

    짜증스러운 제이드의 목소리가 들리자, 카시스는 아일라를 품에 가둔 채 그를 노려봤다.

    “제이드, 너야말로 적당히 해. 이분은 공주님의 각인자셔.”

    “인간 따위를 각인자로 선택하다니.”

    “제이드.”

    “어머니도 적당히 하세요. 안 가겠다는데 그냥 두시라고요.”

    옆에서 타박하는 멜로디의 말에 인상을 찌푸린 제이드는 에리얼을 향해서도 한 소리했다가 제랄드의 매서운 눈초리를 받았다.

    “샤우드, 그러지 말고 우리하고 돌아가자.”

    “어머니, 저는 이제 이곳이 더 편합니다.”

    “너를 혼자 여기 두고 내가 어찌 돌아가.”

    “제이드가 있잖아요.”

    “샤우드.”

    “그럼 어머니도 여기 남으시던지요.”

    퍽-!!

    제이드의 말이 끝나자마자 제랄드가 그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네 어머니에게 말투가 그게 뭐냐? 그리고 샤우드는 네 형이다.”

    “전 형 따위 없습니다.”

    “제이드.”

    “제 형은 오래전 죽었습니다. 그러니 저 인간을 더 이상 제 형이라고 하지 마세요! 제게는 인간 형 따위는 없으니.”

    “제이드, 말을 그렇게까지밖에 못 하느냐?”

    제랄드도 화가 많이 났는지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만 가요. 제이드 때문에라도 빨리 가야겠네요. 계속 날을 세우며 적을 만들기 전에요.”

    카시스의 품에서 빠져나온 아일라가 다가오며 말했다.

    “제이드, 네가 인정하기 싫어도 다니엘은 네 형이야. 그걸 잊지 마.”

    “누가 인간 따위를 인정할 줄 알고.”

    “다니엘은 우리와 같은 마린족이야. 너를 구하러 간 다니엘이 물을 다루는 걸 봤을 거 아니야. 너 여태껏 구해 줘서 고맙다는 말 안 했지?”

    아일라가 제이드에게 바짝 다가가 바로 밑에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그러자 제이드가 미간을 찌푸렸고 카시스는 아일라를 잡아당겨 뒤에서 끌어안았다.

    “어?”

    “하아, 너무 가깝지 않습니까?”

    “네?”

    “저 말고 다른 사내에게 그리 가까이 다가가지 마십시오.”

    “제이드는 제 친구이자 호위라고 저번부터 말했잖아요.”

    “그래도 안 됩니다.”

    제이드는 카시스와 아일라의 대화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취향이라는 게 있습니다. 공주님은 제 취향 아닙니다.”

    “누가 할 소리를 하는 거야? 너야말로 내 취향 아니거든? 너는 전혀 친절하지 않잖아.”

    “제가 공주님께 왜 친절해야 합니까? 제 일만 하면 되는 거죠.”

    “봤죠? 쟤가 말을 저렇게 밉게 해요.”

    “친해 보입니다만.”

    “하나도 안 친해요!”

    어릴 적 소꿉친구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친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카시스의 눈에는 이게 어떻게 친해 보일 수가 있는 거지? 예전에라면 몰라도 지금은 전혀 친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아일라는 바로 반박했지만 제이드는 황당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저도 공주님과 더 이상 가까워질 생각 없습니다. 누가 제멋대로에 말썽만 부리는 공주를 윽!! 무슨 짓이야!!”

    아일라는 제이드의 말이 끝나기 전에 정강이를 걷어찼다.

    “너 공주를 대하는 태도가 그게 뭐야?”

    “공주가 공주다워야 공주 대접을 해 주지.”

    “그러니까, 이게 친한 게 아니라는 말입니까?”

    아무리 봐도 너무 스스럼없이 지내는 것 같은데.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친해 보인다는 건지 모르겠네. 제이드는 이렇게 내게 말을 함부로 하고 막 대하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