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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88화 (88/100)

88화

“하아-.”

지금 한숨 쉰 건가? 왜?

“손만 잡고 자는 거 말고. 그대를 품고 싶습니다.”

눈을 껌뻑이던 아일라는 이내 카시스의 말을 이해했다. 그런 아일라의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어, 그러니까.”

너무 당황스러워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내가 들은 말이.

“카시스?”

저를 와락 끌어안는 바람에 놀라 그를 불렀다.

“그대가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 불안합니다.”

“돌아온다고 약속했잖아요.”

입까지 맞췄는데.

“돌아온다는 그대의 말을 믿습니다. 하지만 그대는 돌아오려고 해도 돌아오지 못할 상황도 있을 것 아닙니까.”

아직 혼인 전이기는 하나 아일라와 그는 이미 혼기를 넘긴 상태였다.

“하아, 방금 제가 한 말은 못들은 걸로 해 주십시오.”

아일라가 대답이 없자 안고 있던 팔에 힘을 풀어 조금 떨어졌다.

이미 들은 걸 어떻게 못 들은 걸로 해.

그렇게 불안한가? 인간은 어떤지 모르지만, 우리 마린족은 각인자하고만 혼인해야 하는데.

카시스가 왜 불안해하는지 모르는 건 아니다. 제가 기억을 지우는 약을 먹이기도 했고, 아버지가 회복되시면 내가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아버지는 각인을 무효화해서 끊을 수 있다고 했으니까.

게다가 아버지는 인간을 싫어하시니까.

“아일라?”

아일라는 카시스의 허리를 끌어안고 미소 지으며 그를 올려다봤다.

“좋아요. 우리 같이 자요. 혼인은 돌아와서 치르고요.”

“아일라. 제가 말실수했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후회하게 될 겁니다.”

“저도 성인이에요. 제 선택에 책임을 지지 못할 나이가 아니라고요. 물론 부모님이 화는 내시겠지만 혼인은 제가 하고 싶은 사람과 할 거예요. 두 분이 반대하실지라도 사랑 없는 혼인은 싫어요. 이미 내 각인자는 당신이에요. 당신이 죽거나 나를 버리지 않는 이상.”

“저는 그대를 버리지 않습니다. 책임지지 못할 일은 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정말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후회하지 않아요.”

아일라의 말이 끝나자마자 카시스는 그녀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입맞춤이 길어지며 숨이 버거워 주춤 뒤로 물러나던 아일라는 침대에 걸려 그 위로 쓰러졌다.

붉게 물든 노을이 창가에 비쳤다.

“하아-, 정말 괜찮겠습니까?”

긴 입맞춤이 끝나고 떨어진 카시스는 부드럽게 아일라의 머리를 쓸며 물었다.

“후우후우. 괜찮아요.”

거친 숨을 내뱉으며 대답하는 아일라의 이마, 눈, 코, 입에 카시스가 짧은 입맞춤을 이어 나갔다. 그러던 그의 입술이 목으로 내려가며 사락사락 천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 * *

잠이 깬 아일라는 제 눈앞에 나타난 사내의 맨가슴에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고개를 들자, 낯설지 않은 얼굴과 은발이 아일라의 눈에 가득 찼다. 이를 본 아일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까, 깜짝 놀랐잖아. 나 어제 카시스하고.

“아파.”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아.

“아픕니까?”

“-!!?”

까, 깜짝이야!

“뭘 그렇게 놀라는 겁니까?”

“깨, 깼어요? 언제 깬 거예요? 깼으면 깼다고 말을 해야죠.”

“지금 깼습니다. 그렇게 손가락으로 제 가슴을 긁는데 안 깹니까?”

“네?”

으앗! 나 뭘 하고 있던 거야?

아일라는 카시스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서 보니 어느새 오른쪽 검지로 그의 가슴골 사이를 살살 긁고 있었다. 아일라의 얼굴이 곧바로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물들자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카시스는 제 가슴골을 긁고 있던 손을 잡아 입을 맞췄다.

“뭐, 뭐예요? 그 웃음. 지금 나 놀린 거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아일라가 더 안아 달라고 유혹하는 줄 알았습니다.”

“뭐, 뭐라고요?!”

“큭큭!”

“뭐, 뭐예요? 저를 자꾸 놀리는 건가요?”

아일라는 카시스가 자꾸 웃자 부루퉁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화내지 마십시오.”

“그렇게 저를 놀리는 것을 보니 불안한 마음이 사라졌나 보네요.”

“아직 불안합니다. 그대의 아버지가 그대를 보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아이라도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움찔!

“아, 아이요?”

“그럼 조금은 희망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이를 미워하진 않을 것 같아서.”

확실히 제게는 화내실지 모르지만, 아이에게는 그러지 않으실 것 같기는 한데. 아이가 있으면 어쩌면 인정해 주실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하지만 무슨 아이가 하루 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카시스는 아일라를 끌어안고 작은 어깨에 얼굴을 묻고 ‘하-’ 탄식을 내뱉었다.

“그대가 바다로 돌아가 있는 동안 저도 자리를 비울 겁니다. 해결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서 파르미온 왕국에 다녀와야 합니다.”

파르미온 왕국?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아, 그 예의 없는 약혼녀!”

“이제 약혼녀 아닙니다. 그리고 전에도 말했듯이 언젠가는 끝날 약혼 관계였습니다.”

“위험한 일이에요?”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위험할 수도 있지만 카시스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마검사인 그의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의 위험은 많지 않았다.

“잠시만 비켜 봐요.”

그런 카시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일라가 그를 밀어 내며 일어나 앉았다. 일어나자 주르륵 흘러내리는 이불을 붙잡아 앞을 가리더니 이불을 몸에 칭칭 감고 침대에서 벗어났다.

“뭐 하는 겁니까?”

“기다려 봐요.”

뭔가를 찾으려 분주하게 움직이는 아일라를 지켜보며 물었지만 기다려 보라는 대답이 들려올 뿐,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여기 있을 텐데. 찾았다.”

은혼단이 들은 병을 찾은 아일라는 침대 위로 돌아와 카시스의 손에 은혼단이 든 병을 쥐여 주며 말했다.

“이거 꼭 가지고 있다가 다치면 먹어요. 이걸로 웬만한 부상은 전부 나을 거예요. 독도 치료될 거고요.”

“저는 괜찮습니다. 아일라가 가지고 계십시오.”

“아니요, 저야말로 위험한 곳에 가는 것 아니에요. 그리고 은혼단은 아틀란에 가면 얼마든지 만들 수도, 구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이건 내가 아닌 카시스에게 더 필요하니 가지고 있어요. 아끼지 말고 다치면 먹어요. 알았죠?”

“······.”

“왜 대답 안 해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말했듯이 제가 다치는 일은 별로 없을 겁니다.”

“스스로 다리를 찌르고 저를 감싸다 다친 사람이 할 말은 아니네요.”

“스스로 다리를 찌른 건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였고, 그대를 감싸다가 부상당한 것은 그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니 당연한 겁니다.”

뭐가 당연하다는 거야? 어떻게 다치는 것이 당연한 건데.

“당연하지 않아요! 나는요, 나 때문에 소중한 사람이 다치는 게 싫다고요.”

“제가 소중합니까?”

“당연하죠! 소중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같이 자지는 않아요. 나는 처음부터 당신이 무척 마음에 들고 좋았다고요.”

“제 얼굴이 말입니까?”

“아니거든요!”

아일라는 울컥해 소리쳤다.

물론 잘생기기는 했다. 그는 내가 본 사람 중 제일 잘 생겼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었다.

제게는 항상 친절하고 자상하고 강하고 멋진 사람이었다.

“아닙니까?”

아니, 그걸 또 진지하게 되묻고 그래?

“잘생겼어요.”

아일라는 얼굴을 붉히고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그뿐입니까?”

“아니요. 당신은 자꾸 아니라고 하지만 저한테는 당신은 언제나 친절하고 자상했어요. 다른 사람한테도 그러면 질투 날 정도로요.”

“다른 사람들에겐 그대를 대하는 것처럼 하지 않습니다. 처음엔 그대가 다니엘과 같은 종족이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대를 다른 녀석들과 다르게 대하는 것이, 단지 보호해야 한다는 이유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것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대는 제 목숨보다 소중합니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내 목숨보다 당신 목숨을 더 소중히 여기라고요. 난 자기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좋아요. 그러니까 이 은혼단, 다치면 꼭 먹어요. 당신이 아무리 강해도 다칠 수는 있잖아요.”

“저도 제 목숨이 소중합니다. 단지 제게는 제 목숨보다 그대의 목숨이 더 소중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지금은 좀 더 주무십시오.”

카시스가 아일라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침대에 다시 누웠다. 그러자 놀란 아일라가 비명을 지르며 그의 몸 위로 쓰러졌다.

“나 어머니와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해요.”

“왜 그렇게 서두르는 겁니까? 조금 더 자도 됩니다. 힘들 테니 조금 더 주무십시오. 떠나는 건 좀 더 늦춰도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좀 더 이러고 있어 주십시오.”

카시스는 아일라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고는 이러고 좀 더 자면 좋겠다고 속삭였다.

카시스가 놓아주지 않자 그의 바람대로 아일라는 다시 잠이 들었다.

얼마 후, 그는 일어나 방을 나가 집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킬리언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뭐를 하는 거냐, 시스?”

“무엇이 말입니까?”

킬리언이 무엇을 묻는지 알면서 카시스가 되물었다.

“몰라 묻는 것이냐? 혼인도 하지 않고 같이 밤을 보내는 것이 말이 된다 생각하느냐? 네 위치를 생각해라. 넌 황족이고 제국의 유일한 대공이다.”

“저희 같은 귀족이 언제 사람들 시선을 신경 썼습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던 것이 귀족이고 황족입니다.”

“네가 하지도 않던 짓을 하니 하는 말 아니냐?”

“다른 귀족이 하는 일을 제가 못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시스.”

“걱정 마십시오. 저는 다른 귀족들처럼 책임을 회피하는 일은 없습니다. 책임질 수 없는 일은 하지도 않을 겁니다. 처음부터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아일라가 아니면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그녀 이외에 그 누구와도 함께하지 않을 것이고 책임질 일은 만들지도 않을 거다.

“저는 아일라 한 사람만 책임질 겁니다.”

아일라 이외에는 다른 누구도 필요 없다.

“아일라가 떠난 후 파르미온 왕국으로 출발하겠습니다.”

“아, 그거 말인데 그럴 필요 없게 됐다.”

카시스는 고개를 돌려 무슨 말이냐는 듯이 킬리언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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