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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85화 (85/100)
  • 85화

    “아일라?”

    카시스가 아일라를 부르며 천천히 다가가자 아일라는 앞으로 뻗었던 손을 왼쪽 어깨 쪽으로 잡아당기듯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아일라가 천천히 손을 펼치자 아슐레이를 가둔 회오리가 사라졌다. 회오리에서 나오게 된 아슐레이도 상당한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윽!”

    아슐레이는 땅을 짚고 있던 손을 들어 올려 머리를 짚으며 신음을 내뱉었다.

    “그만해요, 당신.”

    부상당한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 아슐레이의 목에 물로 만들어진 거대한 낫이 드리워졌다.

    “세레스?”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요?”

    “알아보는 것이 당연하겠지? 내 힘으로 정화했으니.”

    “아일라?”

    “포르세우스 님이십니까?”

    아일라의 입에서 나온 말에 세레스가 의아함을 담아 그녀를 불렀지만 미간을 찌푸린 아슐레이는 제 딸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눈치챈 듯했다.

    “이 아이의 몸을 잠시 빌렸다.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네 부인이 이 아이의 봉인을 어중간하게 풀어놓기도 했고.”

    “······.”

    “조종당하기나 하고 잘하는 짓이구나.”

    “면목 없습니다.”

    “네 부인과 딸의 저주를 대신 받고 네가 약해진 틈을 노린 것이니, 네 탓만은 아니지. 그 저주를 스무 해 동안 억눌러 놓은 것도 너니까 가능했던 일이니.”

    “못난 놈이라서 송구합니다. 하지만 송구한 것은 송구한 것이고. 이제 그만 제 딸을 돌려주십시오.”

    “안 그래도 그러려던 참이다.”

    말을 마친 후 눈을 감은 그녀의 몸에서 슈욱-! 하고 무언가 빠져나가는 듯하더니 아일라가 그대로 쓰러졌다. 쓰러지는 아일라를 카시스가 붙잡아 품에 안았다.

    “아일라.”

    “인간, 그 아이에게서 떨어져라.”

    아슐레이가 아일라를 품에 안은 카시스를 보며 표정을 굳히고 일갈했다.

    그 순간 아슐레이의 뒤로 쾅, 하고 터지는 소리와 함께 물이 솟아오르더니 오로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한 오로치의 머리 위에는 바이칼이 타고 있었다.

    “오로치와 바이칼 악시온. 거기다 인어족?”

    아슐레이는 치솟았던 바닷물과 함께 인어족과 마린족들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제이드, 괜찮아?”

    “이거 놔!!”

    밑으로 떨어져 헉헉 숨을 몰아쉬며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쓰윽 닦는 제이드를 다니엘이 부축해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제이드가 그의 손을 뿌리쳤다.

    “좋아, 오늘 네 녀석이 죽나 내가 죽나 해보자고.”

    “그런 몸으로 무리야. 제이드.”

    “놓으라고 했어! 그리고 친한 척 내 이름 부르지 마! 난 너를 형으로 인정 안 했어!”

    일어나는 제이드를 다니엘이 다시 붙잡아 주려고 했지만, 제이드가 다시 탁! 소리 나게 뿌리쳤다.

    “그런 몸으로 날 상대하겠다고? 어리석구나. 제이드 앤드류.”

    “그러니까 여기서 누가 죽나 해보자고.”

    “왕이시여, 이자들을 없애십시오.”

    퍼억-!!

    “없어지는 것은 네놈이다. 바이칼 악시온. 잘도 나를 이용했구나.”

    아슐레이의 손짓 한 번에 날아간 물의 창들이 오로치의 몸을 꿰뚫었다. 그러자 오로치가 기괴한 소리를 지르며 휘청거렸고, 머리 위에 타고 있던 바이칼은 하마터면 오로치의 머리 위에서 떨어질 뻔했다.

    “제정신으로 돌아왔다고? 어떻게.”

    “나를 이용했으면 그 대가를 치러야겠지. 안 그런가?”

    아슐레이가 부상당한 몸으로 다시 힘을 사용하려고 하자 세레스가 그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그 옆에선 쨔악-! 하는 찰진 마찰음이 들렸다.

    “미쳤어? 지금 그 몸으로 어쩌려는 거야? 죽고 싶어!”

    부상자 중 제이드가 제일 심하게 다친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잡혀 있는 동안 감옥에서 제일 심하게 고문을 당한 것은 다름 아닌 제이드였다. 지금 정신을 잃지 않고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용할 정도로 말이다.

    “부상자는 물러서라.”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당신도 부상자라고요.”

    척!

    거대한 물의 낫이 아슐레이를 다시 겨냥했다.

    “설마 그걸로 나를 공격할 생각은 아니겠지? 부인.”

    아슐레이는 처음으로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왜 아니겠어요? 적어도 저는 고문당하진 않았으니 멀쩡해요. 하지만 왕비로서 당신을 조종하고 내 딸을 울린 죄를 저 극악무도한 자에게 물겠어요.”

    “그래도 갇혀 있는 동안 지쳤을 것 아니오.”

    “이 정도는 별것 아니에요. 부상당한 당신에 비하면.”

    “나야말로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오.”

    “대화 중 미안하지만 그건 제가 처리하도록 하죠.”

    대화에 끼어드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아슐레이는 아일라를 땅에 내려놓고 일어났다. 그리고 카시스를 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인간이 관여할 일 아니다. 인간들의 도움 따위는 받지 않는다.”

    차갑게 굳은 얼굴로 카시스를 마주 본 아슐레이가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일갈했다.

    “여기는 제 영지의 일부입니다. 그러니 제가 저자와 싸운다 할지라도 문제는 없습니다. 저는 제 영지를 지키려는 것뿐이니.”

    “그렇지. 여기가 칼리스타 영지기는 하지. 그리고 플루투스 제국의 땅이기도 하고.”

    킬리언이 카시스의 옆으로 오며 말을 덧붙였다. 제국 내에서 일어나는 일을 황제인 저와 대공인 카시스가 보고만 있을 리가 없지 않느냐는 어투였다.

    “그러니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마린족의 왕.”

    “아슐레이, 인간들에게 한 번 맡겨 봐요. 당신도 부상을 당한 상태이기도 하고. 내겐 지금 당신이 이러고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여요. 우리 딸이 선택한 사람을 믿어 봐요.”

    “내가 인간들에게 관심을 두지 말라고 그리 일렀거늘.”

    아슐레이는 세레스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도움을 받는 건 이번뿐이오. 나는 인간들은 믿지 않으니.”

    세레스는 빙긋 웃더니 카시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신을 잃고 있는 아일라에게 다가 그 옆에 앉았다.

    “아일라. 네 아버지를 공격은 못 해도 잡아 두려고 애썼구나. 인어족 왕에게 도움을 청했다지. 멜로디와 인어족들이 늦지 않게 와 줘서 살 수 있었단다. 고생했다, 아일라. 지금은 편히 쉬렴.”

    아일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는 세레스의 위로 그림자가 졌다.

    “음-, 아버지. 아빠.”

    “부르네요.”

    세레스가 제 위로 진 그림자를 향해 말하자 움찔거렸다.

    “아일라에게 미안하기는 한가 보네요.”

    아슐레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세레스는 그가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레스와 아일라를 내려다보던 아슐레이는 갑자기 뒤를 돌았다. 그리고 그와 세레스와 아일라를 감싸듯 물의 벽이 생겼다. 이는 다른 마린족이 조종하는 물이 부딪혔다.

    “어리석은 것. 내가 아무리 부상을 당하고 정신적으로 지쳐 있다고 한들, 네 공격이 내게 통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냐? 바이칼 악시온.”

    어둡게 가라앉은 눈을 감았다 뜬 아슐레이의 눈이 빛났다.

    기이잉- 팟.

    “무슨?”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는 내 앞에서 힘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잊었나 보구나.”

    “절대복종.”

    바이칼이 짓씹어 뱉듯 말했다.

    “포르세우스 님만이 인정한 왕만이 사용할 수 있지. 그래서 네 녀석도 내가 약해진 틈을 타서 나를 조종했던 것 아닌가.”

    아슐레이가 물을 조종해 바이칼을 옭아매 붙잡았다. 그리고 그때 킬리언이 마법으로 만들어 낸 수십 개의 불의 검이 오로치의 몸을 꿰뚫었다.

    그 순간 카시스가 오러로 감싼 검으로 오로치를 반으로 잘라 두 동강을 냈다. 카시스는 검을 갈무리하며 돌아서 아일라가 있는 곳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아슐레이가 물을 조종해 다가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만둬요, 그는 아일라의 각인자예요.”

    “지금 뭐라고 했소?”

    “그리고 지금 당신도 회복이 필요해요. 더 이상 힘을 사용하지 말아요.”

    “인간이 각인자라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리오.”

    “흥분하지 말아요.”

    세레스가 일어나 아슐레이를 붙잡았고, 그때 아일라가 눈을 떴다.

    “아버지? 카시스?”

    안 돼!

    아일라는 벌떡 일어나 아슐레이와 카시스의 사이로 끼어들어 카시스의 앞에서 양팔을 벌리고 섰다.

    “안 돼요!”

    “당신이 살의를 비치며 공격하려고 하니까. 아일라가 놀라잖아요.”

    “어, 머니?”

    아일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자 눈이 접히며 웃었다.

    “네가 멜로디와 샤우드를 인어족들과 함께 보냈다지. 그들이 늦지 않게 구하러 와서 살았단다.”

    다행이다. 다니엘과 멜로디가 늦지 않았구나. 정말 다행이야. 그런데 아버지는.

    “당신이 그렇게 무섭게 굳어 있으니 아직도 조종당한다고 생각하잖아요.”

    어?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그럼. 아버지는

    아일라는 달려가 아슐레이를 끌어안았다. 아슐레이는 비틀거리다 주저앉아 아일라를 마주 안아 주었다.

    “아버지. 아버지.”

    아슐레이는 아일라가 안기자 감싸 안고 다독여 주었다.

    “미안하다. 네게 걱정을 끼쳤구나.”

    “정말 아버지다.”

    내가 알고 있는 아버지야.

    “흑흑! 아버지. 아버지.”

    “네가 나를 구한 거란다. 네 힘으로.”

    “내가요?”

    난 아버지를 막으려고 힘을 사용한 기억뿐이 없는데. 그리고, 내 마지막 기억은 아버지의 힘에 갇힌 데서 끝인데.

    “내가 대답을 못 하니, 너를 통해서 개입하신 거겠지만.”

    무슨 말이지?

    “하지만 아일라. 인간과 엮인 것은 물론이고, 각인이라니. 설명을 들어야겠구나.”

    아버지는 인간을 싫어하시지. 그런데 힘들어 보이시는데, 지금은 쉬시는 게 좋지 않을까?

    “우리 대화가 필요할 것 같은데 아니 그렇습니까? 마린족의 왕. 플루투스의 제국의 황제 킬리언 라 오벨리스크 플루투스입니다.”

    어쩐지 어머니 쪽보다 아버지 쪽을 설득하는 것이 더 힘들어 보인다고 느낀 킬리언이 나섰다.

    저도 카시스와 마린족 공주 사이를 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냥 반대해서 미움 사는 것도 싫다. 저는 그냥 지켜보려고 했는데 황태후 폐하같은 최대 난관이 앞에 있었다.

    “인간과 할 이야기는 없다.”

    “아버지, 그러지 마시고.”

    “아일라, 너는 우리와 함께 돌아가는 거다.”

    “미안하지만 아일라는 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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