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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82화 (82/100)

82화

이건 카시스가 위험해지기를 바라지 않아서야. 그리고, 만일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때를 위해서.

그리된다면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게 나아. 내가 죽으면 각인은 저절로 끊어질 거야.

“아버지, 어머니. 모두 내가 갈게. 조금만 기다려.”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것은 싫지만 어쩔 수 없을 때도 있는 거야.

마음 단단히 먹는 거야. 아일라.

나는 할 수 있어!

손에 든 병을 꽉 움켜잡았다 내려놓고는 방문을 열었다.

“아가씨,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클로에에게 다과를 준비해 달라고 해 주겠어요?”

내 말에 아키오스가 클로에의 방으로 갔다.

아직 시간이 남았어. 카시스에게 약을 먹이고 저 창문으로 나가면 될 거야. 문으로 나가진 못해도 창문으로 나가는 거라면 들키지 않을 거야. 카시스를 지키고 싶어.

카시스가 나를 잊는 것은 싫어. 하지만 만일 내가 돌아오지 못할 경우를 생각하면…… 나를 잊는 게 좋을 거야.

“아가씨 더 시키실 것 있으십니까?”

생각에 잠겨 있던 아일라가 디오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 그럼 디오스 경은 카시스를 불러 줘요. 그리고, 카시스와 조용히 대화하고 싶은데 방에서 조금 떨어져 주세요.”

“······.”

“걱정 말아요. 카시스가 옆에 있는데 제가 어떻게 여기를 빠져나갈 수 있겠어요.”

“알겠습니다. 전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방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 후, 카시스에게 말을 전하러 갔던 디오스는 카시스가 하던 일을 마저 마무리 짓고 오겠다고 했다고 말을 전해 주었다.

카시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클로에예요.”

“들어와.”

“여관이다 보니 다과를 준비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어요.”

클로에는 찻잔과 다과 접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고마워. 나가 봐도 돼. 카시스가 오면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네.”

“아, 그리고 나 클로에에게 사과를 못 했던 것 같아. 미안해.”

“후우-, 아가씨. 수면제 같은 건 함부로 사용하시면 안 돼요.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고요.”

“응, 미안해.”

안 그래도 이곳으로 돌아오던 중 카시스에게 한 소리 듣고 디오스와 아키오스 경에게 사과하러 갔다가 또 한 소리 들었다. 평범한 사람에게 자신들에게 썼던 양의 수면제를 사용하면 안 된다고.

“다시는 그러시면 안 돼요. 아셨죠?”

“으, 응.”

“그럼 전하와 즐거운 다과 시간 보내세요.”

클로에가 나간 후, 다과와 차가 먼저 도착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아일라가 약병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뚜껑을 열어 차와 다과에 조금씩 넣고, 나머지는 티 포트에 전부 쏟아부었다.

“1층으로 내려가 있어라. 이야기가 끝나면 다시 부를 테니.”

그때 방문 너머로 카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아일라는 약병을 닫고 허겁지겁 침대 밑으로 밀어 넣었다.

“아일라,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드, 들어와요.”

아일라가 허락하자 방문이 열리며 카시스가 들어왔다. 방으로 들어오던 카시스는 멈칫하더니 방을 한 번 둘러보고 아일라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뭐를 하고 계셨습니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는데요. 그냥 가만히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뭐를 그리 당황하십니까?”

“당황한 적 없어요.”

당황한 적 없다는 것치고는 그가 들어오기 전 인기척이 이상했다. 그리고 그녀의 등 뒤에 있는 협탁의 서랍이 살짝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저와 대화를 하고 싶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맞아요. 우리 다과와 차를 마시면서 잠시 이야기 좀 해요.”

“그래서 저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카시스가 자리에 앉자 아일라도 자리에 앉았다.

“오늘 정오예요. 꼭 가야겠어요?”

아일라는 심호흡을 하고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으며 물었다.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대 혼자는 절대로 가지 못합니다.”

“혼자 아니에요. 멜로디도 있고요. 정 걱정되면 다니엘도 같이.”

“그 둘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대가 직접 가는 것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대를 노리고 있을 것 아닙니까?”

나를 노리고 있다는 말은 사실이니까 반박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인어족들이 도와주기로 했다고도 말했는데.

아일라는 다시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안 마셔요?”

“······.”

“당신하고 대화하면서 마시려고 준비했는데. 안 마시면 제가 서운해요.”

아일라의 말에 카시스가 찻잔을 노려보듯이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곧 찻잔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는 찻잔을 들고도 잠시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입으로 가져가 천천히 마셨다.

“그럼 이렇게 해요. 성에 있는 슈레더를 데리고 와서 그자를 제가 끌고 가서 협상을 하는 거예요.”

“그것도 그대 혼자라면 안 됩니다.”

“왜요? 제 손에도 인질이 있는데요.”

“그 인질, 정말 쓸모 있습니까? 그리고 인질은 그쪽이 더 많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정말 협상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협상이라는 건 동등한 위치에서, 그 인질이 가치가 있을 때 하는 겁니다.”

“윽.”

정곡을 찌르네. 나도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어. 그래도 슈레더 악시온은 바이칼 그자의 아들인데 죽게 내버려 둘까?

“협상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쪽에는 당신이 좋아하는 이들이 전부 인질로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런 위험한 곳에 그대를 보낼 수 없습니다. 차라리 제가 그대 대신 가서 처리하면 모를까.”

“안 돼요!”

“왜 안 됩니까?”

“위험해요.”

“그럼 그런 위험한 곳에 제가 그대를 보낼 것이라 생각했습니까?”

카시스의 찻잔이 빈 것을 본 아일라가 카시스와 자신의 찻잔에 다시 차를 따랐다.

카시스는 아일라와 찻잔을 힐끗 한 번씩 보더니 다시 입으로 가져가 마셨다.

왜, 왜 그러지? 아까도 바로 마시지 않더니.

설마, 뭔가를 눈치챈 건가. 아닐 거야, 아니어야 해.

아일라는 고개를 숙이고 무릎 위에 손을 꽉 움켜잡았다.

“카시스, 이건 제 일이에요.”

“제 연인의 일이니 제가 돕겠다는 것이 뭐가 잘못됐습니까.”

그 말 뒤로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있죠, 카시스.”

아일라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입부러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게는 제 가족도 소중하지만 카시스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대가 혼자 떠나겠다는 이야기라면,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고집 그만 부리십시오.”

아일라의 말을 자르며 카시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제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싸우다 다치거나 죽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미안해요.”

그럼에도 아일라는 이어서 말했고, 카시스가 그런 아일라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어지럼을 느낌 카시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차에······. 뭐를, 탄 겁니까?”

카시스의 무릎이 꺾였다. 이어서 카시스가 무릎을 꿇고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한잠 푹 자고 일어나요. 그리고 나를 잊어요.”

“지금, 뭐라고?”

“나를 잊으면 편할 거예요.”

“아일라.”

아일라는 방을 나가 옆방에 있을 멜로디에게로 갔다. 멜로디와 함께 창문으로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멜로디에게는 미안하지만, 만일 걸리더라도 멜로디가 미끼가 되어 주면 그녀는 무사히 바다로 가서 인어족과 합류해 어머니와 사람들을 구하고 아버지를 구하러 갈 계획이었다.

아일라가 나간 후 카시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일라가 기사들에게 수면제를 먹인 경력이 이 있었기에 경계를 완전히 풀지는 않았다. 그래서 차에 무언가를 탔을 거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지만 마셨다. 그는 검의 최고 경지인 마검사였기에 몸에 들어온 독이나 약물들을 기운으로 몸 밖으로 내보낼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기억을 지우는 약이라고.

“저를 너무 우습게 봤습니다. 아일라.”

카시스는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 단검을 꺼내 제 허벅지를 찔렀다.

“서둘러야 해. 아일라를 따라가야 한다.”

분명 문으로 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약 기운을 몸에서 전부 몰아낸 후에야 따라간다면 아일라를 놓칠 수도 있다. 일단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약 기운을 몰아내고, 조금씩 기를 운용해 따라가면 된다.

카시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탁자를 잡고 큰소리가 나도록 그대로 넘어트렸다.

콰당-!! 와장창!!

큰소리가 나면 제가 일층으로 내려보냈던 디오스와 아키오스가 무슨 일인가 하고 올 것이 분명했다.

그의 예상대로 여관에 울리는 큰소리에 디오스와 아키오스가 금방 방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방 안에는 카시스가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고 아일라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전하?”

“아일라를 쫓아라.”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으니 쫓으란 말이다! 바다로 가라. 분명 바다로 향했을 거다.”

“존명!”

서로를 힐끗 바라본 디오스와 아키오스가 뛰어나가자마자 이제키엘이 들어왔다.

“전하, 이게 무슨 일입니까?”

“경이 나 좀 도와줘야겠어. 아일라가 내게 약을 먹였어.”

“네?”

이제키엘은 놀라서 눈이 커졌다.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게 배리어를 내 주위에 만들어 줘.”

“그런데 다리는?”

“내 다리는 신경 쓰지 마라.”

아무래도 스스로 찌른 것 같았다. 이제키엘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마도구도 함께 드리죠. 배리어가 사라질 때를 대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다리는 일단 응급 처치를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제키엘은 마도구를 카시스의 손에 쥐여 주고는 제 옷을 찢어 다리에 묶어 주었다. 그러고는 카시스의 주위에 물속에 들어가도 숨을 쉴 수 있게 마법으로 배리어도 쳐 주었다.

그사이 카시스는 제 몸속으로 들어온 약 기운을 몸 밖으로 밀어 내기 위해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소드마스터도 이 정도는 몸속에서 몰아낼 수 있다. 그런데 마검사가 이 정도도 몰아내지 못하면 말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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