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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81화 (81/100)
  • 81화

    “정신 차려요.”

    “과연, 네가 아슐레이와 세레스의 딸이로구나. 그 둘을 닮았어. 그래서 조종당하면서 인간이 너를 붙잡았을 때 무의식적으로 너를 지키려고 했던 건가. 쿨럭!”

    “말 그만해요. 죽으면 안 돼요. 제 아버지도 원래대로 돌려주고 당신 아버지도 다시 만나야죠.”

    “컥! 네 아버지가······ 네 어미와 너를 대신해 걸렸던, 의식을 갉아먹는 저주는 이미 풀렸다. 내가 네 아비에게 마지막에 맞힌 건 저주를······, 푸는 술식이 담긴 것이니까.”

    페트라는 저주를 풀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바이칼이 배신을 하고 저를 죽이려 하니 저주를 푸는 것을 선택했다.

    “불쌍한 아이구나. 어리석게도 나와 같은 절차를 밟겠구나.”

    “나는 당신처럼 되지 않아요. 당신은 사랑을 나눈 게 아니에요. 아니, 당신은 진심이었을지는 모르나 그 사람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어요.”

    “아니, 그도 나를 사랑했어.”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거겠죠. 그 사람이 당신을 정말 사랑했다면 당신을 배신하지도 이렇게 변하게 놔두지도 않았겠죠.”

    정말 사랑했다면 그렇게 버렸을 리가 없어. 그런 게 사랑일 리가 없어.

    사랑한다고 속삭였으면서 배신하고 버리는 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야.

    “너와 같은 말을 한 사람이 있었지. 난 그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고. 그는 나를 배신한 자에게 죽었으니까. 그래, 네 말대로 나를 사랑했던 것은 내가 사랑했던······ 그 남자의 친구였을지도 모르겠구나. 아로나 꽃과 셀레스를 섞어······, 만든 약을 아슐레이에게 먹이거라. 그럼 네 아버지는 원래대로 돌아올 테니. 콜록콜록! 헉헉!”

    “아, 안 되겠어. 은혼단, 은혼단이.”

    아일라가 품에서 은혼단을 찾자 다니엘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다니엘 또한 마린족이었다. 그러니 자신들의 왕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늦었습니다. 왕께서는 힘을 사용할 때 신의 힘을 실어서 사용했습니다. 신의 힘은 은혼단으로 치료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상처도 너무 깊습니다.”

    “하지만 살 수도 있잖아. 해 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잖아.”

    “착한 아이구나. 내가 한 짓을 듣고도 내가 살기를 바라다니. 내 아버지도 내가 살아 있기를 바랐겠지? 그래서 나를 이곳으로 쫓아낸 것일 테지. 마녀가 되어 버린 내가 죽음의 바다에서 살아남을 거라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었어.”

    인어 왕의 마음을 알고 있어.

    “네 아버지가 조종당하고 있는 것은 내 저주에 정신을 흐트러뜨리며 말을 듣게 하는 약의 효과가 더해졌기 때문이니 아로나 꽃과 셀레스를 섞어 만든 약을 먹이면 괜찮아질 거다. 그리고 내 아버지를 만나면 전해 주겠느냐? 못난 딸이라 죄송하다고. 내가 인간이었다면, 아니 적어도 너와 같은 마린족이었다면 어쩌면 인간과 이루어졌을지도 모르지. 마린족은 죽으면 바다로 돌아간다지? 그럼 나는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것이 페트라의 마지막 말이었다.

    “아, 안 돼. 죽지 마요. 죽으면 안 돼요!”

    “아일라.”

    카시스가 울음을 터트린 아일라를 품속에 가뒀다. 그렇게 아일라는 카시스의 품에서 한참을 울었다. 아일라가 조금씩 진정이 되어 갈 즈음, 페트라의 시신이 흐려지며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시신까지 사라지면 어떡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거잖아. 너무해. 이런 게 어딨어.”

    인어족도 우리와 같은 바다에 사는데 이건 정말 너무해.

    카시스는 얼굴을 가리고 다시 흐느끼는 아일라를 품에 가두고 진정이 될 때까지 다독여 줬다. 얼마간의 시간이 더 지났을까. 바닷물이 솟아오르더니 글자를 만들어 냈다.

    [왕비 세레스, 제랄드 앤드류, 에리얼 앤드류, 제이드 앤드류는 반역을 저질렀으므로 그 죄를 물어 사흘 후 정오, 왕명으로 처형한다.]

    “제이드? 아버님, 어머님.”

    “말도 안 돼. 어머니와 앤드류 일가를 처형한다고? 아버지가 승낙하셨을 리가 없어.”

    분명 바이칼 악시온의 짓이야. 아버지를 조종한 거라고. 그렇지 않고서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처형시킬 리 없어.

    아버지가 어머니를 얼마나 아끼시고 사랑하시는데.

    “절대로 당신 뜻대로 되게 두지 않아. 바이칼 악시온.”

    내가 막아 보겠어.

    카시스의 시선이 아일라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아일라 일행을 지켜보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이질적인 파란 피부의 흰머리의 여자였다.

    “흠, 죽어 버렸네. 거기에 저를 쫓아낸 자의 저주까지 풀어 주고. 그나저나 재밌네. 플루투스 제국 대공의 여자라.”

    여자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카시스가 시선과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 * *

    카시스와 메르바 항구 마을로 돌아오는 길, 아일라는 아로나 꽃을 구해 아슐레이에게 먹일 약을 만들었다. 그리고 카시스는 모든 것을 봐 버린 아나스타샤에게 아일라는 마린족이며 공주라는 것을 밝히고는 함구할 것을 지시했다. 아나스타샤는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카시스의 말을 믿었다.

    본인이 직접 마린족과 인어족을 보고 그녀에게 공주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는데 제 눈과 귀를 의심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세레스와 앤드류 일가의 처형의 날이 다가왔다.

    아일라는 카시스가 강하다는 것을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인간이기에 바다에서는 불리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와는 함께 가고 싶지 않았은데, 카시스가 제 옆에서 도통 떨어지지를 않아 곤란했다.

    “카시스. 바쁘지 않아요? 해야 할 일 있을 것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제 주위에 일을 잘하는 사람이 있어서. 제 걱정은 마시고, 시간이 얼마 없으니 어쩌실 생각입니까?”

    “말했잖아요. 인어족이 도와준다고 했어요. 그들과 함께 어머니를 구할 거예요.”

    역시 아버지와 카시스가 싸우는 것을 보는 건 싫어. 카시스가 다치고 위험해지는 것도 싫고.

    나 혼자 가야 해.

    “하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저를 두고 혼자 갈 생각은 아니시겠죠? 아일라.”

    흠칫!

    “역시나, 인가.”

    눈을 감고 낮은 한숨을 내쉰 카시스는 아일라의 손목을 낚아채 일으켜 침대로 데려가 눕혔다.

    그녀의 양옆을 짚은 채 위에서 내려다봤다. 가만히 아일라를 내려다보던 카시스가 아일라의 목 근처를 살피더니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러고는 아직 선명한 손자국과 멍이 남아 있는 아일라의 목을 쓰다듬었다.

    움찔!

    “카시스?”

    “내가 혼자 가게 놔둘 것 같습니까? 혼자는 아무 데도 못 갑니다.”

    “혼자가 아니라 멜로디도 갈 거예요. 그리고 말했듯이 인어족이.”

    아일라는 말은 카시스의 입 속으로 사라져 끝맺지 못했다.

    “으음, 카시스. 읍!”

    아일라가 말도 하지 못하게 입을 맞추던 카시스는 아쉬운 탄식을 내뱉으며 떨어졌다. 그러고는 거친 숨을 내뱉는 아일라의 입술을 엄지로 쓸었다.

    “하, 위험한 곳을 나를 두고 갈 생각을 하다니.”

    “당신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바다는 당신한테 불리해요.”

    “불리할 것 없습니다.”

    “물속에서 숨도 못 쉬면서 어쩌겠다는 거예요?”

    “이제키엘이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움직임이 조금 불편할 수 있지만 그건 익숙해지면 되는 일이고.”

    “죽을 수도 있어요.”

    “그 죽을 수도 있는 자리에, 내 연인을, 내가 혼자 보낼 거라 생각하는 건가?”

    화가 난 것 같은데. 착각인가? 아니, 착각이 아니야.

    카시스, 정말 화가 난 것 같아.

    “피곤할 테니 그만 주무십시오. 이야기는 그대가 쉬고 난 뒤로 미루겠습니다.”

    카시스는 몸을 일으켜 방을 나갔다.

    다음 날 아침, 뒤척이며 눈을 뜬 아일라는 잠에서 깬 직후라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얼마 후, 기겁을 하며 벌떡 일어난 아일라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 이게 대······, 대체.”

    너무 당황스러워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왜, 왜 카시스가 내 옆에서 자고 있는데. 그것도 내 손을 꼭 붙잡고.

    분명 어제 혼자 가겠다고 한 제 말에 반대하고, 대화에 진전이 없는 상태에서 쉬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카시스가 방을 나가며 대화가 끝났다. 그 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다 잠이 든 것 같은데.

    깨어 보니 카시스가 제 손을 꼭 잡은 채 옆에 잠들어 있다.

    “깼습니까?”

    깼습니까? 깼습니까? 라니? 아니 왜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같이 들리는 거지?

    “카, 카시스가 왜 나하고 같은 침대에서 자고 있었어요?”

    “안 됩니까? 연인끼리는 한 침대에서 함께 자기도 합니다.”

    “아, 그렇군요.”

    아니, 나는 수긍하면 어쩌자는 거야.

    “걱정 마십시오. 아무 짓도 안 했고 손만 잡고 잤습니다.”

    손만 잡고 잤다고? 정말로?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카시스가 저와 한 침대에서 잔 것은 그날 하루만이 아니었다.

    그다음 날에도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카시스의 은발과 얼굴이었다. 그렇게 카시스와 방 앞을 지키는 기사로 인해 방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고 어머니의 처형일 아침이 다가왔다.

    “어떻게. 어떻게 하지?”

    카시스에게 무사히 돌아오겠다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고 카시스에게 함께 가자고 할 수도 없어. 카시스가 강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만일 잘못되면 어떡해.

    “시간이 없는데. 문 앞에는 디오스와 아키오스 경이 지키고 있어서 몰래 나가는 것은 쉽지 않아. 수면제가 또 통할 리 없고.”

    통하기야 하겠지만 먹일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한 번 당했으니 경계할 게 뻔했다.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고 큰소리치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자신이 없다. 아직 아버지께서 드실 약이 완성도 안 됐고. 카시스가 인어족 공주처럼 죽으면 어떡해. 그런 건 정말 싫어.

    “무슨 방법이 없을까? 아! 그래!”

    아일라는 인어족의 왕이 건네주었던 병을 꺼내 손에 쥐었다.

    카시스가 같이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니까 이제 이 방법뿐이 없어. 내가 이걸 카시스에게 먹일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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