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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80화 (80/100)
  • 80화

    아버지가······. 포르세우스 님의 아들? 처음 듣는 말이야.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네. 그는 마린족 왕의 상징인 신의 힘을 일부 사용했으니까. 그중 하나가 절대복종이었지. 그 힘 앞에서는 같은 마린족도 힘을 사용하지 못하더군. 그것을 알고 있나, 공주. 꽤 오랫동안 신의 힘이 마린족 왕들에게 전해져 내려오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네.”

    “그건 역사책에서 봤습니다.”

    “그 이유도 알겠지. 바다의 신이 마린족의 왕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네. 정당하게 계승된 왕위가 아니었기에 바다 신의 버림을 받아 신의 힘이 계승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저주다 이런 말들이 많았지. 인어족인 짐이 이 사실을 어찌 아는지 궁금한 모양이군.”

    앗, 내 표정에 나타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같은 바다에 살다 보니 알게 되는 것이 있다네. 실제로 공주의 아버지가 나타나기 전까지 마린족은 멸망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지.”

    아버지······.

    “신이 인정한 왕이 그리되었는데 공주라면 신이 용서를 할 수 있겠는가. 공주도 짐의 딸을 용서하지 못할 것 아닌가.”

    “네, 용서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분이 안타깝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났더라면, 좋은 반려를 만나 아이를 잃지 않았다면 그리 변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짐은 그 아이가 살아만 있으면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아이를 진정으로 구하는 것은 죽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슬퍼 보여. 내가 만일 인어 공주님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버지도 나와 카시스의 사이를 반대하셨던걸까? 인어족 왕을 보니 알겠어.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를 정말 사랑하시는구나, 새삼 깨닫게 되네. 하지만 나는 역시 카시스를 포기할 수 없는걸. 믿고 싶어. 아니, 카시스는 다르다고 믿어. 내가 카시스에게 이 약을 먹이는 일은 없을 거야.

    “저는 그분을 만나서 이야기해 보고 싶어요.”

    아일라는 인어왕이 건네준 기억을 지우는 약을 꼭 움켜잡았다.

    만일 이 약을 먹이면 슬프고 괴로운 기억은 그대로 사라져 버리는 걸까?

    “저는 아버지를 구해야 돼요.”

    나는 뭐든지 할 거야.

    “그러니 죽음의 바다로 가는 저를 막지 말아 주세요.”

    아일라는 인어족 왕에게 인사를 하고 뒤돌아 나와 죽음의 바다를 향해 갔다.

    죽음의 바다에 가까워질수록 아일라는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던 아일라는 조금더 빠르게 헤엄치다 죽음의 바다의 다다랐을 때 멈칫하며 멈춰서 위를 올려다 봤다.

    주변이 시끄러워. 특히 위쪽이. 그러고 보니 죽음의 바다 경계선에 육지가 있었어.

    아일라가 위를 바라보다 물 위로 올라가는데 죽은 마물들이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마물? 여기까지 와서 마물을 죽일 사람은 없는데.”

    “아슐레이 아틀란!!”

    그녀가 막 물 위로 얼굴을 내밀었을 때 고막을 찢는 듯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들린 곳을 보니 아슐레이가 육지에서 마녀를 물에 가둔 채 마물들을 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바이칼 악시온이 있었다.

    “아버지?”

    “바이칼 악시온, 네 이놈!”

    아일라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아슐레이를 바라보는데 다시 페트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구나! 마물을 다루는 방법을 알려 달라 한 것 또한 마물들을 내게서 빼앗을 생각이었어.”

    “당연하지 않은가? 너를 정말 풀어 줄 수 없으니. 내가 너를 죽음의 바다에서 나오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지킬 것이라 생각했나? 미치지 않고서야 풀어 줄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바다를 지배하는 왕이 될 텐데 내 바다를 망치게 할 수는 없지. 저 마녀를 죽이십시오. 왕이시여.”

    페트라를 가둔 물의 구체 안에 날카로운 물의 화살이 생겨나 페트라를 공격했다.

    안 돼!

    “아버지!”

    파앙! 촤아악 풍덩!!

    아일라가 아슐레이를 부르며 육지로 헤엄쳤다. 그러고는 물을 조종해, 페트라가 갇혀 있는 물의 구를 터트려 페트라를 바다로 떨어트렸다. 아일라는 열심히 헤엄쳐 엉망진창으로 다친 몸으로 바위를 잡고 힘껏 아슐레이와 바이칼을 노려보는 페트라의 앞을 막아섰다.

    “아버지.”

    아일라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아슐레이를 바라봤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이 부르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고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아일라는 그런 아슐레이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의 앞까지 다가간 아일라는 옷깃을 잡으며 다시 그를 부렀다.

    “아버지.”

    짜악-!!

    바로 그때, 찰진 마찰음과 함께 아일라는 나가떨어졌다.

    “아, 아버지.”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맞은 뺨을 감싼 채 아일라가 아슐레이를 올려다봤다.

    “아버지. 저예요, 아버지 딸 아일라예요.”

    “이런, 공주님 아니십니까? 이런 위험한 곳에 오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

    바이칼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일라는 그 미소가 기분이 나빴다.

    “제 아들 녀석이 공주님을 모시러 갔는데 만나지 못하셨습니까?”

    “아버지, 안 돼요!”

    바이칼을 올려다보던 아일라는 페트라를 다시 공격하려는 아슐레이를 보고는 발치로 다가가 그의 바지 자락을 잡았다.

    “아버지, 제발.”

    “아버지를 방해하다니 참으로 못된 딸이 아닙니까? 아니 그렇습니까? 왕이시여. 못된 아이는 벌을 받아야지요.”

    “우욱. 아, 버지.”

    아슐레이는 그대로 아일라의 목을 한 손으로 잡고 들어 올렸다.

    “아버지.”

    숨이 막힌 아일라는 제 목을 잡을 아슐레이의 손을 잡았지만 그뿐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공격할 수 없어.

    “아버지. 흐윽! 아빠. 흑!”

    아일라의 눈물이 아일라의 목을 조르고 있는 아슐레이의 손에 닿았고, 아슐레이의 손목을 잡은 아일라의 손이 밑으로 떨어지며 축 처졌다. 그 순간 아슐레이의 눈썹이 까닥이며 미간이 좁혀졌다. 그리고 어디선가 물줄기가 날아오자 아슐레이는 다른 손으로 공격을 막아 냈다.

    하지만 어느새 제 안으로 파고든 검은 그림자의 공격은 막아 내지 못했다.

    공격을 제대로 맞은 아슐레이는 아일라를 놓치며 멀찍이 나가떨어져 바다로 빠졌고 아슐레이가 놓친, 뭍으로 떨어지는 아일라를 한 그림자가 붙잡아 품에 안았다.

    “아일라. 아일라, 정신 차리십시오.”

    “······.”

    “아일라!”

    “컥! 쿨럭! 쿨럭!”

    “아일라. 정신이 듭니까?”

    “……카시스?”

    막혔던 숨이 트이자 마른기침을 연신 하던 아일라는 카시스를 보고는 놀라서 눈이 커졌다.

    “카시스가 왜.”

    여기 있어요? 라는 뒷말은 하지 못했다.

    목이 아파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카시스는 한 팔로 나를 감싸 안은 채 바다를 바라봤다. 그가 바라본 바다 위에는 아버지가 물에 떠 있었다. 카시스는 아버지를 매섭게 노려봤다.

    안 돼. 아버지와 카시스가 싸우다니, 그런 거 싫어.

    “카시스.”

    갈라지고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짜내어 겨우 그를 부르며 앞섶을 움켜잡았다.

    “제 아버지예요.”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제, 아버지라고요.”

    “마린족의 왕. 그대의 아버지라고? 근데 왜 그대를 죽이려 합니까?”

    나는 그의 옷깃을 더 꽉 움켜잡은 채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아버지의 저런 모습 보고 싶지 않아. 카시스와 아버지가 싸우는 모습도 보고 싶지 않아.

    한심해. 아버지를 구하고 아틀란을 구하겠다고 했으면서 막상 아버지를 보니 아무것도 못 하는 내가 한심해.

    “흑! 흐윽!”

    “아일라.”

    “저자가 바이칼 악시온이군요.”

    “아일라, 괜찮아?”

    제가 잘 알고 있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이곳에 온 것은 카시스뿐이 아니었다. 어딘가를 갔다던 다니엘도 있었고 멜로디, 그리고 디오스와 아키오스 경과 제게 자신을 아나스타샤 벨로체라고 소개했던 여기사도 함께였다. 거기에 이제키엘도 함께 있었다.

    “나를 아는 건가?”

    “왜 공주님께서 여기 계시는 겁니까? 전하께서 이곳에 오신 것도 놀랐는데 전하께서 공주님을 이곳에서 찾아서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압니까?”

    다니엘을 바이칼의 말을 듣지 못한 듯이 아일라를 타박했다.

    “인간 따위가. 감히 떨어져라.”

    여태껏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바이칼이 시키는 대로 하던 아슐레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바이칼이 놀란 눈으로 아슐레이를 쳐다봤다. 하지만 아슐레이의 눈은 아직 초점이 없었다.

    “아버지?”

    “그 아이에게서 떨어지라고 했다. 인간들!”

    촤아악! 솟아오른 바닷물이 여러 갈래로 갈려 끝은 날카로운 송곳처럼 변해 카시스 일행에게로 날아갔다. 이제키엘은 방어 마법을 시전해 일행을 지켰다. 하지만 계속 부딪혀 오는 강한 힘에 방어막이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아버지가 나를 알아보신 건가?

    “아, 버.”

    아슐레이를 부르며 일어나는 아일라의 손목을 카시스가 잡았다.

    “위험합니다.”

    “감히!!”

    아일라를 품에 안고 있던 것도 모자라, 품에서 벗어나는 아일라의 손목을 카시스가 붙잡자 아슐레이의 공격이 더욱 맹렬해졌다.

    “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눈을 보면 정신이 돌아온 것이 아니다.

    설마, 공주 때문인가? 그렇다면 공주는 살려 두면 안 된다. 죽여야 한다.

    왕을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되었는데. 곤란해.

    바이칼은 인상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그사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아슐레이가 비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설마 조금 전 타격을 입은 건가.

    “왕이시여. 마녀를 죽이고 돌아가야 합니다.”

    마법 방어막에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바이칼의 말에 세 줄기의 날카롭게 변한 물줄기가 페트라의 몸을 꿰뚫었다. 이미 상처투성이였던 페트라는 피하지 못했지만 한 줄기의 검은빛이 아슐레이를 관통했다. 그러자 아슐레이가 바다에 빠졌고 이를 본 바이칼이 곧바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아빠!! 안 돼!!”

    아빠가.

    아일라가 쫓아가려고 했지만 카시스가 그런 아일라를 강한 힘으로 붙잡았다. 그 탓에 아슐레이를 미처 따라가지 못한 아일라는 그 대신 페트라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죽으면 안 돼요! 아버지를 원래대로 돌려줘요.”

    “쿨럭!”

    페트라는 검붉은 피를 토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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