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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79화 (79/100)
  • 79화

    “듣지 못했느냐? 아틀란의 왕이 마물과 함께 우리를 공격했다.”

    “아버지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와 당시 배 속에 있던 저를 지키려다 대신 저주에 걸리셨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일 년도 전에 쓰러지면서 그 저주가 발현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공주가 태어나기 전. 설마?”

    인어족의 왕은 아일라의 말을 듣고 뭔가 짚이는 것이 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악시온 그자가 그 틈으로 파고들어 정신을 흐트리는 약을 아버지께 먹여 조종하는 겁니다. 저는 그자의 손에서 아틀란을 되찾고 아버지를 구하고 싶습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아일라는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였다.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아버지를 구할 수 있다면, 아틀란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내가 사랑하는 바다가 평화로울 수만 있다면 이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아.

    * * *

    사위가 어두워서인지 말발굽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급하게 달리던 말의 고삐를 잡아당기자 말이 앞발을 올리며 ‘히이잉-’ 길게 울더니 투레질을 하며 푸르륵거렸고 말 위에서 카시스는 뛰어내렸다. 말에서 내린 카시스는 여관 앞에 있는 라피스 앞까지 다가갔다.

    “아일라는?”

    “······.”

    “대답해. 아일라는 어디 있지?”

    다시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여관 문을 ‘쾅!’ 소리 나게 열고 들어간 카시스는 곧바로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가 아일라의 방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디오스와 아키오스가 문 양옆으로 벽에 기대어 앉아 잠이 들어 있었으니까. 그 모습을 본 카시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콰앙-!!

    문이 부서지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카시스는 방문을 걷어차며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멜로디는 갑작스러운 소란에 몸을 벌떡 일으켜 앉아 돌아봤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일라가 아니다. 마법으로 머리와 눈동자색을 아일라와 같은 것으로 바꾸었지만 침대 위에 있는 것은 아일라가 아니었다.

    주먹을 말아 쥔 카시스는 뒤돌아 나갔다.

    “일어나라. 일어나!”

    쾅!! 쩌저적!

    이번엔 벽을 걷어차자 벽에 금이 갔고, 디오스와 아키오스가 신음을 뱉으며 머리를 짚으며 정신을 차렸다.

    “으윽, 전하?”

    디오스와 아키오스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자신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카시스를 보게 됐다.

    “아일라를 지키라고 복귀시켰더니 호위 대상이 사라지는 것도 모르고 자고 있는 건가.”

    “아가씨는 방에.”

    “방에 아일라가 어디에 있다는 거지? 지금 방에 있는 건 아일라가 아니다.”

    아키오스의 말을 자르며 카시스가 차갑게 말했다.

    뛰어난 기사면 뭐 하나. 호위 대상을 놓치면 소용없는 것을.

    “이게 대체······.”

    디오스가 몸을 일으켜 방 안을 들여다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 그곳에는 카시스의 말대로 아일라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다.

    “누가 설명 좀 하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이고 아일라는 지금 어디 있는지?”

    저는 앞으로도 파르미온 왕국에 가야 할 일이 생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이면 아무리 제 기사들이라 할지라도 아일라를 맡기고 갈 수 있겠는가.

    “하아-, 이래서 도와주고 싶지 않았는데. 미안해요. 당신들한테 꽤 많은 수면제를 먹였어요. 기사들이라 웬만하면 잠이 안 들 것 같아서요.”

    “수면제를 말입니까? 대체 언제?”

    “설마? 식사 때 넣은 겁니까? 여관 주인입니까?”

    아키오스에 이어 디오스가 물었다.

    “걱정 말아요. 돌아올 때가 되었으니까. 근데 꽤 일찍 왔네요. 며칠 더 있다가 온다고 들었는데요.”

    “아일라, 지금 어딨습니까?”

    “지금 당신이 갈 수 없는 곳. 바닷속이요.”

    “돌아, 간 겁니까?”

    “아니요. 돌아온다고 했어요. 도움을 청하러 갔어요. 바다에서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존재들한테요. 당신이 아무리 아일라를 도와준다고 할지라도 바다 깊숙한 곳까진 들어갈 수 없어요.”

    죽음의 바다의 마녀도 만나고 온다고 했지만, 이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카시스는 놓치지 않고 들었다. 그가 기사도 아니고 평범한 사람이라면 듣지 못했을 말이었다.

    카시스는 최고 경지인 마검사였다. 웬만한 거리에서는 작게 말하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죽음의 바다의 마녀를 만난다고 했습니까?”

    “……그걸 들었나요?”

    당연히 들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듣지 못했겠지만 저는 아니다.

    “대체 무슨 말들을 하는 거죠?”

    방 안으로 다시 발을 들여놓으려던 카시스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엔 아나스타샤가 벽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정신이 들기 시작하자 비틀거리며 이층으로 올라왔다. 그런데 카시스가 와 있는 데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하고 있었다.

    “벨로체 자작. 그대도 있었나?”

    “후작 각하와 윈터우드 백작께서 저도 함께 다녀와 달라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지금 기사 셋이 당한 건가? 하아······.

    카시스는 머리를 짚으며 라피스가 있는 곳을 힐끗 바라봤다.

    라피스까지 아일라를 놓칠 줄이야.

    “대공 전하.”

    “지금은 말해 줄 수 없습니다.”

    아일라가 이종족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을수록 위험에 노출된다.

    “디오스 경. 아키오스 경.”

    “면목 없습니다. 아가씨께서 저희에게 수면제를 쓰실 거라고는 생각 못 하고 방심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지. 이제키엘을 불러야겠다.”

    마법으로 방어막을 만들면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다. 그러니 아일라를 찾으러 갈 거다.

    “인어족이 있는 곳이든 죽음의 바다든 안내하십시오.”

    “설마 바닷속으로 들어간다거나 죽음의 바다로 갈 생각인 건가요?”

    “왜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카시스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일라가 돌아온다고 했으면 돌아와요. 그러니까······.”

    “기다릴 수 없습니다.”

    멜로디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아직 불안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 불안함은 아일라가 다친 곳 하나 없이 무사하다는 것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아일라. 내가 돌아오면 상의하자고 하자고 했는데 왜······.”

    제가 늘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리 친절하지도 상냥하지도 않다고. 그러니 그대가 떠나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보고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카시스는 홱 돌아서 밖으로 나갔다.

    * * *

    다음 날, 오전쯤 이제키엘이 카시스가 있는 여관에 당도했고 바로 그 시각 아일라는 초조하게 인어 왕의 알현실 앞을 서성이다 문이 열리자 돌아섰다.

    “왕께서 부르십니다.”

    “결정을 내리신 건가요?”

    “직접 들으십시오. 따라오십시오.”

    왕족의 자존심도 버리고 무릎을 꿇고 머리까지 숙였는데. 도와주겠지? 도와줄 거야. 좋게 생각하자.

    아일라는 다시 한번 인어족의 왕 앞에 섰다.

    “결정을 하셨나요?”

    “결정을 내렸네. 아틀란이 바다의 평화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바다 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왕은 오로지 마린족에서만 태어났었다. 그것도 바다의 신 포르세우스가 인정한 마린족만 사용할 수 있지. 공주의 아버지는 바다의 신 포르세우스가 인정한 마린족의 왕.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바다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 말은?”

    “짐 또한 바다를 사랑한다. 그러니 공주를 도와주겠다.”

    “감사합니다, 인어족의 왕이시여.”

    표정이 밝아진 아일라가 예를 갖춰 감사 인사를 했다. 아일라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앞에는 쟁반과 뭔가 들어 있는 병이 놓여 있었다.

    이게 뭐지?

    일단 주는 것 같아 손에 들고는 인어 왕을 바라봤다. 의문은 금방 풀렸다.

    “그건 기억을 지우는 약이네. 공주의 생각이 바뀌면 그 약을 각인자에게 먹이게.”

    이건 쓸데없는 참견이신 것 같은데.

    “짐은 공주가 내 딸과 같이 되기를 바라지 않아. 그러니 공주의 마음이 바뀌거나 그 인간 각인자가 공주에게 마음이 없고 배신을 할 것 같으면 아무런 미련도 같지 말고 망설임 없이 돌아서 그 약을 먹이고 새로운 각인자를 찾게나.”

    “제가 이걸 그 사람한테 먹일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 생각해 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받지 않겠습니다.”

    “사람 일은 모르는 일이니 받아 두게. 그리고 인간을 너무 믿지 말게. 짐도 짐의 딸이 그리될 줄 알겠는가. 공주는 그리되지 않기를 바라서 그러는 거네. 그리되면 되돌릴 방법이 없네. 그래도 죽게 할 수 없어. 죽음의 바다로 쫓아내는 것으로 합의를 했지만. 정말 그 아이가 마린족의 왕을 변하게 했다면 짐도 결단을 내려야겠지.”

    검은 바다가 죽음의 바다라고 더 많이 불리는 이유가 있다. 죽음의 바다는 마물 이외에는 아무도 살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곳으로 내쫓았다면 죽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인어족의 왕께서 그곳에서 딸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던 걸까. 살아만 있기를 바랐던 걸까? 그런 딸을 포기하겠다는 건가?

    “제가 죽음의 바다로 가서 그분을 만나 보려고 합니다.”

    저리도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 앞에서 마녀라는 말을 꺼낼 수가 없잖아.

    “만날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네. 아니, 죽음의 바다로 갈 생각은 말게.”

    “제가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 테니 아버지의 저주를 풀어 달라 설득할 생각입니다.”

    “공주는 여태껏 짐이 딸을 원래대로 돌릴 방법을 찾아보지 않았다 여기는가? 그 아이가 종족을 잡아먹는 괴물이 되고 마녀가 되었다 할지라도 짐에게는 소중한 딸이네. 구해 볼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어. 종족을 잡아먹은 그 순간부터 돌이킬 수 없었던 거네.”

    “포르세우스 님께 기도를 드리면.”

    “들어주지 않으실 거네. 더욱이 마린족의 왕이 그리된 원인이 그 아이라면 더 노여워하시겠지. 공주의 아버지는 바다의 신이 바다가 제 욕심을 채우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보낸 신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지. 그는 바다의 신 제단에서 깨어난 존재니까. 망가져 가는 마린족도 인어족이나 마물들과의 전쟁으로 피로 물들어 가는 바다를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바다 신의 아들 보냈다는 말이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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