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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78화 (78/100)

78화

아일라의 생각대로 돈과 목걸이를 손에 쥐여 주자 여관 주인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떡이고는 수면제를 받았다. 아일라는 멜로디와 방 안에서 식사를 하고 디오스와 아키오스가 먼저 식사를 하고 돌아와 아일라가 묵는 방 앞을 지키고 섰다. 그 둘 다음으로 식사를 한 것은 아나스타샤와 클로에 그리고 라피스였다. 그들은 여관 일층 식당 쪽에서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던 아나스타샤는 이상함을 느꼈다. 어지러움을 느끼고 비틀거리며 쓰러지지 않으려 했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탓에 의자가 소리를 내며 쓰러졌고 다른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두 시녀가 식탁에 엎어져 있었다.

누가 이런 짓을? 음식에 뭐를 탄 거야?

“정신 차려, 아나스타샤.”

전하의 연인이 위험해지겠어.

다시 일어나려고 할 때 식당 문이 열리며 아일라가 들어오더니 하녀들에게로 가까이 걸어갔다.

“미안해. 잠깐만 자고 있어. 몇 시간만 푹 자고 일어나.”

“설마, 당신이 음식에 뭘 넣은 건가요.”

“아, 기사라고 하더니 아직 잠이 안 들었네요. 디오스와 아키오스 경보다 조금 덜 넣게 했는데. 그래서 아직 잠이 안 들었군요. 잠깐 외출을 해야 하는데 따라오면 안 돼서요. 미안해요.”

아일라는 아나스타샤도 곧 잠들겠거니, 하고 그 말을 하고 식당을 나가 여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때 쓰러져 있던 라피스가 몸을 일으켜 아일라가 나간 문을 가만히 보더니 뒤따라 나갔다.

“너, 잠든 게 아니었어?”

“저는 먹는 척만 했지. 진짜 먹지는 않았습니다.”

“너, 하녀가 아니구나. 너는 뭐지?”

아나스타샤는 잠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힘겹게 말했다.

“당신이 아가씨를 해하려 하지 않고 대공 전하의 적이 되지 않는 이상, 아군이라고 해 두겠습니다.”

라피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밖으로 나갔고 아나스타샤는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 멜로디는 방에서 아일라가 건네준 마법약을 마셨다. 그러고는 아일라와 같이 머리는 갈색, 그리고 눈동자는 보랏빛으로 변한 채 침대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리고 아일라는 바닷가에서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다 망토를 벗고 처음 뭍으로 올라왔을 때 복장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아가씨!”

아일라에게 시선을 떼지 말라는 명을 받았던 라피스는 아일라가 어디를 다녀오려고 하는 것일까 알아보기 위해 뒤따라와 조금 멀리서 지켜봤다. 그러다 바다로 들어가는 아일라를 보고는 당황해서 뛰어갔지만 아일라는 이미 바닷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그리운 바다. 고향으로 돌아온 느낌이야.

“앗,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잖아. 먼저 인어족 왕을 만나야 해.”

아일라는 빠르게 헤엄쳐 인어족의 영역으로 향했다.

잠이 든 클로에에게 잠깐이라고는 말했지만, 이건 잠깐의 외출이 아니었다.

멜로디가 아프다는 핑계로 침대에서 나오지 않기로 했지만. 조금 걱정되기는 하네.

“이대로 한 시간 반 정도만 가면 인어족의 영역이었지.”

아일라는 기억을 더듬어 속도를 더 높였다.

인어족의 영역에 들어선 아일라는 바로 인어족의 궁으로 향했지만 인어족 병사들에게 막혔다.

“누구냐?”

“이곳은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나는 마린족의 공주예요. 마린족의 공주 아일라 아틀란이 인어족의 왕께 뵙기를 청한다고 전해 주세요.”

“마린족이라고?”

두 인어족 병사는 서로를 바라보다 아일라를 위아래로 훑었다.

왜, 왜 저렇게 보는 거지?

왜 저를 이상한 눈빛으로 훑어보나 생각하던 아일라는 제 앞에 창끝이 겨누어지자 움찔했다.

왜? 왜 이래?

“거짓말하지 마라.”

“넌 마린족이 아니다.”

“정체를 밝혀라. 네겐 마린족의 특징이 없다.”

아!? 내 머리와 눈동자색! 이건 물약을 먹은 게 아니라 이제키엘 경이 마법을 걸어 준 거였지.

“나는 마린족이 맞아요. 이 바닷속에서 마린족과 인어족 이외에 숨을 쉴 수 있는 종족이 있나요? 제가 알기로는 없는데요.”

물론 고래나 돌고래, 물고기들 그리고 바다에 사는 마물들을 제외한 종족을 말하는 거였다.

“이 머리와 눈동자색은 인간들 중에서 마법사라고 불리는 분이 바꿔 준 거예요. 내가 지금 여기서 당신들과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이 마린족이라는 증거예요.”

“······잠시 기다리십시오.”

아일라를 빤히 바라보던 병사 한 명이 보고하기 위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한 명이 안으로 들어간 지도 시간이 꽤 오래된 것 같았는데 돌아오지 않자 아일라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설마 만나 주지 않으려는 건 아니겠지.

“안 돼. 꼭 만나야 해.”

지금 마물을 막을 수 있는 것도, 마린족과 맞설 수 있는 것도 인어족뿐이야.

“제발.”

아일라는 두 손을 모아 잡고 눈을 꼭 감았다. 그때 안으로 들어갔던 병사가 나왔다.

“왕께서 만나시겠다 하시오. 따라오시오.”

그 말을 듣자 눈을 뜬 아일라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병사를 따라 들어간 곳에는 인어들이 가운데만 남겨 놓고 양옆으로 나열해 있었다. 그리고 중앙으로 난 길 끝, 계단 위 왕좌에는 왕관을 쓰고 있는 인어들의 왕이 앉아 있었다.

“아틀란의 공주 아일라 아틀란이 인어족의 왕께 인사드립니다.”

아일라는 치마를 살며시 잡아 올리며 예의를 갖춰 인사를 했다.

“지금 공주의 머리와 눈동자색은 다르지만 확실히 아틀란의 왕과 왕비를 닮았군. 왕비 쪽을 더 닮은 듯하지만 말이야. 오래 기다렸는가? 공주를 만날 준비를 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네.”

“아닙니다. 이렇게 만나 주신 것만으로도 감읍할 따름입니다.”

만나 주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공주답게 굴어야 해.

“그래서 마린족의 공주가 나를 만나자고 한 연유가 무엇인가?”

“인어족의 왕께 도움이 청하고 싶어. 이리 뵙기를 청했습니다.”

“뻔뻔하기도 하지. 어떻게 우리에게 도와달라고 할 수 있지?”

“우리가 우스운가?”

“양심이 있어야지!”

인어족의 왕은 입을 다물고 잠시 정적이 흘렀지만 그것도 잠시, 주위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왜, 왜들 이러지?

아일라는 당황스러웠다. 양심까지 운운할 줄은 몰랐다.

“그만.”

왕이 손을 들며 중재시켰다.

“공주. 공주는 마린족이 우릴 공격한 것을 알고 있는가? 그것도 공주의 아버지가 직접 마물들을 끌고 말이네.”

“-!!?”

“표정을 보아 하니 모르는 것 같군.”

“모를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만들 하게. 공주의 말을 들어볼 것이니.”

아버지가······ 인어족을 공격했다고? 대체 언제?

“공주 다시 묻지. 공주는 정령 모르고 있었는가?”

“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위에서 말도 안 된다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느냐며 다시 소란스러워지자 인어 왕이 다시 그들을 조용히 시켰다.

“진정으로 모르고 있었는가?”

“몰랐습니다. 저는 뭍에 있다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오늘 바다로 돌아와 바로 이곳으로 왔습니다.”

“뭍, 뭍이라. 인간들과 있었다는 말인가?”

“예, 저는 인간 중에서 반려를 얻고 싶었습니다. 아니, 지금도 인간과 혼인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반드시 무사히 돌아가서 카시스를 만날 거야.

“마린족의 공주가 허황된 꿈을 꾸는구나. 인간은 약속도 지키지 않고 비열하다.”

“분명, 나쁜 인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내 딸이 어찌 되었는지 알고 말하는 것이냐? 알 리가 없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들었다고?”

“네, 어머니께 들었습니다.”

“공주 어머니께 듣고도 인간을 반려로 삼겠다는 것인가. 내가 인간이 좋은 인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인간들이 전부 나쁜 건 아닌데. 인어족의 왕도 인간에 대한 적대심이 굉장하다. 딸 때문이겠지.

“제가 뭍으로 올라가 만난 사람은 저를 배신할 사람이 아닙니다. ”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그것을 공주가 어찌 알지? 내 딸은 그 인간이 배신할 줄 알았겠는가?”

“모르셨을 겁니다. 저도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거짓 결말을 전부 믿고 꿈을 키웠으니까요. 저 또한 뭍으로 올라, 친절하고 좋은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먼저 시비를 걸거나 무시를 하며 함부로 대하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친절하고 따뜻하고 진심으로 저를 걱정하고 생각해 주는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따님을 배신한 그 한 사람만 보고 세상 사람들이 전부 나쁘다 비열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물론 저라도 인어족의 왕과 같은 일을 겪었다면 화가 났을 겁니다. 인간들을 혐오하고 미워했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본 세상의 사람들은 전부 혐오스러울 정도로 우리 같은 종족에게 함부로 하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린 것이 말은 잘하는구나.”

“저는 인간을 반려로 정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카시스 내게 용기를 줘요.

“이미 인간을 반려로 삼은 것인가.”

“제게는 인간 각인자가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만난 이들을 직접 보시고 판단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인간들과 잘 지내고 서로 교류하며 도우며 살고 싶습니다.”

“공주의 부모가 허락할 것 같지는 않은데.”

“제 부모님을 설득하는 일은 제 일입니다. 그러니 부디 저를 도와주십시오.”

아버지와 어머니를 설득하는 것은 아틀란을 되찾고 두 분을 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거다.

“저는 전쟁으로 제가 사랑하는 이 바다가 피바다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마물들에게 더럽혀지기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리 도움을 청하러 온 것입니다.”

“아까도 내게 도움을 청한다고 했었지.”

“예, 아틀란을 되찾고 아버지를 구하고 마물을 몰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지금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 안 돼. 인어족에 도움을 받아서 아버지와 아틀란을 되찾을 거야.

받은 도움은 갚으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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