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영상이 되는 영상석은 제국에 몇 개 되지 않았기에, 아일라에게 주지 못했다. 게다가 그 통신석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마력이 강하거나 마력석이 있어야 했기에 더 있었다 하더라도 아일라에게는 줄 수 없었다.
긴급한 상황이라거나 황제가 아우의 얼굴을 보며 대화해야겠다 연락할 때를 제외하고는 영상석은 잘 사용되지도 않았다. 아직은 오류가 많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명심하십시오. 위험한 일은 하시면 안 됩니다. 위험할 것 같으면 그 자리를 피하십시오.”
“알았어요.”
아일라의 대답을 들은 윌리엄이 마차 문을 열고 아일라가 마차에 오를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 뒤를 따라 멜로디와 클로에 그리고 라피스가 마차에 올랐다. 윌리엄이 마차 문을 닫고 마부에게 출발해도 된다는 신호를 보내면서 마차가 출발하고 디오스와 아키오스 그리고 아나스타샤가 말에 올라 마차를 호위했다.
“왜 그러십니까? 표정이 좋지 못하십니다.”
“뭔가 자꾸 걸리고 찜찜해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일을 마치고 저도 따라가 봐야겠습니다.”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는 윌리엄의 표정이 좋지 못하자 이제키엘이 물었다. 대답을 마친 윌리엄은 돌아서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거 정말 전하께 보고하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각하도 찜찜해하시면서 말입니다.”
뒤따라오며 묻는 이제키엘의 말에 윌리엄이 우뚝 멈춰 섰다.
“전하께서도 일을 마치고 돌아오셔야 하지 않습니까. 프란츠와 데프리카 두 백작을 처리하면 아가씨께 크게 위험이 될 일은 없을 거라 봅니다. 벤자민 프란츠는 그냥 두십시오. 전하께서 직접 처리하실 테니.”
윌리엄을 다시 발을 떼어 내,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와 이마를 짚으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내가 무슨 짓을.”
이제키엘의 말대로 이건 카시스에게 보고를 해야 하는 일이다. 아니, 어제 메르바 항구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듣자마자 카시스에게 연락해 허락을 받고 보내야 했다.
나도 아직은 카시스와 마린족의 공주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보다 헤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큰가 보다.
“이걸 알면 나를 죽이려고 하겠군. 늦었지만 연락해야겠지.”
클로에를 살려 준 제 친우, 카시스의 뒷통수를 쳐 버렸군. 카시스가 클로에를 도와준 것은 반역에 얽혔을 때만이 아니었지. 그런데 난······.
“역시 연락해야겠어. 영상석은 안 되겠지. 폐하께서 직접 받을 테니.”
윌리엄은 책상 서랍을 열어 통신석을 꺼내 들었다.
* * *
삐삐삑.
카시스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수련을 하고 회의실에 붙잡혀 있다가 늦은 점심 식사까지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때 침대 옆 협탁에 올려진 통신석이 소리를 내며 반짝이는 것을 보고는 집어 들어 작동시켰다.
[전하, 윌리엄입니다. 연락이 오랫동안 안 되시는군요.]
“폐하와 식사까지 하고 지금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우선 사죄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연락해서 사과부터 하는 거냐?”
[전하의 뜻에 반하는 짓을 저질렀습니다.]
“내 뜻에 반하는 짓이라고? 두 백작가를 살려 주려고 했나?”
[아닙니다.]
“그럼, 반역 준비라도 했나?”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 뭐지?”
[저는 지금 프란츠 백작과 데프리카 백작을 처리하러 나와 있어 가지 못합니다.]
말하는 것이 어째 느낌이 이상했다.
“뭔지 빨리 말해.”
[그것이 실은······.]
윌리엄의 말을 들으면서 카시스의 표정이 차게 식으며 굳어졌다.
“미쳤나? 내가 세상 하직하게 만들어 줘?”
[······.]
“누가 네 멋대로 보내라고 했지? 내가 자리를 비울 때 네게 전권이 위임된다 할지라도 네겐 그럴 권한이 없어. 윌리엄.”
[송구합니다.]
“지금 당장 가서 데리고 와. 아니 내가 가지.”
짓씹듯 말한 카시스가 손에 쥔 통신석을 부수면서 통신이 끊겼다.
이거였나? 이래서 그리 불안했던 건가?
“아일라. 나를 떠날 생각인 건가?”
그렇게 두지 않아. 떠나게 두지 않아. 돌아가야 해.
본래 제가 파르미온으로 가는 것을 허락받았을 때 칼리스타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킬리언이 허락하지 않았고 붙잡았다. 폐하께서는 황태후 폐하와 잘 지내 보라는 듯 식사 시간 때마다 자리를 마련했지만 저는 그게 더 불편했다. 그런데 불편한 자리를 끝내고 돌아와 조금 쉬려고 했는데 제 친우가 멋대로 아일라를 메르바 항구 마을로 보냈다는 연락이 왔다.
윌리엄은 아일라가 친구 배웅으로 간다고 말했다고 했지만 카시스는 불안해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안 돼. 보낼 수 없어.
“폐하를 봬야 해.”
칼리스타로 돌아가야 한다. 아일라를 데려와야 해.
카시스는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짓씹더니 돌아서 방을 나가서 바로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폐하, 대공 전하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들이게.”
안에서 허락이 말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며 카시스가 들어와 바로 예를 갖추려 했지만 킬리언이 저지했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내가 보고 싶어 왔을 리는 없고, 무슨 일이더냐?”
“그만 칼리스타에 돌아가려고 합니다.”
“좀 더 있다가 가지 그러느냐. 로에나도 네가 더 있기를 바라고 있고.”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아직도 이곳이 그리도 싫은 것이냐?”
“싫습니다. 그러니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망설이지도 않고 즉답하는 카시스를 보며 킬리언은 이마를 짚었다.
“폐하가 허락을 하지 않으셔도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폐하께서 노하신다 할지라도 돌아가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구나. 프란츠와 데프리카 백작의 처분은 알아서 하라고 했으니 그 일은 아닐 테고. 너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
카시스의 떨리는 눈동자를 보며 킬리언이 물었다. 카시스가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그렇지만 이렇게 불안해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시스.”
“윌리엄이······, 제 연인을 제게 아무 말도 없이 메르바 항구 마을로 보냈다고 합니다.”
“뭐?”
“그녀는 친구를 배웅하기 위해 간다고 했다지만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윌이 정말 네 허락도 받지 않고 그랬다고? 보고하지 않고 그냥 보냈다고?”
킬리언이 윌리엄을 애칭으로 부르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윌리엄이 카시스의 친우였듯이 킬리언의 친우이기도 했다.
“예, 그러니 칼리스타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하-, 윌 녀석이 그랬단 말이지. 윌 녀석이 지나쳤구나. 칼리스타로 돌아가도 좋다.”
제 허락이 떨어지자 망설임 없이 돌아서는 카시스를 보며 킬리언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허락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더 이상 네 혼인에 관여하지는 않으마. 하나 허락과는 상관없이 인사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 한 번 데리고 와서 제대로 인사를 나누는 것이 좋겠구나. 네가 수도에 오기 싫어도 말이다.”
카시스는 손잡이를 잡으려던 손을 멈칫하고는 뒤돌아 예를 갖추고는 밖으로 나갔다.
“나도 네가 걱정이 되는구나. 황태후 폐하처럼 네가 원하는 것이 생겼을 때 어떻게 변할지가 아니라 잃었을 때 어떻게 변할지가.”
킬리언은 원하는 것이 생겼는데 반대에 부딪히자 감정이 격하게 변한 카시스를 마주 봤다. 하지만 그 정도의 감정을 이끌어 낸 존재가 사라진다면 카시스가 어떻게 변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제발 별일 없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나.”
킬리언은 마법과 검술을 다루는 실력 모두 뛰어났다. 카시스는 저보다 제가 검술 실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어쩌면 검술은 카시스가 더 위일지도 모른다.
저는 검술보다 마법 실력이 더 뛰어났고 검과 마법을 함께 사용하다 할지라도 검술을 사용하면 마법을 함께 사용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검술과 마법을 잘 운용한다고 하지만 사람들 눈에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카시스는 검으로만 최고 경지인 마검사에 도달했다. 그는 검술 천재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카시스가 마검사가 된 것은 열다섯이었다. 그때 아카데미에 있을 때였고 에펜하르트의 이름을 물려받으며 대공 작위도 함께 받았다. 그리고 아카데미를 졸업하고는 수도가 아닌 칼리스타로 바로 가 버렸었다.
큰 일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이제는 저도 확실히 알 수 있다. 아나스타샤 벨로체 때와는 다르다.
마린족의 공주님이 어쩌면 카시스를 무너지게 만들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카시스가 칼리스타로 돌아가 메르바에 도착했을 때는 아일라는 이미 바다로 돌아간 후였다.
저녁 시간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에 메르바에 도착한 아일라 일행은 바로 여관을 잡고 멜로디는 살 게 있다면서 나갔다 왔다.
“구해 왔어?”
“구해 오기는 했는데 이걸 어떻게 먹일 건데.”
“식당 주인에게 부탁을 해 볼까 하고.”
“내가 뭍에서 수업을 할 때 배운 게 있는데 돈을 주면 사람들이 부탁을 들어주나 봐. 그러니까 뇌물이라고 하면 되겠네.”
“뭐?”
“그런 짓 하지 말라고 알려 준 거기는 하지만 돌아와서 제대로 사과하면 용서해 주지 않을까?”
멜로디는 입술 살짝 벌리고 눈을 깜빡였다.
“뇌물을 주고 수면제를 먹이겠다고? 공주인 네가?”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야. 인간들이 사용하는 돈하고 이거면 되겠지.”
아일라는 목걸이를 풀어 탁자에 내려놓았다. 은청색의 조개 모양으로 된 목걸이였다.
“그 목걸이, 네가 아끼는 거잖아.”
“아틀란과 아버지보다는 아니야. 엘레멘탈은 바다 깊숙한 곳에서 나는 거라 인간 세상에서는 비쌀 거야.”
“그냥 내가 갈게. 내가 가서.”
“아니, 내가 가야 해. 인어족의 왕을 만나는 일이야. 마린족의 왕족이 가야지 왕족도 아닌 사람이 가면 만나 주지 않을 거야.”
아일라가 진지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