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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75화 (75/100)
  • 75화

    “아버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가 반드시 되돌려 놓을 거야. 너희는 욕심만 부릴 줄 알았지, 누군가를 진심으로 믿고 사랑해 본 적 없지? 난 그런 자들에게 절대로 지지 않아. 확실히 바이칼 악시온은 강해. 힘만이 전부가 아니야. 하지만 마물까지 끌어들인 너희에겐 절대로 지지 않아. 그러니까 네 아버지가 무너지는 걸 똑똑히 봐. 너와 네 아버지는 사형이야.”

    아일라는 그 말을 끝으로, 뒤돌아 감옥을 나왔다. 그러고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클로에와 함께 방으로 향했다.

    힘으로 잡은 권력은 무너지게 되어 있어.

    ‘아일라. 잘 듣고 기억해야 한다. 나라는 힘과 권력만으로 다스릴 수는 없단다. 그러니 지금 당장 네가 힘을 다루지 못한다구 해서 속상해할 필요는 없단다.’

    ‘왜요? 아빠는 강해서 왕이 되신 게 아닌가요?’

    ‘물론 강한 건 나쁘지 않아. 하지만 강하다고 백성들을 힘으로 눌러 버리면 어디서든 불만이 나오게 되어 있단다. 공포만으로는 나라를 절대로 다스릴 수 없어. 그런 건 오래가지 못한단다. 그렇다고 너무 받아 주거나 무르게 굴어서도 안 된다. 아틀란을 내가 다스리고는 있으나 이 바다도 아틀란도 나만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다음 왕이 될 네 혼자만의 것도 아니란다. 혼자서는 이 바다도 지킬 수 없어. 아일라, 진정한 강함은 단순히 힘이 강한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강하고 멋진 아버지. 나도 아버지처럼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강하고 멋진 왕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좋은 왕이 될 수 있을까?

    ‘아빠, 어째서 무례한 바이칼 악시온을 그냥 내버려 두시는 거예요? 분명 뭔가 큰일을 벌일 자예요.’

    ‘아일라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것이란다. 걱정하지 마렴.’

    아일라는 아슐레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버지······.’

    아버지는 준비하고 계셨을 거야. 하지만 저주가 발동되는 바람에.

    죽음의 바다의 마녀가 건 저주라고 했어. 그러니까 어쩜 죽음의 바다의 마녀가 저주를 푸는 방법을 알지도 몰라. 마녀를 만나야겠어. 그런데 나 혼자 가야 할 것 같은데, 무슨 좋은 생각이 없나?

    “그래, 멜로디와 상의해 보자.”

    “아가씨, 방금 무슨 말씀하셨나요?”

    내가 입 밖으로 소리 내서 말했나 보네.

    “멜로디를 만나고 가야 할 것 같애.”

    아일라는 자신의 방으로 향하던 것을 멈추고 멜로디가 머무는 방으로 향했다. 아일라는 멜로디의 방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는데 방문이 열렸다.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왜 여기 서 있어?”

    “아, 잠시 딴생각 좀 하느라. 클로에, 나 멜로디와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으니까 들어오지 마.”

    “아가씨.”

    “부탁할게. 멜로디와 둘이서만 조용히 할 이야기가 있어.”

    아일라가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자, 방 안에는 아일라와 멜로디 단둘뿐이었다.

    이건 누구도 알아서는 안 돼. 멜로디와 둘이서만 상의해야 해.

    카시스가 돌아오기 전에 돌아오면 괜찮을 거야.

    “나하고 할 이야기가 뭔데 그래?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어.”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아일라를 보며 멜로디가 먼저 입을 열었다.

    “멜로디가 화낼지도 모르지만.”

    “내가 화낼 이야기야? 그럼 애초에 하지 말아.”

    “아니, 꼭 해야 돼.”

    아일라의 말에 멜로디의 미간이 살포시 찌푸려졌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이고 내가 화낼 말이라고 하는 거야.”

    아일라는 심호흡을 하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 죽음의 바다로 갈까 해.”

    “뭐?”

    “죽음의 바다에 가서 마녀를 만날 거야.”

    “뭐라고?! 너 미쳤어!”

    멜로디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버지를 구할 방법은 마녀를 만나는 것뿐이야.”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죽음의 바다가 왜 죽음의 바다인지 잘 알잖아.”

    “나도 알아. 접근해서는 안 될 곳이라는 것쯤은 어릴 때부터 배웠으니까. 하지만 아버지의 저주는 마녀가 걸었다고 했어. 그러니까 그 저주를 풀 수 있는 것도 마녀야.”

    어머니께서는 분명 어머니와 배 속에 있는 자신을 대신해 아버지가 저주를 받았다고 했다.

    “마녀가 저주를 풀어 달라고 해서 풀어 줄 것 같아? 그리고 죽음의 바다로 가면 아무도 살아 돌아올 수 없다고 했어. 너는 단 하나뿐인 아틀란의 공주고 후계자야.”

    “내가 아틀란의 후계자여서야.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뭐든지 해 봐야 하는 거잖아. 위험하다는 걸 알아도, 그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해야 하는 일이 있는 거잖아. 나는 아틀란도 아버지도 되찾고 싶어.”

    아버지께서 왕이 되시기 전까지 바닷속에서는 많은 전쟁이 일어났다고 했다. 이대로는 바다는 악시온 속에서 전쟁터로 변할지도 몰라.

    내가 해야 해. 내가 막아야 해.

    “네가 안 된다고 해도 나는 갈 거야.”

    “아일라.”

    “네가 도와주지 않고 막는다고 해도 인어족의 왕을 만나서라도 나는 갈 거야.”

    이건 허락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통보다. 이대로 아무것도 못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은 싫어.

    죽음의 바다로 가려면 혼자 가야 하는데 이곳을 혼자 빠져나가려 멜로디의 도움이 필요하다.

    도와주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겠지만 멜로디도 아틀란과 제이드가 걱정되니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멜로디 네가 도와줘.”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난 정신 말짱해. 네가 내가 되어 주면 돼.”

    “뭐라고?”

    아일라가 오늘 뭔가를 잘못 먹었거나 아니면 제 귀가 이상하다고 판단한 멜로디는 또다시 되물었다.

    “네가 내가 되어 달라고.”

    “내가 무슨 수로 네가 돼? 말이 된다고 생각해?”

    “말이 안 될 게 뭐가 있어. 머리와 눈동자색을 바꿔 주는 마법약, 아직 남아 있어. 그걸로 네 머리와 눈동자색을 바꾸면 돼.”

    아일라는 이제키엘이 마법을 걸어 주면서 마법약을 더 이상 먹지 않아도 되게 됐다. 그래서 남아 있는 마법약은 잘 보관해 두고 있었다. 아일라는 그걸 멜로디에게 먹일 생각이었다.

    “내 입장에서 한 번만 생각해 줘, 멜로디. 나는 네가 나였어도 여기서 보호받으면서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거야? 아니야?”

    “그건.”

    “나 부모님께 사랑만 받고 자라서 여태껏 어리광만 부리고 있었어. 하지만 더 이상 어리광만 부리고 있을 수는 없잖아. 위험하더라도, 안 되더라도 시도는 해 보고 싶어. 이래 봬도 공주니까 아틀란과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하잖아.”

    “아일라 너.”

    “소꿉친구이자 공주로서 도와달라고 하는 거야.”

    “어리광쟁이가 조금은 달라 보이네. 아틀란의 공주로서 자각이 생긴 걸까.”

    이렇게까지 말하면 안 도와줄 수 없잖아. 나중에 혼이 나더라도 도와주고 싶어지잖아.

    “계획은 있어? 머리와 눈동자색을 바꾼다 할지라도 모습은 바뀌지 않을 텐데.”

    “물론 있고 말고.”

    아일라의 표정이 밝아지며 멜로디를 바라봤다.

    “뭘 그렇게 정색을 하고 좋아해. 나는 아직 도와준다고 하지 않았어. 일단 들어 보고 나서 결정할 거야. 어디 말해 봐. 우리 공주님 계획이 뭔지.”

    “연락이 오지 않아서 걱정이 된 네가 아틀란의 상항을 파악하러 돌아가는 거야. 나도 걱정되니까 메르바 항구 마을까지 같이 동행하는 거지.”

    “그래서 그다음은?”

    “거기서 여관을 하나 잡아 묵는 거야. 방은 너와 내가 같이 쓰고.”

    멜로디는 아일라의 말을 들으며 여기까지는 별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여관방에서 네가 마법약을 먹고 머리와 눈동자 색을 바꾼 뒤에 나는 밤에 몰래 빠져나가는 거야. 내가 걱정할 것 같아서 밤에 몰래 가는 걸로 편지도 남겨 놓고.”

    “그럴듯하기는 한데. 넌 호위도 있고 하녀들도 있잖아. 잘 될 것 같아?”

    “그래서 수면제를 써 볼까 해.”

    “수면제를 쓴다고? 듣겠니?”

    “듣지 않을까? 안 들을 것 같으면 좀 독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될 것 같아.”

    기사니까 조금 강한 걸 써야 할까?

    “정말 성공할 것 같아.”

    “해 보지 않고는 모르잖아. 카시스가 돌아오기 전까지 돌아오면 괜찮을 거야.”

    카시스가 열흘 정도 걸린다고 했으니, 다시 돌아왔다가 간 것을 따져도 아직 시간이 남았다. 그 시간 동안 다녀오면 별문제 없을 거다.

    “그리고 우린 바다 종족이라고 불리는 마린족이야. 땅 위에서 달리는 것보다 헤엄치는 게 더 빠르다고.”

    “그렇기는 하지만. 인어족의 왕을 만난다면서.”

    “인어족도 바다에 사는 바다 주민이야. 바다가 집이라고 전쟁으로 피바다가 되고 마물들이 바다를 휘젓고 다니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아틀란을 되찾는 걸 도와달라고 할 거야. 아버지가 그러셨어. 왕은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물러서는 법도 알아야 한다고. 나는 아버지와 아틀란과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고개를 숙일 거야. 자존심이 아틀란을 구해 주지는 않아. 나는 더 이상 보호만 받지 않을 거야. 앞장서 싸우겠어.”

    “계속 말리고는 쉽지만 네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

    멜로디는 아일라가 사랑만 받고 자라 제멋대로에 왈가닥이기는 하지만, 공주님은 공주님이구나, 하는 생각에 설핏 웃었다.

    “왜 웃어?”

    “아틀란을 생각하는 게 기특해서.”

    “무슨 뜻이야? 나는 아틀란을 생각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아일라는 토라진 표정으로 소리쳤다.

    “아니 화내지 마. 그냥 의외여서 그런 거야. 아일라도 아틀란을 많이 사랑하는구나.”

    “당연하지. 난 아틀란도 바다도 사랑해. 내가 비록 가출은 했지만 아틀란이 있는 바다가 내 집이라고 생각한다고. 나는 아틀란도 바다도 아버지도, 카시스도 포기 못 하는 욕심쟁이야.”

    난 어느 쪽도 포기 못 해.

    “정말 욕심이 심하네. 내가 너였다면 포기했을 거야.”

    “내 생각은 달라. 멜로디도 포기하지 않았을 거야. 멜로디가 아틀란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거든. 그리고 제이드도. 제이드 포기할 수 없잖아. 슈레더 악시온 그 자식 말대로라면 제이드도 분명 붙잡혀 있을 거야. 제이드를 구해야지. 내가 구할 사람 중에 제이드도 포함되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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