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킬리언은 카시스의 말대로 하면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언젠가는 마법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거다. 더군다나 마법사들이라면 마법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금방 알아차린 것이다.
“시스, 그냥 벨로체 자작과 다시 잘해 보면 안 되겠느냐?”
칼리언의 말에 카시스의 미간이 좁혀지며 주름이 잡혔다. 킬리언은 카시스가 자신을 위해서라도 다시 한번 생각해 주기를 바랐다,
“벨로체 자작과는 이미 끊어진 인연입니다. 끊어진 인연은 강제로 다시 이어 붙일 수 없습니다.”
벨로체 자작과 같은 말을 하는군.
“그리고, 벨로체 자작은 아일라와 다릅니다.”
“뭐가 다르다는 것이냐?”
“제 마음이 다릅니다. 벨로체와 아일라를 향한 제 마음이 같지 않습니다.”
“차라리 황위를 달라고 하거라.”
“황위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제가 필요로 하는 것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황위 따위가 아니다.
“왜 하필이면 이종족 공주냐?”
“그럼 제가 폐하께 여쭙겠습니다. 만일 폐하께서 저였다면 포기하실 수 있으셨겠습니까? 황후 폐하께서 이종족이었다면 포기하실 수 있으셨겠느냔 말입니다.”
잠시 쉬었다 이어 묻는 말에 킬리언의 눈썹 끝이 치켜 올라갔다. 카시스는 킬리언이 포기하지 못했을 것을 알고 물은 말이었다. 킬리언이 이사벨을 포기하지 못하듯 카시스 또한 아일라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킬리언은 입을 다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제가 많은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도와주지 않으실 거면 방해만 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도 들어주시지 못합니까?”
“네가 힘든 길을 가려고 하는데 내가 어찌 막지 않을 수가 있어.”
“제가 선택한 제 길입니다. 이제는 형님마저 제가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게 막으시려는 겁니까?”
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원해 본 적이 없다. 아무것도 원해서도 바라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는 게 어머니께서 바라는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늘 적당히 했다. 검술도 수업 때도 적당히 휘두르다 쉬었다. 그럼에도 마검사가 되어버렸다만. 제가 마검사가 되었을 때 그 어느 때보다 어둡게 가라앉았던 어머니의 얼굴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았다.
그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했는지도 기억하고 있다.
강해질 필요가 무엇이 있느냐 형님의 보필만 잘하면 되지, 였다. 어머니께 인정받고 싶어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된 어린 나이에 부러 적당히 했는데도 마검사가 되어 버린 것은 제가 어쩔 수 없었다. 그 이후 무엇을 하든지 저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단지 저를 이용하려는 자들을 처리하고 형님의 뒤를 지키며 그렇게 조용히 형님의 그림자로 지냈다. 그런 제가 처음으로 아일라를 원하고 함께하고 싶다고 하는데 그마저도 안 된단다.
“시스, 너는 황족이다. 다른 귀족도 아니고 황족.”
“황족이 어떻다는 겁니까?”
“시스. 네가 원하지 않아도 귀족뿐 아니라 제국민들, 아니 타국에서까지 너를 주시한다는 말이다.”
“제가 황족으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났습니까. 황족으로 태어난 것을 어쩌라는 겁니까!”
“시스!”
킬리언은 둑이 무너지듯 터져 나오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카시스를 부르더니 문을 힐끗 바라봤다.
“제게 다들 왜 그러십니까! 제가 뭘 그리 잘못했습니까! 하나 정도는 제가 원하는 대로 해도 되지 않습니까! 제가 파르미온 왕국으로 직접 들어가 환영족의 잔당을 찾아내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단 하나만, 하나만 제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해 달라는 게 그렇게 큰 잘못이냐는 말입니까!”
제가 원하는 것은 아일라 단 한 사람뿐이 없는데. 왜 자꾸 안 된다며 제 마음을 돌리라고 하는 것일까.
이곳에 제 편은 하나도 없고 황궁은 답답하다.
“시스, 진정하거라. 알았으니 진정하란 말이다.”
이 녀석이 이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낸 적이 있었나? 아니, 단 한 번도 없었다.
화를 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격하게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킬리언은 카시스를 진정시키려 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진정이 되는 숨을 고르던 카시스는 눈을 감았다 뜨며 ‘하-’ 탄식을 뱉어내었다.
이미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것인가.
“제게서 아일라를 빼앗으려 하면 저도 제가 어떻게 변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형님을 평생 용서하지 못할 겁니다.”
‘위험하다.’
킬리언의 머리에 카시스를 더 이상 자극하지 말라는 적색 경보등이 켜졌다.
검술 실력은 비슷할지 몰라도 마법을 사용하면 카시스를 막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마법만큼은 제국에서 황제인 그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하-, 좋다. 방해는 하지 않으마. 하나 허락해 줄 생각은 없다. 황태후 폐하께서 반대하시는 일이다.”
“상관없습니다. 반대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제가 아일라가 아니면 안 되니 말입니다.”
“하나, 네가 황태후 폐하의 허락을 받고 파르미온 왕국에 숨어 있는 환영족 잔당을 잡는다면 그러면 나도 다시 생각해 보마. 위험을 무릅쓰는 대가는 있어야겠지.”
“허락은 이제 필요 없습니다. 제가 그녀가 아니면 안 됩니다. 제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 준 그녀가 아니면 안 됩니다.”
허락해 주지 않아도 제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대답이었다. 그런데 킬리언은 이상함을 느끼고는 되물었다.
“두 번? 두 번이라고?”
킬리언은 두 번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제가 알기로는 카시스가 파르미온의 공주를 데리고 오면서 마물의 공격을 받고 바다에 빠졌던 적은 한 번뿐이었다.
두 번을 구해 줬다는 말에 킬리언은 상당히 놀랐다.
“어릴 적 임페리얼 숲 절벽에서 바다로 떨어졌을 때, 저를 구한 것이 그녀였습니다.”
“뭐?”
카시스가 언제를 말하는지 킬리언도 기억하고 있다. 그날 제 황후 이사벨을 처음 만난 날이기도 했으니까.
“그것을 네가 어찌 아느냐? 넌 의식을 잃고 있지 않았느냐.”
“봤습니다.”
“봤다고?”
“바다의 신이 제게 보여 줬습니다.”
“바다의 신이라고?”
“제 꿈속에 나타났습니다.”
“바다의 신이 네 꿈속에 나타났다고?”
킬리언은 되물으며 의아함에 되물었다.
바다의 신이 카시스의 꿈에 나타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바다의 신이 아일라의 진정한 반려는 저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반대하셔도 헤어질 생각 없으니 허락은 필요 없습니다.”
한마디로 허락하지 않아도 제멋대로 하겠다는 말이었다.
한데, 바다의 신이 카시스를 인정했다고? 그런데 바다의 신이라. 있는지도 몰랐던 신의 존재였다.
공국은 아루세우스. 그리고 플루투스 제국은 쌍둥이 수호룡 오벨리스크와 에펜하르트가 존재한다. 그런데 칼리스타 앞바다의 신이 존재했었다니. 그리고 그 신이 두 사람을 인정했다는 건가.
이건 정말 내 허락이 필요 없는 일이군. 황제인 제가 인정하고 허락하고 말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하면 평탄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카시스의 말대로라면 정말 그 누구의 허락도 필요 없을 거다. 신이 허락한 일이니 제 허락은 무용지물이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보거라.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되도록 마음속으로나마 빌어 주마.”
“폐하.”
킬리언이 할 말은 끝났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고 하는데 카시스가 불러 세웠다.
“더 할 말이 있느냐?”
“프란츠 백작과 데프리카 백작을 처리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났던 킬리언이 다시 앉았다.
카시스는 허락을 구하기 위해서 말을 꺼내는 것 같았지만 윌리엄에게 제가 칼리스타로 돌아가기 전까지 해결하라고 했으니, 사실 통보나 마찬가지였다.
“두 백작가 전부 네 가신 집안일일 테니 네가 알아서 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들이 귀족인 이상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구나. 이유가 무엇이냐?”
아무리 황족이라 할지라도 귀족을 아무 이유 없이 잘라 낼 수는 없는 일이기에 물었다.
“데프리카 백작은 횡령에 도박, 그리고 프란츠 백작과와 이종족 노예 상인들과 얽혀 있습니다, 충분히 조사했습니다.”
이종족 노예 상인이라는 말에 킬리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이종족 노예 상인이라고? 아직 그런 것들이 남아 있는 것이냐?”
“어찌하시겠습니까?”
“제국 내에서 노예를 사고파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더군다나 이종족이라면 더욱더. 네 영지에서 일어난 일이니 네가 알아서 처리하거라. 나는 수도에서도 있는지 따로 알아보고 처리할 테니.”
“그리 말하실 것이라 짐작했습니다.”
그래서 제멋대로 윌리엄에게 처리하라 지시를 내렸다.
“그런 것들은 없애도 계속 기어 나오는군. 바퀴벌레처럼 말이야.”
“그러니 한 번 더 제대로 청소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내가 알아서 하마. 너는 환영족 잔당들이나 신경 써라.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자들이다.”
“명 따르겠습니다.”
킬리언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번에는 카시스도 일어나 예를 갖췄다. 카시스의 방을 나온 킬리언은 황태후 시엘라를 보고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카시스가 제 감정을 드러내면서부터 밖에서 듣고 있었을 것을 알고 있었다. 카시스는 흥분한 상태라 그녀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듯했지만 킬리언은 아니었다.
“그냥 두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 녀석을 자극해서 좋을 건 없습니다. 저 녀석 일이니더는 안 된다 하지 마시고 지켜만 봐 주십시오.”
킬리언은 그렇게 말하고는 시엘라를 지나쳤다.
* * *
카시스가 다시 수도로 가서 돌아오지 않은 지 사흘이 되었고 아일라는 침대에서 몸을 뒤척였다. 사흘 전부터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유는 슈레더가 한 말 때문이었다.
어머니한테서 연락이 안 와. 정말 잡히셔서 갇히신 걸까?
“정말 그런 걸까? 아버지가 어머니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아일라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