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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72화 (72/100)
  • 72화

    “저보단 클로에와 라피스가 걱정이에요.”

    “클로에라면 윌리엄 경이 알아서 챙길 것이고 라피스는 걱정 안 해도 됩니다.”

    그러고 보니 라피스.

    “라피스 이야기가 나와서 그러는데, 라피스 하녀 맞아요?”

    “왜 그런 것을 묻는 겁니까?”

    그런 걸 봤는데 안 물어보면 더 이상한 거 아닌가?

    “그게 하녀가 아닌 것 같아서요.”

    “하녀가 맞기도 하지만 아니기도 합니다.”

    “네?”

    이게 무슨 말이야. 하녀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니? 하녀면 하녀고 아니면 아닌 거지.

    “평소에는 클로에와 그대의 시중을 드는 하녀가 맞습니다. 하지만 하녀가 라피스의 본업은 아닙니다. 저는 라피스를 하녀로 그대 곁에 둔 것이 아니라 호위로 보낸 겁니다.”

    내 호위? 그런데 나 방금 라피스 본업이 하녀가 아니란 말을 들은 것 같은데.

    “그대가 정말 다친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면 수도로 다시 가야 합니다.”

    으-, 내 말 믿는다며? 다치지 않았다는 내 말 못 믿고 있잖아.

    그리고 설령 다쳤다고 할지라도 은혼단만 먹으면 금방 낫는단 말이야. 나 아직 은혼단 많이 가지고 있는데. 앗! 그렇지! 은혼단! 클로에에게 은혼단을 먹이면 다친 게 나을 거야.

    “대공 전하, 의원이 왔습니다.”

    “들이게.”

    카시스가 허락하자 문이 열리며 의원이 들어왔다. 카시스는 아일라가 진료를 받는 동안 의원의 뒤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고 굳은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자 의원이 카시스의 눈치를 봤다.

    “저기, 저.”

    “말해라.”

    “카시스, 그렇게 무섭게 보는데 어떻게 말을 해요.”

    의원이 대답도 제대로 못 하고 벌벌 떨고 있자, 아일라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카시스를 보며 말했다.

    “무섭게 본 적 없습니다.”

    “거울이나 보고 말해요. 지금 당신 표정이 상당히 굳어 있다고요.”

    “하아-, 그래서 아일라의 상태는?”

    “아, 아무 이상 없으십니다.”

    “정말인가? 만일 거짓이라 그 목을 내놓아야 할 거다.”

    “예, 예.”

    다정한 사람이 왜 겁을 주고 그러는 거야?

    “카시스, 겁주지 말아요.”

    “나가 보게.”

    의원이 밖으로 나가자 침대로 다가온 카시스는 침대에 걸터앉아 아일라를 끌어안았다.

    “카시스?”

    “다시 수도로 가야 하는데 가고 싶지가 않아. 자꾸만 불안해서.”

    “불안하다고요? 뭐가요?”

    카시스가 불안할 일이 뭐가 있지?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어서 더 답답합니다. 이 불안감이 어디서 오는 건지 모르겠어서.”

    아니, 그는 어렴풋이 이 불안감이 어디서 오고 있는지 눈치채고 있었다. 제가 불안한 이유가 아일라로 인한 것이라는 것을.

    아일라는 가만히 카시스를 마주 안고 다독였다.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있던 카시스는 시간이 조금 지나자 고개를 들고 떨어졌다.

    “아일라. 저와 약속을 해 주십시오.”

    “무슨 약속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제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칼리스타를 벗어나지 않겠다고.”

    “나 여기 나가면 갈 데 없어요. 그런데 내가 가기는 어디를 가요.”

    “제가 돌아올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제가 오면 같이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뭐를요?

    “그것이 무엇이든지 제가 없을 땐 하지 마십시오.”

    “······.”

    “대답 안 할 겁니까?”

    카시스는 대답을 하지 않고 자신을 멀겋게 바라보는 아일라의 얼굴을 감싸고 이마를 맞대었다.

    “제가 돌아왔을 때 여기에 계셔야 합니다.”

    “나 아무 데도 안 가요. 여기 있을 거예요.”

    나 갈 데 없다니까 자꾸 가기는 어딜 간다는 거야.

    “잊지 마십시오. 그대의 각인자는 저뿐입니다. 절대로 다른 자가 그대의 각인자가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이 각인을 끊고 싶어 하지 않는 이상, 저도 각인을 끊을 방법을 찾지 않을 거예요.”

    그동안은 각인을 끊을 방법을 알아보려고 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 없다. 나도 카시스가 계속 내 각인자로 남아 주는 것이 좋고, 카시스가 내 각인자로 남고 싶어 하고. 게다가 아버지만이 각인을 끊을 수 있다고 하니까.

    지금 당장은 아버지를 구하는 것이 먼저이기도 하고 언젠가는 카시스를 인정해 줄지도 몰라

    카시스는 아일라의 얼굴을 어루만지더니 입술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떨어졌고, 아일라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

    “다시 다녀오겠습니다. 저는 그대가 얌전히 이곳에 있을 거라 믿겠습니다.”

    그의 입맞춤에 정신이 멍해졌던 아일라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방을 나온 카시스의 뒤를 윌리엄이 따라갔다.

    “클로에는?”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마을 복구 작업 다시 시작하고. 클라우디스 형제 다시 호위 시작하게 해.”

    “예, 전하?”

    “그리고 어떻게 된 건지 제대로 설명해. 수도로 다시 가기 전에 들어야겠으니까.”

    카시스의 지시에 윌리엄은 마을로 나가면서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윌리엄의 입에서 벤자민의 이름이 나오자 카시스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윌리엄을 돌아봤다.

    “제정신인가? 네가 곁에 있었으면서도 그가 아일라에게 접근하게 만든 건가?”

    카시스는 입꼬리가 위로 끌어 올렸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 표정을 본 윌리엄은 카시스가 화가 단단히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송구합니다. 아가씨께서 불편하실 것 같아 잠시 자리를 피해 드렸는데, 그 틈을 노리고 접근한 것 같습니다.”

    “벤자민과 프란츠 백작은 내가 돌아올 때까지 뒤탈 없이 처리해 놔라. 아니, 벤자민 영식은 내가 따로 처리할 테니 프란츠 백작만 처리해 놔. 그동안 모은 증거로 충분할 테니 내가 손대지 않아도 네 손에서 끝내. 그 정도 능력은 있겠지? 윌리엄 러셀 후작.”

    “명 따르겠습니다.”

    “감옥에 가둬 둔 데프리카 백작 부부도 처리해 놓고. 다시는 내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처리해. 폐하껜 내가 말씀드릴 테니. 거머리 같은 녀석들을 더 이상 설치게 내버려 둘 수 없지. 도박에 노예 거래까지 저질렀으니 내가 직접 처리해도 뭐라 하시지는 않을 거다.”

    “사고사로 처리될 수 있게 해 놓겠습니다.”

    “확실하게 끝내 놔. 그리고, 더 연루되어 있는 자들이 있는지 알아보고. 내가 수도에서 돌아오면 더 바빠질 거다.”

    “예, 빠르게 조용히 움직일 수 있는 실력 있는 녀석들로 추슬러 놓겠습니다.”

    “서두를 필요 없어. 환영족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파르미온 왕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럼 바다로 나갈 준비를 같이 해 놓겠습니다.”

    역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어.

    “그럼 여기는 네게 맡기고 나는 다시 수도로 간다.”

    형님께서는 내가 마법진으로 칼리스타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계실 거다. 그러니 돌아가서 일을 마무리 짓고 와야 한다. 아일라와의 관계 허락은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파르미온 공주를 돌려보낸 대가로 제가 직접 파르미온 왕국으로 들어가는 것은 허락받아야 한다. 그걸로 아일라의 관계도 허락받으면 좋겠지만 쉽지 않겠지.

    폐하께서 반대하는 이유는 저도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른 존재들을 싫어한다.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반대로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고 느끼고 지배하려고 하는 자들도 있다. 이종족 노예들이 생긴 것도 그런 자들의 사상 때문이다.

    이종족과 혼인한 사람이 아예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이종족과 혼인한 사람들은 배척당하거나 숨어서 살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종족과 결합을 좋지 않게 생각했고 어울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과연 감히 제게까지 그럴 수 있는 자들이 있을까?

    제 뒤에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거나 뒷말하는 자들이 있다 하더라도 감히 제 앞에서는 입도 뻥끗하지 못할 간신배에 겁쟁이들이었다. 그런 자들의 인정 따위 받지 못해도 상관없다. 아일라만 제 곁에만 있어 준다면.

    카시스는 바로 이동 마법진이 있는 마탑으로 가서 수도 플란트로 향했다. 그가 황궁에 머무는 방에 도착했을 때는 오밤중이었고 방에서 킬리언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오는 것이냐?”

    킬리언의 목소리에 멈칫했던 카시스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부터 와 계셨던 겁니까?”

    “글쎄, 하지만 내가 방 안에 있다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지 않느냐. 아니면 그것도 눈치 못 챌 만큼 정신을 다른 데 팔고 있던 것이냐? 어디를 다녀오는 것이냐? 아니 물을 필요도 없나.”

    “알면서 어찌 물으십시까?”

    “나도 황태후 폐하도 안 된다 하는데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는 것이냐?”

    “없습니다. 폐하와 황태후 폐하께서 반대하신다 할지라도 저는 그녀와 혼인할 겁니다.”

    킬리언은 눈을 감고 이마를 짚으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너 하나만 포기하면 된 것을 왜 이리 고집을 부리는 게냐?”

    “처음입니다. 제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생긴 것은 처음입니다. 제가 그렇게 많은 것을 바랐습니까? 혼인만은 제가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과 한다는 것이 그리 큰 잘못입니까?”

    “카시스.”

    “형님께서 분명 약속하셨습니다. 제가 진심으로 연모하는 사람이 생기면 원하지도 않았던 약혼을 파하게 해 주시겠다고. 황제의 이름으로 황좌를 걸고 약조하셨습니다.”

    킬리언은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했지. 기억한다. 하나, 이건 아니지 않느냐.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못할 거다. 특히 귀족들의 시선이 말이다.”

    “상관없습니다. 타인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일라는 물속에서 숨을 쉬는 것과 물을 다룰 수 있다는 것 이외에는 저희와 다를 바 없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아일라가 물속에서 숨을 쉬는 것은 마법이나 마도구를 사용하는 것이라 설명하면 됩니다. 물을 다루는 것 또한 물 속성의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라 하면 되는 일입니다.”

    머리와 눈동자색도 마법으로 바꿨으니 문제가 될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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