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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70화 (70/100)
  • 70화

    ‘폐하, 카시스는 안 됩니다. 카시스를 지켜 주십시오. 1황자를 황태자로 봉해 주십시오. 제 아이는 황제의 재목이 되지 못합니다. 황족의 특징은 타고나지 못했지만, 폐하의 자식이기에 언제나 목숨을 위협받는 아입니다. 그러니 제 아이에게 황위 계승권은 주지 마십시오.’

    킬리언은 어린 시절, 황태후 폐하가 선황 폐하 앞에 꿇어앉아 빌던 모습을 떠올렸다. 황위 계승권은 황족으로 태어나면 누구나 갖는 것이었지만 황태후 폐하는 카시스가 황위 계승권을 갖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다고 제 어머니가 카시스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을 아실 텐데도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바랐던 일은 카시스가 수호룡 중 한 마리인 에펜하르트의 이름을 이으면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선황 폐하께서는 에펜하르트의 이름을 이은 카시스를 칼리스토 대공으로 임명하고 칼리스타로 보냈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으로. 그런다고 포기할 제 어미가 아니었지만, 다행히 카시스는 제 몸을 지킬 정도로 충분히 강했다.

    저도 알고 있다. 황태후 폐하께서 카시스가 원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하나 그 또한 제 아들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제 아들보다 저를 더 챙겨 준 것 또한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마법 실력을 발휘했던 제가 카시스를 지켜 주기를 바라서였다는 것을 알았다. 저는 그 바람대로 카시스가 습격을 받았을 때면 언제나 곁에서 카시스를 보호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제 어머니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제게 화를 내며 찻잔까지 던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제가 말을 듣지 않자 칼립스를 만들어 낳고, 그를 이용해 그런 위험한 것을 제국의 불러들이려고까지 했다.

    “그것이 황태후 폐하께서 너를 지키는 방법이었다.”

    “아니요, 제가 뭘 하든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것뿐입니다.”

    겨울에 목검을 휘두르다 손이 부르터 피가 나도 들여다보지 않으신 분이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어머니께서 저를 봐 주기를 포기했다.

    “제가 많은 걸 바랐습니까? 단지 단 하나. 단 한 사람의 곁에 있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형님의 황좌를 바란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시스. 네가 바라는 것이 마린족의 공주이지 않느냐.”

    “반대의 말이라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만하십시오. 이번에는 안 된다고 해도 물러날 생각 없습니다. 그러니 포기하십시오.”

    반대라면 이제는 정말 지긋지긋하다.

    카시스는 킬리언의 말을 자르며 뒤돌아섰다.

    “저는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리고 로에나에게 함께 식사를 하지 못할 것 같다고, 미안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뒤돌아선 카시스가 살짝 돌아보며 말하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하아, 나도 반대만 하고 싶겠느냐? 차리리 황좌를 달라면 혼쾌히 내줄 텐데. 네가 바라는 것은 황좌가 아니지 않느냐.”

    왜 하필 이종족을 좋아해서 사람들의 좋지 않은 시선을 받으려는 것이냐는 말이다. 너는 어째서 가시밭길을 걸으려는 거냐.

    “정말이지 네게 황위를 던져 주고 싶지만, 준다고 받을 녀석이 아니니 그것도 불가능하고.”

    킬리언은 다시 한번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황태후 폐하를 향한 카시스의 이 말도 안 되는 오해를 어찌 풀어야 하는지 모르겠군.”

    카시스가 올려다본 하늘에는 태양이 뉘엿뉘엿 지며 붉은 노을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 * *

    “드디어 찾았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 슈레더 악시온.”

    멜로디가 아일라를 뒤에 숨기고 그 앞을 라피스와 윌리엄이 막아섰다.

    “라피스, 위험하니까 이리 와.”

    “저는 걱정 마세요.”

    라피스는 치마 안 허벅지에 채워진 가터벨트에서 두 자루의 단검을 꺼내 양손에 쥐었다.

    단검? 라피스?

    “아까부터 따라오던 기색이 네 녀석이로군.”

    아까부터 따라왔다고?

    “복구시킨 마을을 또 물바다로 만들면 곤란하다.”

    그때는 사람들이 없던 곳이고 시간도 이른 시간이었지만 지금은 곤란한데.

    구경이라도 난 듯이 사람들이 모여들고 가게 주인들도 밖으로 나왔다. 그 뒤로는 5단 분수대가 있었다.

    “그 여자, 나한테 넘겨. 내 여자야.”

    “누가 네 거야? 나는 내 거야. 나는 물건이 아니란 말이야.”

    사람을 물건 취급하고 있어.

    “슈레더 악시온, 공주님을 대하는 언행이 불경해.”

    멜로디의 미간에 주름이 갔다.

    “아직도 공주인 줄 알아? 왕은 이제 꼭두각시고 왕비도 우리 수중에 있는데.”

    뭐라고? 어머니께서 잡혀서 갇히셨다는 거야?

    아일라의 눈동자가 동요로 잘게 떨렸다.

    “저 녀석의 말은 믿지 마세요. 믿을 것이 못 되니까.”

    멜로디. 하지만 정말 잡힌 거라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아버지, 어머니는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내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직접 가서 확인해 보는 것이 어때?”

    슈레더 악시온의 말대로 저 말을 믿을 수 없다면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어.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저 말이 진짜든 아니든 나는 두 번 다시 뭍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될 거야.

    그건 싫어. 카시스를 다시 보지 못하다니, 그건 절대로 싫어.

    “내가 지금 너를 따라갈 일은 없어.”

    “말귀를 못 알아듣는 공주네.”

    분수대에서 물줄기 하나가 아일라를 향해 날아들자 멜로디가 다른 물줄기로 슈레더의 공격을 막아 냈다.

    “방해하지 마.”

    “너라면 방해 안 하겠니? 내 임무가 공주를 지키는 건데.”

    윌리엄이 슈레더에게 접근해 검을 휘두르자 물로 그걸 막아 내며 뒤로 물러났다.

    “칫.”

    슈레더가 주변에 모여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을 힐끗 보더니 열 가닥의 물줄기들을 만들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조종했다.

    그것을 본 아일라가 다급하게 물을 조종해 구경꾼들에게 날아가는 물줄기 중 일곱 줄기는 쳐 냈다. 하지만 세 줄기는 미처 쳐 내지 못하고 다른 방향으로 휘었다.

    안 돼!!

    제가 움직인 물줄기까지 총 여섯 줄기의 물줄기가 사람들을 향해 날아가는 것을 본 아일라가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사람들이 다치겠어. 내가 조종하는 물들만이라도 다른 곳으로 방향을 다시 틀게 해야 돼.

    ‘제발 틀어져!’

    아일라는 눈을 질끈 감으며 팔을 하늘로 뻗었다. 그러자 엉뚱하게 방향을 틀어 사람들에게 날아가던 세 줄기의 물들이 하늘로 향해 날아오르더니 ‘퍼엉-!’ 퍼져 비가 내리듯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어? 방금 내가 물들을 뜻대로 다루는 것에 성공한 건가?”

    소란스럽기는 하지만 고통에 신음하거나 겁에 질린 비명이 들리지 않자 눈을 뜬 아일라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물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맞다. 슈레더가 조종한 물은?”

    뒤늦게 고개를 돌리자, 멜로디와 윌리엄, 그리고 라피스가 슈레더가 조종한 물줄기들을 막아 낸 것이 보였다.

    “거 봐, 하면 되잖아. 공주님, 안 되는 건 없어.”

    손을 접었다 폈다 하던 아일라는 멜로디를 바라봤다.

    분명 어머니께서도 이제는 전보다 물을 조종하는 것이 수월할 거라고 하셨다. 하지만 이 정도로 좋아졌다고? 이건 너무 좋아진 것 아닌가? 그래도 이 정도로 좋아하긴 아직 일러.

    아직도 물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기도 하잖아. 물을 조종하는 연습은 더 하는 것은 일단 나중으로 미루자.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왜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을 끌어들여! 슈레더 악시온!”

    “상관이 없다니? 네가 이곳에 서 있게 했다는 것 자체가 상관이 있다는 거야.”

    “꺄악!”

    “으악!!”

    슈레더가 팔을 휘젓자 물줄기들이 다시 사람들을 향해 날아갔다.

    “그만두지 못해!!”

    “싫은데.”

    쾅!! 퍼엉!!

    물줄기들이 다시 사람들에게 날아가자 윌리엄과 라피스, 멜로디가 필사적으로 막았다. 하지만 막지 못한 물줄기에 사람들이 맞으며 중앙 광장은 사람들의 비명으로 가득 찬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그만두라고 했어! 악시온 슈레더!!”

    퍼어엉-!! 콰앙-!!

    아일라의 이마에 각인이 드러나며 그녀의 뒤에 있던 5단 분수대가 터졌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물줄기가 높게 솟구쳐 올랐다.

    “공주님? 아일라?”

    이 힘은······. 왕과 같아.

    “용서 못 해.”

    “뭐, 뭐야? 왜 이래? 이거?”

    슈레더가 물을 조종하려고 했지만 조종할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시도를 해도 실패할 뿐이었다.

    “이, 이게 왜 이러지?”

    “공주님? 아일라?”

    “절대로 용서 못 해. 아틀란뿐이 아니라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들을 다치게 하다니.”

    멜로디가 아일라를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일라가 슈레더를 향해서 손을 앞으로 뻗자 여러 개의 물줄기가 슈레더를 향해서 날아가 그를 옭아맸다.

    “이게 뭐야? 어째서 물을 조종할 수 없는 거야. 윽!”

    말도 안 돼. 이게 아일라 아틀란이라고? 물도 제대로 조종 못 하던 그 반푼이 공주라고?

    “젠장! 빠져나갈 수가 없어.”

    꼬르르륵-!!

    “숨이······.”

    말도 안 돼. 마린족인 내가 물속에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괴롭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아일라? 이건 설마? 왕께서 사용하시는 신의 힘 중 하나. 마린족이라면 거스를 수 없는 바다 신의 절대적인 힘. 절대복종……!”

    슈레더의 상태를 지켜보던 멜로디가 아일라를 돌아봤다. 아일라는 고개를 숙인 채 무슨 말인가 중얼거렸다.

    “······어. ······어. 죽어 버려!”

    “아일라!”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윌리엄 경.”

    윌리엄이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제키엘이 있었다.

    “이제키엘 경.”

    “마을을 거의 다 복구해 가는데 이게 대체. 하-,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기는 한데. 이번에는 다친 사람들도 있고, 대체 뭡니까?”

    이제키엘이 이마를 짚으며 낮은 한숨을 내뱉으며 아일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폭주. 아일라가 폭주하고 있어요.”

    “죽어 버려! 너 같은 건 죽어 버려!”

    멜로디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일라가 탁한 눈동자를 들어 소리쳤다.

    “폭주라고 했습니까? 그럼 같은 마린족인 당신이 어떻게 좀 해 보시죠.”

    이제키엘의 말에 멜로디는 ‘후우-’ 숨을 내뱉고는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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