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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69화 (69/100)
  • 69화

    카시스는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기분이 별로 좋지 못했다. 이미 제가 파르미온 왕국의 공주를 내쫓았다는 소문이 퍼져 있어서였다.

    “칼리스토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태후 폐하께서 전하를 뫼셔 오라 하셨습니다.”

    “······.”

    “맞아요. 어머니께서 오라버니를 꼭 데려오라 하셨어요.”

    무슨 말씀을 하실지 뻔하군.

    “그럼 가야겠지.”

    카시스는 걸음을 빨리했다. 자꾸만 드는 불안감에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불안감에, 서둘러 칼리스타로 돌아가 아일라가 무사히 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오라버니, 그런데 왜 그때 그분은 같이 오지 않았어요?”

    “같이 올 필요가 없으니까. 로에나, 쓸데없는 데 관심 갖지 마라.”

    “쓸데없는 데라니요? 오라버니의 연인인데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거 아닌가요?”

    “네가 알 필요 없으니 쓸데없는 관심이라는 거다.”

    “너무해요. 오라버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나는 오라버니의 하나뿐인 동생이라고요!”

    뒤따라오던 로에나가 걸음을 멈추고 소리치자 카시스도 멈춰서 뒤를 돌아봤다. 충격받은 표정에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잡고 눈시울이 붉은 것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하-, 미안하다. 지금은 괜히 지나친 관심 갖지 말라는 말이었다.”

    내가 아무래도 이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예민해져 있었나 보군.

    “때가 되면 그때 제대로 인사 시켜 줄 테니.”

    “그럼 그렇게 말하면 되지. 어떻게 제게 그런 심한 말을 하실 수 있어요.”

    “내 신경이 예민해져 평소 다른 녀석들에게 하던 대로 너를 대했구나. 미안하다.”

    카시스는 낮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다시 한번 사과의 말을 전했다.

    “오라버니가 잘못하신 거예요.”

    “그래.”

    “용서해 드릴 테니 제 부탁 들어주세요. 이렇게 오셨으니 가족끼리 식사해요.”

    로에나의 말에 카시스의 표정이 굳었다. 가족끼리에 황태후 폐하가 들어 있는 것은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미안하구나, 그건.”

    “제게 미안하시다면서요? 그러니 제 부탁 들어주세요. 그럼 어마마마와 오라버니 대화하는 데 저는 끼지 않을게요. 알았죠? 오늘 저녁 식사 함께하는 거예요.”

    그건 안 되겠다고 말하려던 카시스의 말을 자른 로에나는 밝게 미소 짓고는 먼저 발을 떼어 자신의 궁으로 향했다.

    멀어지는 로에나의 뒷모습을 보던 카시스의 미간에 실금이 갔다.

    황태후 폐하가 제 친어머니인 것은 맞으나 불편했다. 함께 자리하는 것도 불편한데 식사라고.

    “당했군.”

    “전하, 황태후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알았으니 재촉하지 마라.”

    시녀장의 재촉에 카시스는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 냈다.

    황태후 궁에 도착한 카시스는 시엘라와 마주 앉았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시엘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공, 파르미온의 공주를 쫓아냈다지요?”

    “쫓아낼 만해서 쫓아낸 겁니다.”

    “폐하께 파혼도 요청하셨고요.”

    “언젠가는 할 파혼이었습니다.”

    “대공, 제국의 황족이라는 사람이 기어이 국가 간의 분쟁을 일으키실 생각입니까?”

    이러실 줄 알았다. 이럴까 봐 만나고 싶지도, 수도에 오고 싶지도 않았다.

    “파혼에 대한 것은 약혼 전에 이미 정해진 것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대공.”

    “폐하께서 그 말씀은 하지 않으셨나 봅니다.”

    하기야 밖으로 새어나갈까 봐 형님과 저가 나눈 둘의 대화는 여지껏 비밀에 부쳤다.

    “무슨 말이냐 물었습니다.”

    “파르미온의 공주는 볼모였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 볼모를 화가 나서 내쫓았다. 아일라에게 쓰려고 했던 카르마의 독을 공주에게도 쓰거나 독 대신 돌아가는 중 습격해서 사고사로 위장해 죽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아일라가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너무 쉽게 죽인다면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아일라의 눈앞에서 멸망하는 것을 보여 준다는 말을 했다니 똑같이 본인의 눈앞에서 모국이 멸망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사고사로 죽일 수도 없었다.

    ‘아일라는 죽을 고비를 넘겼으니 파르미온 공주가 마차 사고로 좀 다쳐도 될 것 같은데. 이제키엘은 마법사니 흔적이 남지 않게 잘 처리하라고 지시를 해 놔야겠어.’

    이제 금지옥엽으로 자란 공주를 돌려보냈으니 제가 직접 움직여야 했지만 파르미온의 국왕이 그렇게 협조적이었다고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카시스는 직접 파르미온 왕국으로 가서 파르미온 왕국이 환영족을 숨기고 있다는 증거만 잡으면 똑같이 해 줄 생각이었다.

    파르미온 공주는 아일라의 나라를 찾지 못해서 실행하지 못했지만 카시스는 아니었다. 그것이 공주를 살려서 모국으로 보내주는 이유였다.

    “처음부터 파혼이 정해져 있던 약혼이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예, 그렇겠지만 언제나 제겐 말도 하지 않고 위험한 일을 서슴없이 하는 분들이니. 하나, 대공이 연인이라 소개했던 여인은 안 됩니다.”

    시엘라의 단호하고 엄한 말에 카시스의 한쪽 눈썹이 까딱 치켜 올라갔다.

    또 안 된단다. 폐하도 그렇고 제 주변인은 왜 안 된다는 말만 할까.

    “연회 때 그 여인, 이종족이라 들었습니다. 왜 안 되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 생각하니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왜 안 된다는 것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황태후 폐하.”

    정말 모르겠다. 저와 아일라의 관계에 왜 이리 쌍수를 들고 반대하는지.

    “이종족과 얽혀 좋을 일 없습니다. 어미 말 들으세요.”

    “어머니께서 제 어머니셨던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으십니까?”

    “대공.”

    “저보다는 황제 폐하의 어머니셨지 않습니까?”

    정치적인 문제와 대신들의 압박 때문에 사랑하는 어머니를 후비로 들이신 선황 폐하. 그리고 저를 눈엣가시로 여기면서 언제나 폐황후에게 목숨을 위협받던 제 아들에게는 제 것이 아니니 욕심내지 말라고 세뇌를 시키던 어머니. 습격으로 다친 아들보다 형님을 더 챙기시던 어머니는 누가 뭐래도 저보다 형님의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대공.”

    “아니었습니까? 언제나 제게 이리 말씀하셨죠? 황좌는 너의 자리가 아니니 욕심내지 마라. 제가 뭔가에 눈을 돌려도 늘 같은 말씀뿐이었습니다. 네 것이 아닌 것에 욕심을 내면 안 된다. 형님의 말에 따라라, 형님을 잘 보필해야 한다!”

    “······.”

    “그래서 지금껏 숨죽이고 형님의 말에 복종하며 그림자로 살아왔습니다. 황좌에는 욕심이 없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제게 이제 뭘 더 포기하라 하실 작정이십니까?”

    아일라에게 신경이 쓰였던 것이 단지 세상 물정 모르는 이종족 공주였기 때문이 아니라는 이유를 알게 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제 마음을 알아차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제가 어마마마의 친자식이기는 합니까?”

    “당연히 대공은 제가 낳은 제 자식입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겝니까?”

    “그렇다면 어마마마께서는 아들에게 참으로 모진 분이십니다. 어찌하여 아들이 원하는 것 하나 손에 쥐지도 못하게 하십니까?”

    이리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다. 여태껏 당연하게 받아들었기에 어머니의 말을 따랐다. 하지만 아일라에 관한 것만은 그럴 수 없었다.

    “전 단 한 번도 어머니의 뜻을 거스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제가 원하는 여인이 생겼다.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다.

    “반대하시려면 얼마든지 반대하십시오. 하오나 아무리 반대하신다 할지라도 저는 물러설 생각이 없습니다.”

    물러날 수 없다. 제가 물러선다면 아일라를 놓치게 될 테니까.

    처음으로 제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생겼다. 황좌와는 전혀 상관없는, 제 연인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었다.

    “아무리 어머니이실지라도 저와 아일라의 사이를 떼어 놓을 자격은 없으십니다.”

    “대공, 보는 눈들이 많습니다. 이종족은 안됩니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하나같이 안 된다는 말만 반복한다.

    “이제 그 소리도 지겹습니다!”

    카시스가 목소리를 높이자 시엘라의 눈이 커졌다.

    “황태후 폐하께서 언제 된다 하신 적 있으십니까? 단 한 번이라도 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신 적이라도 있으시냐는 말입니다.”

    있을 리가 없지. 친아들인 저보다 형님이 어찌 될까 전전긍긍하셨으니까. 누가 봐도 저보다 형님이 친아들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형님이 어릴 때면 저도 어렸다. 나이는 같아도 겨우 몇 달 차이였다. 그 어린 아들에게 어머니는 사랑 한 번, 관심 한 번 주신 적 없으셨다.

    “제게 관심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아, 관심은 갖고 계셨던 것이겠죠. 제가 뭘 해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셨고 반대해야 하니 지켜보고 계셨을 겁니다. 아니십니까?”

    “화, 황제 폐…….”

    쾅!

    “그만하거라, 시스.”

    밖에서 들리는 시종이 고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그 뒤에는 황후 또 그 뒤에는 로에나가 충격을 받은 채 굳어 있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네 어머니시다.”

    “폐하의 어머니시겠지요.”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제 어머니이신 적이 없으니 말입니다.

    카시스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카시스 반 에펜하르트 플루투스 칼리스토. 하아-! 따라오거라. 아무래도 대화가 필요할 것 같으니.”

    “······.”

    “따라오거라. 이것도 황명이라 해야 따라올 것이냐.”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는 카시스를 보며 킬리언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카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킬리언을 따라갔다.

    “황태후 폐하, 괜찮으신가요?”

    “괜찮습니다.”

    괜찮지 않으면 어찌하겠나. 제가 카시스를 저리 만든 것을.

    킬리언과 카시스가 자리를 옮기고 이사벨이 안으로 들어와 걱정스레 시엘라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씁쓸한 미소만 지으며 대답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저는 틀린 말은 한 적 없습니다.”

    “황태후 폐하께서 왜 그리 나를 이 자리에 앉히고 싶어 하셨는지 진정 모르는 것이냐?”

    “알아야 합니까?”

    “카시스.”

    킬리언의 엄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황제가 제국에서 제일 고귀하고 높은 자리이기는 하나 언제나 목숨을 위협받는 자리다.”

    “황제가 아니라 황족이라면 언제나 목숨을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황족뿐이랴. 귀족이라면 뜻이 맞지 않으면 서로의 목숨을 위협하고 죽이기도 한다.

    “너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내가 황위에 올라야 네가 안전하다 생각해서였어.”

    “변명일 뿐입니다. 제 자리가 아닌 형님의 자리를 제가 갖는 것이 싫으셨던 것뿐입니다.”

    “황태후 폐하께서는 너 이전에 아이를 가지셨다 하더구나. 하지만 욕심이 많은 내 어머니 때문에 그 아이를 잃으셨다 했지. 결국 선황 폐하께서 당시 제일 큰 힘을 지니고 있던 어머니의 집안과 귀족들의 압박으로부터 사랑하는 네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서 내 어머니를 황후에 앉히셨다. 그리고 네 어머니를 비의 자리에 앉히셨지. 선황 폐하께서는 내 어머니를 감시하며 증거를 잡아 내려, 금기를 저지른 정황이 있는지 증거를 잡으려 하셨다. 하지만 쉽지 않았지. 내 어머니께서 바로 뛰어난 흑마법사셨으니까. 해서 내 어머니를 잡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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