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종족이 다르다고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것보다 서로 이해하고 교류할 수 있는 거면 좋은 거잖아. 이 세상에는 나쁜 사람만 있는 게 아니야. 내가 뭍으로 올라와 그렇게 많은 사람을 만난 것은 아니지만, 이건 확실히 말할 수 있어. 아버지처럼 바깥세상과 단절하고 살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아버지가 나를 걱정하고 보호하려고 하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우리는 달라져야 해. 인간들을 무조건 멀리하면 안 돼. 세상을 경험하는 건 나쁜 게 아니니까.
인간 세상에도 배울 게 많아. 나도 아직 알고 싶은 것도 배우고 싶은 것도 많아.
“나는 아틀란을 바꾸고 싶어. 인간들과 친해지고 함께 살아가고 싶어.”
“아일라.”
멜로디는 씁쓸하게 아일라를 바라보다 옅은 미소를 짓더니 아일라를 품 안에 꼭 끌어안았다.
왕과는 반대의 길을 가려는 우리의 차기 후계자. 모두가 반대해도 그것이 가시밭길이라도 가려는 우리 공주님. 아일라에게도 지지자가 한 명이라도 있어야겠지.
“동생이 힘든 길을 가겠다는데 언니가 돼서 모른 체할 수 없지.”
“잠깐, 누가 언니야? 나는 외동이야.”
“어머, 잊었어? 우리가 아무리 소꿉친구라도 내가 나이가 더 많다는 걸.”
“그게 무슨 상관이야? 친구는 영원한 친구야. 이제 와서 언니 행세하지 마. 잠깐, 어디 가? 기다려 멜로디.”
“배고프다. 여기서 제일 맛있는 데 있으면 알려 줘.”
“기다리라니까, 멜로디! 아직 이야기 안 끝났잖아.”
아일라는 앞서가는 멜로디를 쫓아가며 불만스럽게 소리쳤지만, 멜로디는 웃으며 앞서 걸어갈 뿐이었다.
멜로디와 식사를 하던 아일라는 앞에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아졌다.
이 사람, 카시스와 함께 나왔을 때 만났던 남자였다. 클로에에게도 상당히 기분 나쁜 말을 했던.
“프란츠 영식,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러셀 경 아니십니까?”
윌리엄이 아일라와 멜로디가 있는 식탁으로 굳은 얼굴로 다가왔고 그 뒤로는 클로에와 라피스가 서 있었다.
“일어나십시오. 허락도 받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경이 무슨 상관입니까? 제가 여기 앉고 싶어서 앉은 것뿐입니다.”
“일어나라 했습니다.”
“같이 식사 좀 하면 어때서. 안 그래?”
벤자민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 아일라와 멜로디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싫은데요. 그리고 왜 저번에 만났을 때부터 반말이에요?”
“뭐 어때서 그래?”
“더 이상 무례는 용서 못 한다. 프란츠 영식, 어서 일어나라.”
윌리엄의 목소리와 어투가 바뀌자 벤자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공 전하의 연인에게 이리 무례하게 굴고도 무사할 것 같은가?”
“연인이라고 해 봤자 아무 데서나 몸을 막 굴리던 창녀 아닌가.”
벤자민의 말이 끝나자마자 쇠가 마찰하는 소리가 나더니 윌리엄이 겨눈 검의 끝이 벤자민의 목으로 향했다.
“내가 누군지 알면서 검을 겨누는 겁니까? 윌리엄 경?”
“그럼 너는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이러는 건가? 내가 기사이기는 하지만 후작이기도 하다. 백작가의 자제가 나와 맞먹으려고 하는 건가?”
“으-.”
“그리고, 하나 더. 감히 전하의 연인을 모욕하다니, 네 녀석은 목이 몇 개라도 되나 보지? 우리가 분명 아가씨로 부르는 것은 맞으나, 너보다 아니, 나보다도 고귀한 분이시다. 네 녀석 따위가 함부로 대해도 될 분이 아니야. 감히 그런 분께 창녀라고 하다니.”
저 창녀라는 말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듣자마자 기분이 나빴는데. 윌리엄 경이 화를 내는 것 보니 분명 굉장히 안 좋은 말일 거야.
“당장 일어나서 꺼져라. 이번 일은 전하께 보고할 거니 그리 알고.”
벤자민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후작 각하야말로 제게 이러고도 무사하실 것 같습니까?”
“네가 나를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은가? 프란츠 백작이라도 나를 어쩌지 못해.”
“으-. 너는 네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은가? 제 아비의 부귀영화를 누릴 뿐인 망나니 녀석이.”
“저를 모욕하시는 겁니까?”
“네가 아가씨를 모욕한 것에 비해서는 약과라고 생각하는데. 당장 꺼져. 안 그러면 그 목 위에 붙어 있는 쓸모없는 것이 사라져 버릴 테니까.”
시린 윌리엄의 목소리에 벤자민은 분해서 부르르 떨며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 밖으로 나갔다.
“식사하십시오. 저는 멀지 않은 곳에 있겠습니다.”
“저 사람 대체 뭐예요? 기분 나쁘게.”
“무시하셔도 되는 자입니다. 식사를 하시는 데 불쾌하게 해 드려 송구합니다. 아예 접근도 못 하게 막았어야 했는데, 제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을 겪게 해 드렸군요.”
윌리엄은 멜로디와 아일라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할 수 있게 잠시 밖에 나가 있었다. 그런데 클로에가 급하게 저를 찾아와 벤자민 프란츠가 허락도 받지 않고 예의 없이 아일라가 있는 자리에 앉았다는 말에 급히 들어온 것이었다.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들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윌리엄 경도 식사해야죠. 편하게 식사하세요.”
“가까이 있을 테니 부르십시오.”
윌리엄은 예를 갖추고는 아일라와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주위를 살폈다. 벤자민 같은 무례한 이들이 아일라에게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방금 그 무례한 작자, 꼼짝도 못 하네. 저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여기 있는 물들을 이용해서 내가 한 방 날리려고 했어. 감히 우리 귀한 공주님께 그런 말을 하다니.”
멜로디도 화내는 것을 보니 역시 내가 기분 나빴던 건 당연한 거구나.
“윌리엄 경이 방금 그 남자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나 봐.”
“흐음.”
전에 디오스와 아키오스 경에게는 함부로 했는데.
“강하기도 한가?”
“그렇지 않을까?”
싸우는 걸 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힘을 사용하지 않은 건 잘한 거야. 카시스는 내가 힘을 사용하고 마린족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기를 바라.”
“알 것 같네. 인간들은 위험해.”
“카시스는 위험하지 않아.”
멜로디의 말에 위험한 인간들에서 카시스는 빼 달라는 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에 멜로디는 아일라가 그에게 갖는 감정이 진심임을 알게 됐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아일라와 멜로디는 분수대가 있는 중앙 광장으로 향했다.
“중앙 광장에 분수대 봤어?”
“아, 그 시원하게 물을 뿜어 내던 거. 슈레더 자식이 습격했을 때도 근처에 있었는데 그 녀석이 그 물을 사용해서 공격했거든.”
“중앙 광장에 분수대는 더 커. 무려 5단 분수대라고! 나 그렇게 큰 분수대 처음 봤어. 분수대에는 용 모양도 있는데 정말 멋져. 보여 줄게.”
“위로 물을 뿜는 건 물을 조종하는 우리도 가능하잖아?”
“우리가 물을 조종해서 만드는 거 하고는 느낌이 달라. 누가 제이드 각인자 아니랄까 봐. 멜로디는 낭만이 없어.”
“낭만이 없다니 말이 심하잖아, 철부지 공주님.”
“나 어린애 아니야. 철부지라고 하지 마. 정말 봐서 후회하지 않는다니까.”
아일라는 멜로디의 손을 잡아끌었고 그 뒤를 윌리엄과 클로에, 그리고 라피스가 따랐다. 그리고 그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다 뒤에서 조용히 쫓는 자가 있었다.
“우리 뒤를 밟는 자가 있습니다.”
라피스가 윌리엄의 곁으로 바짝 다가가 속사였다.
“알고 있다. 어떤 자인지 확인해. 나는 아가씨 곁을 지킬 테니.”
라피스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뒤로 몇 걸음 물러나 모습을 감췄다.
* * *
“내가 승인도 하기 전에 파르미온의 공주를 쫓아냈다고? 하아-. 카시스.”
킬리언은 황좌에 앉아 이마를 짚었다.
본래 이 녀석이 이런 녀석이 아니거늘.
“제 연인이 죽을 뻔했습니다.”
“가짜이지 않느냐?”
“누가 그럽니까? 가짜라고?”
카시스의 대답에 킬리언의 표정이 굳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거짓이었던 적 없습니다.”
처음엔 마린족의 세상 물정을 모르는 공주님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눈길이 가고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파르미온의 공주에게는 처음부터 마음이 없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도 약속을 지키십시오. 제가 진심으로 마음을 주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파혼하게 해 주신다 하지 않았습니까.”
“마린족의 공주는 안 된다.”
“왜 안됩니까?”
“몰라 묻는 것이냐?”
“사람들의 시선 따위 중요하지 않습니다.”
“카시스.”
킬리언이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카시스를 불렀다.
“폐하께선 분명 폐하의 자리를 걸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 그랬지.”
“그러니 약속을 지켜 주십시오.”
“하아-, 그래 약속은 지키마. 하나, 마린족의 공주와의 혼인은 안 된다.”
카시스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도와 달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무조건 안 된다 반대하고 방해하지 마십시오.”
처음이다. 이리 원하고 갖고 싶은 것은. 그러니 저는 절대로 아일라를 놓을 생각이 없다.
“차라리 벨로체 자작을 다시 만나.”
“싫습니다. 벨로체와의 인연은 이미 끝났습니다.”
“카시스.”
“끊어진 인연은 강제로 다시 이어 붙일 수 없습니다. 파혼을 허락하신 것으로 알고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직접 파르미온 왕국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카시스. 시스.”
킬리언이 부르는데도 카시스는 알현실을 나왔다.
“저 녀석이 정말. 하아-.”
폐하께서 반대하신다 할지라도 제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 포기하십시오.
알현실을 나온 카시스는 빠르게 걸었다.
“시스 오라버니!”
저를 부르는 소리에 생각을 접고 앞을 보자 로에나가 뛰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뒤로는 뛰지 말라며 따라오는 시녀장과 시녀들이 보였다.
“로에나.”
“저를 보고 인상은 왜 찌푸리세요?”
“무슨 일이냐?”
“저희가 꼭 무슨 일이 있어야 만나는 사인가요? 오라버니께서 오셨다기에 달려왔어요.”
“오라버니, 파르미온의 공주를 쫓아냈다면서요?”
하-, 벌써 소문이 퍼진 건가? 내 영지에서 있었던 일이 황궁에 벌써 퍼지다니 빠르기도 하군.
황궁이라 어쩔 수 없나. 제가 아무리 형님께서 서신을 보냈다고 할지라도 함부로 말하실 분은 아닌데. 황태후 폐하께는 말씀드렸겠지만. 쥐새끼들이 퍼트린 모양이군. 내 일에 왜 이리들 관심들이 많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