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벨로체 자작님.”
“걱정 말아요, 로체스터 영애. 저는 파르미온의 공주처럼 대공 전하를 적으로 돌릴 만큼 어리석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는 화가 나면 폐하 못지않은 분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 전하께서 직접 나서시면 지도에서 나라 하나가 사라질지도 모르겠군요.”
지도에서 뭐가 사라져? 나라가 괜히 왜 사라진 거야?
“파르미온 공주께서 정말 어리석은 짓을 했어요. 전하를 움직이게 만들다니. 플루투스 제국의 쌍둥이 수호룡 중 한 마리의 이름을 물려받은 전하의 연인을 해할 생각을 하다니, 정말이지 어리석은 선택이었죠. 그 바람에 대공 전하께서 직접 움직이실 생각이신 것 같지만요. 아무리 제국의 대공이라지만 타국에서 움직이기는 쉽지 않을 텐데요.”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러셀 후작 각하.”
아나스타샤가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뒤돌아 인사를 했다. 그곳에 있는 것은 윌리엄뿐이 아니었다. 이제키엘도 윌리엄과 함께 와 있었다.
“누가 아가씨와 만나도 된다고 했습니까? 벨로체 자작.”
윌리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잠시 인사를 나눈 것뿐이랍니다.”
“전하께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을 허락했다면 카시스가 제게 아무 말도 없이 수도로 갔을 리가 없었다.
“다시는 이런 식으로 멋대로 아가씨를 만나지 마십시오. 이곳에서 멋대로 굴면 제약을 걸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각하와 윈터우드 경이 직접 온 걸 보니, 전하께서 진심이신가 보군요.”
“벨로체 자작님, 이러시면 전하께서 싫어하십니다.”
“해를 입히려고 만난 것이 아니니 표정들 푸세요. 그냥 인사를 하러 온 것이니 말입니다.”
“인사를 하는 것치고는 쓸데없는 말을 하는군요. 벨로체 자작.”
윌리엄은 아일라를 힐끗 보고는 아나스타샤에게 낮게 더 이상 아무 말 말라는 경고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윌리엄도 카시스가 파혼하기 위해서 직접 파르미온 왕국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일라가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카시스도 아일라에겐 말하지 않을 테니까.
“벨로체 자작님, 저와 함께 가 주십시오.”
“그러죠. 후작 각하께선 제가 전하의 연인과 같이 있는 것은 물론, 인사를 나누는 것조차 싫으신 모양이니 말입니다.”
아나스타샤는 이제키엘과 함께 정원에서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아일라를 보며 입을 열었다.
“친구분과 밖에 다녀오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저 나가도 되나요?”
“예, 멀리 가는 것이 아니라면 괜찮습니다.”
떠나는 것만 아니라면 괜찮다. 저도 정말은 제 친우이자 상관인 카시스가 이종족과 함께하는 것이 괜찮은지 잘 모른다. 하지만 카시스가 원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저는 지지해 줄 것이다.
카시스는 단 한 번도 제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가지려고 하지 않았던 친우였다. 한데 그가 뭔가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저는 전적으로 카시스가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란다.
“나가신다면 제가 호위하겠습니다.”
“클라우디스 경들은 아직 근신이 끝나지 않은 건가요?”
“아직 안 끝났습니다. 전하께서 돌아오실 때쯤 끝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하께서 빠르면 닷새에서 열흘 안에 돌아오실 겁니다.”
폐하께 붙잡히지만 않는다면, 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나가시겠습니까?”
“나갈게요. 나가자, 멜로디. 나를 찾아다니느라 구경도 제대로 못 했을 거 아니야. 뭍으로 올라온 김에 구경 실컷 하고 돌아가. 제이드 걱정은 하지 마. 제이드는 강하잖아.”
어머니도 괜찮으실 거야. 나는 어머니를 믿어.
어머니라면 아버지를 원래대로 되돌리실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아틀란을 되찾고 연락해 주실 거야.
아버지가 어머니를 다치게 하실 리가 없으니까.
“그럼 전 마차를 준비시키겠습니다.”
윌리엄은 클로에를 힐끗 보고는 돌아나갔다.
* * *
아일라는 웬만큼 복구는 되었지만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마을을 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마을이 왜 이러지? 카시스와 함께 나왔을 때만 해도 멀쩡했는데.
아일라의 의아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제이드가 그런 거야.”
옆에서 들린 멜로디의 대답에 아일라가 입을 떡 벌리고 고개를 돌렸다.
“미쳤어? 미친 거지? 남의 마을에 와서 무슨 짓이야?”
다친 사람들은 없겠지. 괜히 상관없는 사람들이 말려들어서 다쳤으면 어쩌지.
“어쩔 수 없었어. 제이드도 방어를 해야 했으니까. 왕비님도 계셨고. 이 마을 밑에 수로를 끌어 올린 거야. 지하에 있는 물을 끌어올리는 데 제이드도 힘을 꽤 사용했어.”
지금 혼인할 각인자라고 편드는 거야?
“그래도 상관없는 사람들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잖아.”
카시스가 다스리는 마을인데.
“거의 복구됐고 다친 사람들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우리 일로 폐를 끼쳐서 미안해요.”
윌리엄의 말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사과했다.
카시스가 돌아오면 따로 사과해야겠다.
“그런데 네 각인자, 강하기는 하더라. 슈레더 악시온을 잘도 날려 보내던데.”
멜로디의 말에 아일라의 얼굴이 굳으며 미간에 실금이 갔다.
지금 누가 누구를 어째? 내가 잘못 들었나?
“누가 누구를 어쨌다고?”
누가 누구를 날려 보내? 그것보다 누구라고? 슈레더 악시온, 그 이름이 지금 여기서 왜 나와? 아니, 그것보다.
“카시스와 슈레더 악시온이 만났어?”
“그 녀석이 왕비님을 추격해 온 추격자였어.”
“뭐?”
“평소의 제이드라면 괜찮았겠지만 제이드는 부상당한 상태로 회복이 덜 된 상태였거든.”
제이드가 부상을 당했다고? 내가 볼 땐 멀쩡했는데. 하지만 멜로디가 내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어.
그런데 대체가 누가 제이드에게 부상을 입힐 수 있는 거지? 내가 알기로는 슈레더 악시온은 불가능해. 제이드가 훨씬 강하니까. 설마.
“아니야. 아닐 거야.”
아버지가 제이드를 공격했을 리 없어.
“아일라?”
“설마 아니지? 아니라고 말해 줘, 멜로디.”
이상한 낌새에 아일라를 불렀던 멜로디는 아일라가 무엇을 바라고 제게 묻는지 알아챘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 줄 수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멜로디를 보니 답이 나왔다. 아일라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일라. 내가 전해 들은 말로는 갑자기 들이닥친 악시온의 병사들과 마물들 때문에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고 해. 하지만 왕비님과 왕께서 만나면 왕께서 뭔가 반응이 있지 않을까? 부인이시잖아. 그러니까 왕비님을 믿어 봐. 왕비님께서 좋은 소식을 전해 오실 거야.”
왕비님께서 왕을 뵐 수 있다면. 하지만 괜히 아일라를 불안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저도 함께 가고 싶었지만, 저를 아일라 곁에 남긴 이유는 최악의 사태를 생각해서였을 거다.
제게 무슨 일이 있어도 아틀란의 유일한 후계자인 아일라를 지키라고.
“그러니 마을 구경해. 내게 마을 구경시켜 주려고 나온 거잖아.”
“그렇지만…….”
“그렇지만이 아니야. 아니면 왕비님을 믿지 못하는 거야?”
“나는 단지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는 게 싫을 뿐이야.”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다투시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 두 분이 싸우시게 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으그그-. 므하으거야.”
갑자기 뺨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고 멜로디를 바라봤다.
“심각하기에 나도 모르게 그만. 너하고 심각한 건 안 어울려, 아일라.”
“므아구 어므애.”
볼이 잡아당겨지면서 발음도 어눌해졌다.
“내가 아는 우리 공주님은 아무런 걱정 없고 사랑받고 자라서 어리광이 심하고 제멋대로에 둔하고 고집이 센 세상 물정 모르는 공주님인데.”
“느아- 아파.”
아일라는 멜로디의 손을 쳐내고 잡아당겨진 왼쪽 뺨을 어루만졌다.
“아프잖아. 진짜. 네가 말한 건 전부 틀렸어. 나는 어리광도 심하지 않고 제멋대로도 아니고 둔하지도 않고, 걱정이 없지도 고집이 세지도, 세상 물정을 모르지도 않아.”
“어머, 전부 부정하는 거야? 슈레더 악시온과 언약식 하기 싫다고 가출한 것 자체가 제멋대로에 어리광부리는 거라고 하는 거야. 이유를 제대로 말을 했어야지.”
“말하려고 했어! 몇 번이나 말하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내 말은 들어 주려 하지도 않았단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네 행동이 잘했다고는 할 수 없어. 너는 아틀란의 유일한 후계자야. 공주로서 책임감이 있어야지.”
“나도 잘못된 행동이었다는 걸 알아. 하지만 아버지가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했어.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혼인이라니 최악이야.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서로 사랑하는 반려를 원했을 뿐이야. 멜로디도 제이드를 사랑하잖아. 나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런데 그 사랑하는 반려를 왜 인간들 사이에서 찾는 거야?”
“그건!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 속 주인공들 같은 사랑을 하고 싶었으니까.”
종족이 달라도 서로 사랑해서 맺어지는 행복한 결말. 저도 그런 사랑을 하고 싶었다. 그게 어머니가 불행한 결말을 행복한 결말로 바꿔 들려준 이야기인 줄은 몰랐지만. 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꿈을 키워 나갔고 반드시 이야기 속 주인공들처럼 인간과 행복한 삶을 살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내 반려만큼은 같은 마린족에서 찾는 것을 거부했고 밤마다 몰래 물 위로 올라와 언젠가 물 밖 세상을 여행하며 반려를 찾을 기대를 키워 갔다.
어머니께서 들려준 이야기가 거짓이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나는 인간을 반려로 삼은 최초의 마린족이 될 거고 행복해질 거야.
“인간을 반려로 삼겠다는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아. 그것만큼은 나도 물러설 생각 없어.”
“그게 바로 고집이 세다고 하는 거야. 아일라.”
“고집이 센 것과는 달라. 나는 내 의견을 강하게 밀고 나갈 뿐이야. 지도자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배웠어.”
“그건 맞는 말이야. 하지만 잘못된 판단을 했을 때는 주변 사람의 말도 들어 줘야 하는 것도 네 일이야.”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물론 가출은 잘못한 거지만. 인간들과 교류하면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돕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